이서국(伊西國)
이씨(伊氏)의 원조가 단군 왕검 백익(伯益)의 성으로 밝혀저, “August 5, 2017”에 올렸던 글을 보충 하여 다시 올립니다.
위키백과에는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발표에 따라
여기 까지는 필자가 살펴본 내용과 일치 한다. 그러나 다음에 따라 붙은; 는 문구는 이해 할수가 없다. 일연 스님은 출처를 밝혔지만 이서국이 있던 곳을 잘못 풀이 했다.
첫쩨: 시대 판별에 혼란이 왔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제 3대 노례왕 14년(弩禮王樸弩禮尼叱今一作儒禮; 제위 24년-57년)인 38년에 이서국 사람들 (伊西國人)이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다 . 스님은 시조 박혁거세 부터 3대 노례왕까지의 내력을 했다. 건국초기라 고란(苦難)이 많았다. 제일 큰 어려움이 38년에 있었던 이서국의 친입이였다. 밭가는 보습을 만들어 쓰고 얼름을 보관하는 창고를 만들고 우마차(作車乘)를 만들었다. 육부(六部)의 이름을 개정하고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다. 향가의 시작이다 . 기원후 42년 (建虎/建武十八年) 에는 이서국을 처서 없에 버렸다. 그해에 고구려 군사(高麗兵)가 친입 했다.
신라의 제3대 유리 이사금(儒理 尼師今, 弩禮 尼師今, 弩禮王,재위: 24년~57년)이 제위 18년(42년)에 장성 남쪽에 있던 이서국을 정벌 했다 . 이때 부터 제일 높은 관직을 이벌찬(伊伐湌)이라 했다. 그 다음이 이척찬(伊尺湌) 밑으로 “xx湌” 하는 관직명이 나타났다 . 제4대 석탈해왕(昔脫解, 脫解尼師今, 재위: 57년~80년)은 박씨 귀척(朴氏貴戚)을 주군(州,郡)의 지도자로 했다. 순정을 이벌찬(伊伐湌)으로 했다. 신라 건국 초기에는 이서국(伊西國) 정벌이 제일 큰 국책이였다고 본다.
이서국 (伊西國人)이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있다 . 그러나 시대와 집권자의 이름이 다르다. 제3대 노례왕 (弩禮王)이 14대 유리이사금 (儒禮尼師今)으로 바뀌였다. 고기에는 3대, 14대 두 왕의 휘가 같다. 유리 또는 유례라고 한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다. 삼국사기에 고기운 통감(古記云: 通鑑)이란 문구가 있다. 이후에 누가 옛적 기록을 고쳤다.
분명한 점은 이서국(伊西國)은 만리장성 동남쪽 끝, 발해만 서쪽에 있었다. 이를 신라가 정벌 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와 같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공손연 패망 이후가 된다. 이때 고 한다. 미추 이사금은 김씨로는 처음으로 왕이된 김알지 (金閼智)의 후손이다. 그는 노례이사금 다음 왕 4대 탈해이사금 (脫解尼師今, 재위:
57년~80년) 시대에 처음 나온다. 천우신조의 음덕을 김씨 왕조와 연계했다.
신라건국 초기에는 인접해 있던 중원에서 피란민이 많이 왔다:
한무제 (漢武帝, 재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가 고조선을 점령하고 20년 뒤에 죽었다. 그의 말기 부터는 한나라 황실은 환관과 외척간의 권력 싸움으로 소란이 많았다. 서기 23년에 노례왕이 즉위 할 때 중원은 농민 폭동에 휘말렸다. 한나라의 외척 왕망(王莽; 기원전 45년 ~ 기원후 25년) 이 신(新; 8년 ~ 23년) 나라의 황제가 되였다. 반기에 가담하여23년 에 신나라의 왕망을 살해하고 경시장군(更始將軍)이 되여 어려운 시기에 황제를 맡은 첫 지도자라 하여 현한 경시제(玄漢 更始帝)라 한다. 그러나 25년에 측근에 의해 교살 당하고 광무제(漢 光武帝, 劉秀: 25년 ~ 57년)가 실권을 잡았다. 이러한 혼란기에 투후(秺侯) 김일제 의 후손으로 알려진 김 알지는 동한 광무제 집권이후에 남만주로 올라와, 삼한의 후예들이 여러 부족 국가로 자리를 잡던 시대에 동참 했다.
