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전사사(前四史)중에 사기와 삼국지가 일차 사료다.
사마천의 사기는 발표된 당시부터 어용학자들의 시비거리로 가필 수정이 많이 되었다. 다행이 사마천은 “凡百三十篇,五十二萬六千五百字,為太史公書” “余述歷黃帝以來至太初而訖,百三十篇” 황제로부터 태초 까지 (太初; 前104年—前101年) 130편이라고 밝혔다.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년? – 기원전 86년)의 사기 여러 곳에 저소손 (褚少孫)이 가필 했다(褚先生曰)는 증거가 나타나고 창해군 지역에 나타난 공손도의 혈통이 신흥유학파의 실천자 평준후 공손홍(公孫弘)이라는 인식을 남긴열전 (平津侯主父列傳) 에는 한서의 저자 반고(班固; 기원 후 32–92)가 이르기를 하는 문구가 있고, 사마천 이후 사람인 유향(劉向; 기원전 77년 ~ 기원전 6년) 의 이름도 실려 있다.
한무제는 진시황과 같이 불로장생을 꿈꾸고 신선(神仙, 神僊人)을 믿었다[1]. 그러한 사실을 알고 부터는 신흥유교 어용학자들은 도참설을 인용하여 각종 고전을 많이 가필 증정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문구가 그 책의 저자가 남긴 말>인가를 확인 하기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글자풀이를 잘못 했다.
사마천이 신흥유가의 지침에 따라 치수 사업을 마치고 만든9주 땅을 한 무제 당시의 영토로 둔갑 하느라고 지명을 변두리로 몰았다. 처음으로 중국역사의 시발점을 오제 본기로 기술 했다. 사마천이 처음으로 오제 본기를 편찬 했지만 그 내용은 그 전부터 전해오던 기록과 설화를 종합하여 만들어 일차 사료 라기 보다는 그가 작성한 역사 수필이다.
그 뒤를 이은 우본기가 중국역사의 시작이다. 오제본기에는 황제부터 융우까지 성씨는 같으나 나라이름이 다르다. 황제를 유웅씨, 전욱을 고양, 제곡을 고신, 제요를 도당, 제순을 유우, 제우를 하후씨 별성으로 성이 사씨다[2]. 계/걸/설/글(契)이 상을 세워 자씨, 쫓겨난 기(棄)이 주를 세운 성이 희씨다.
융우가 백익의 도움으로 치수사업을 성공하고 세운 나라를 햇님의 후손 “國號曰夏后”이라 하고 융우의 성은 사씨 (姓姒氏)라고 밝혔다. 같은 하본기에 <융우(戎禹)의 성이 사씨 (姓姒氏)라 하고 나라 이름을 하후(夏后)라 했다> 하여 하후(夏后)라는 성씨가 생겼다. 아버지로 부터 왕위를 이어 받은 아들이 성을 바꾸었고 이름자 또한 혼미하게(啟, 启, 啟明, 啓明)사용 한다.
水經注 江水 神孟涂所處,《山海經》曰:夏后啓之臣孟涂,是司神于巴,巴人訟于孟塗之所,其衣有血者執之
海內南經:夏后啟之臣曰孟涂,是司神于巴,人請訟于孟涂之所,其衣有血者乃執之,是請生。居山上,在丹山西。丹山在丹陽南,丹陽居屬也
신해혁명 (辛亥革命; 1911년) 이후에 나타난 북경 대학 중심의 사학자들이 주동이 되었던 고사변학파 또는 의고파(擬古派)에서도 우본기를 의심 했다. 그 논쟁의 핵심은 융우(戎禹)가 지도권을 백익(伯益)에게 이전 한 이후에 나타난 백익 살해 사건을 은패하고 주모자를 하 (夏) 왕조의 두번쩨 군주로 (夏后帝啟)풀이 했다 [3]. 그 내용에는 의문이 많아 서양 학자들은 하 (夏) 왕조 실존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햇님의 후손이라 부르는 나라의 지도권을 백익이 만장일치로 위임 받아 왕주 왕 이란 뜻의 왕검(王儉)이 되었다.