이서국 사건은 고구려의 제 3, 4대 왕 때에 발생 했다; 대무신왕(大武神王; 4년~44년)때인 37년에 최리의 낙랑국을 정벌하니, 낙랑의 유민 5000명은 신라로 투항하였다. 그러나44년에는 후한(後漢) 광무제 (光武帝)가 다시 낙랑을 정복하여 살수(薩水) 이남을 한나라 영토로 하였다. 제 4대 민중왕 (閔中王, 재위: 44년 ~ 48년) 4년인47년에 잠지락부 (蠶支落部) 대가대승 (大家 戴升) 등 1만여 가(家)가 한(漢)의 낙랑으로 투항했다.> 고구려 기록과, 삼국지에 실린 는 사건들과 시대와 장소가 일치 한다. 삼국지 에는 대륙백제를 은페하여 삼국사기 백제 기록에는 이 사건이 실리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삼한의 후예들이 발해만 연안을 따라 활발하게 교류 했고 국경이 분명치 않았다는 증거다. 많은 가호가 “xx에 투항 했다”는 기록은 그 지역의 통치권이 바뀌였다고 풀이 함이 합당 하다고 본다. 대륙 백제 전성기에 발해-요동만 연안에 있던 다른 부족 국가와 같이 한해를 통하여 서쪽으로는 중국의 동쪽 해안을 따라, 한해의 동쪽으로는 한반도 서해 연안을 따라 일본 서남부 여러 섬으로 퍼저 나갔다. 졸본부여 경기지역과 동 서 두 백제 수도 간의 삼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 졌던 유산물 대동강 유역의 낙랑유적으로 알려 졌다. 일세기 초에 발생한 사건들을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범엽(398년 ~ 445년)이 정리한
후한서에서는 시대와 장소를 바꾸었다. 바꾸어 놓은 기록을 삼국사기 편집진이 그대로 받아 드려 이서국에 관한 기록에 혼란이 나타났다.
두 쩨: 지역 판별에 혼란이 왔다.
대성군(大城郡)의 출처는 삼국유사에 실린 운문사 소유권을 밝힌 기록이다 .
新羅又赫居世五十二年東沃沮來獻良馬。則又有東沃沮矣。指掌圖。黑水在長城北沃沮在長城南伊西國弩禮王十四年。伊西國人來攻金城按雲門寺古傳諸寺納田記云。貞觀六年壬辰伊西郡今郡村零味寺納田。則今郡村今清道地。即清道郡古伊西郡一五伽耶按駕洛記贊云。垂一紫纓。下六圓卵。五歸各邑。一在茲城則一為首露王。餘五各為五伽耶之主。金官不入五數當矣。而本朝史略。並數金官而濫記昌寧誤
일세기 초에는 당나라나라가 타나기 전이다. 납전기에 실린 청도 땅 (今清道地)은 당나라의 통치 영역이였다. 한반도 밖에 있어야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진수의 삼국지에 나타난 지명을 종합해 보면 이서국(伊西國) 은 변진전(弁辰傳)과 한전(韓傳)에 속해 있던 부족국가 였다 . 음과 뜻을 고려하면 비슷한 나라 이름이 있었다. 요동만 서북쪽 해안 일대, 신라수도 금성(金城)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 신라는 그 일대에 있던 낙랑 백제 왜 말갈(樂浪, 百濟, 倭, 靺鞨)의 습격도 많이 받았다. 마한(馬韓)이 서쪽에 있다 하여 마한의 군주를 서한왕 (西韓王)이라고 했다.
중국 상고사 기록은 원주민의 말을 , 그들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받아 드릴수 없게 되였다. 이러한 이동 경로는 다른 부족국가 이름에서도 나타 나야 한다. 그 한 예가 흉노 열전에 나오는 월씨(月氏)다. 이를 <월(月; yuè) 자는 모형이 비슷한 목(目), 또 그와 형태가 비슷한 일(日, 壹)로 바꾸기도 했다. 씨/지(氏; shì zhī jīng )를 여러 사음 대자로 바꾸어 적은 부족 이름이 중앙아시아 에서 만주를 거처 일본 열도에 이르렀다. 중앙 아시아에 감숙성 일대에 살던 월씨 부족이 만주 땅에 와서 살 때는 목지국(目支國)이라 했다. 후한서, 통전, 태평어람에는 다 같이; “馬韓最大,共立其種為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라 했다. 삼국지에 실린 월지국(月支國)을 후세 사가들이 목지(目支國)라 적었다.
대한 해협을 건너 가서는 일지국(日支國)으로 나타났다. 그들이 있던 섬을 음이 같은 일지도(壹岐島)라 했다. 삼국지 위지(魏志) 왜인전 (倭/汗人傳)의 일대국 (一大國)을 통전(通典)에는 일지국(一支國)으로 기록 되어 있다. 월씨(月氏)가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 인도에도 나타났다는 기록이 여러 문헌 있다 . 왜인전에 나타난 이도국(伊都國)사람이 옛 이서국(伊西國) 지역에서 내려 갔다고 추리 된다 .
현 북경어로 이시(伊西;[yī] [xī])라고 읽는 나라 이름은 음과 훈을 뒤석어 만든 글자다. 설문 해자에; 했다 . 사기에는 했다. 묵자(墨子)에는 고대 국가 건국에 공헌한 사람을 열거 하면서 이라고 했다 . 상나라 건국을 찬미한 시경상송 장발 (詩經 商頌 長發)에는; <실유아형 실좌우상왕 (實維阿衡, 實左右商王)이라, 아형이 라고 했다 . 한국 다움사전(Daum Dictionary)에는 아헝(阿衡, A-heng)을 로 쓰인다고 했다.
수경주 이수(水經注 伊水) 편에는, 고 했다 .
이수(伊水)는 낙수(洛水)와 같이 함곡관 서쪽 황하문명의 발생지에 있었다 . 자세한 설명은 앞서 올린 “단군조선의 사제권과 통치권을 위임 받았던 백익(伯益)-1&2” 에 있다.
산서성 해지 연안에 살던 사람들의 후손이 만주땅으로 옮겨와 부여와 고구려를 세웠다고 논증 되였다. 고구려 왕에는 이리모(伊夷模)가 있었다.
앞서 여러번 고 밝혔다 .
이서국의 서(西;xī/sai1/sei)자는 사음자로 쓰였다고 본다. 이서국(伊西國)이란 뜻은 란 뜻이다. 단군조선의 통치권을 이어 받은 백익(伯益)의 후손이 살던 곳이다.
그들의 분파가 옛적부터 교류해 오던 한해(翰海)를 따라 중국 동쪽 해안 지대에 내려가 살았다. 다른 한 분파는 한반도 서해 연안을 따라 흐터져 나갔다. 이를 일연 스님이 불교사원의 납전 (納田)기록에서 찾았지만 해석을 잘못 하여 중국 땅에 있던 이름을 경상도 청도 땅(淸道地) 금오촌(今郚村) 이라고 잘못 인식 했다고 본다. 공손씨가 실권을 누리던 2-300년대에는 불교 사원이 한반도에 없었다.
끝, 다음에 계속
August 5, 2017. Revised on September 6,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