백익이 순임금으로 부터 사제권을 이양 받고, 치수사업의 동반자 융우로 부터 통치권을 이양 받은 최초의 제정일치 지도자 단군왕검이다. 백익을 죽인 폭도들의 주모자는 신원이 불확실 하다. 그를 지도자(帝)라하고 그의 소속은 이름마저 빼앗아 하후(夏后)라고 했다. 중국역사에 하조(夏朝)라고 하는 이름은 지도자 단군 왕검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아 만들어 붙인 이름이다. 하여 사기에는관자에 나오는 발조선(發朝鮮)이란 이름이 없다.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여주(餘州) 또는 북주(北州) 라 하던 곳이 북쪽 산서성에 살았다. 그 곳을 물수 변이 없는 발해(勃海)라고 했다.
신흥유가에서는 이렇게 지도권을 찬탈한 사실을 조직적으로 은패해 왔다. 짜고친 고스톱 상황이 맹자 만장편에 실렸다[4]. 이를 사마천이 인용하여 하본기에 실어 신원이 불확실한 개(啟)가 하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여씨춘추와 산해경에는 개의 신하 맹도(孟涂)가 살인 사건에 관련되었다. 피묻은 옷이 증거품으로 제출 되였다[5].
숨겼던 사실이 급총죽간에 백익이 추장 (干/乾)개(啟)를 세웠더니, 개가 이끄는 일당이 (백익을) 주였다 (益乾啟位,啟殺之)는 기록이 나타났다[6].
사료를 뒤돌아 보면 백익을 죽였다는 기록이 사마천 이전 또는 이후의 기록 “山海經, 竹書紀年, 逸周書 嘗麥解, 呂氏春秋, 韩非子, 戰國策, 論衡”등 여러 곳에 실렸다[7]. 상서 감경(尚書 甘誓)이 당시의 권력 투쟁을 묘사 했다.
한비자에는 자지(子之;? – 기원전 314년)가 선양 받고 죽은 사건을 옛적에 백익 (則子之亦益也)이 선양을 받고 죽은 사건에 비유 했다[8]. 그 러한 역사적 사실이 전국책 연책에는 연왕이 소진과의 대화 속에도 나타났다[9].
백익 살해 사건이 논형전허(論衡 雷虛)편에도 있다[10]: <하왕조가 이루어지던 시절에 살인 사건이 일어 났다. 이를 세간에는; 세워 놓은 나무(장승)를 자른 사람이 하늘에 용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가 살인자야> 라고 했다. 백익을 죽이고 지도권을 빼았었던 사건을 그렇게 기록 했다.>
사마천이 산서성에 올라가 현지 노인들로 부터 들은 예기로 흉노전 첫줄을 썼다.
보름 전에(Sep 22, 2018 10:17am)에 올린 “한해 따라 二萬里-5: 한해 연안에 살던 사람들의 의사소통”에서 산서성 사람들이 쓰던 말이 한글 어순이라고 밝혔다.
그 곳에 올라 갔던 사마천이 노인들로 부터 들었다는 문구를 진세가(史記 晉世家) 에 남겼다[11]. 且吾聞箕子見唐叔之初封,曰『其後必當大矣』,晉庸可滅乎!」
기자(箕子)가 남긴 말을 춘추 희공편(春秋左傳 僖公)에서도 인용 했다[12]. 그러나 글자가 다르다. 且吾聞唐叔之封也,箕子曰,其後必大,晉其庸可冀乎
춘추 좌전이 사기보다 오랫적 기록이지만, 좌전의 기록은 수정된 문구다. 이경우에는 사마천이 <현지 노인들로 부터 들은 예기를 기록한 사료 “其後必當大矣” 즉 그후 마땅히 당(當, 唐, 北唐)은 크리라>가 진실이다.
비슷한 가필이 사기 흉노전에 한이 다스리던 해안(翰海)에서 돌아 왔다는 문구에도 나타났다[13]. “驃騎封於狼居胥山,禪姑衍,臨翰海而還”을 위청(衛靑, ? ~ 기원전 106년) 열전에는 “封狼居胥山,禪於姑衍,登臨翰海”라 했다. 올라가서 한해에 임(登臨翰海) 했다는 문구는 영역을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가필된 문구다. 본문 “禪姑衍,臨翰海而還”은 “禪姑 衍臨翰海 而還”로 풀이 해야 뜻이 뚜렸하다.
封禪의 봉(封)자는 산에 올라가서, 선(禪)은 평지에서 지네는 제사를 뜻한다[14]. 산해관 서쪽에 있는 늑대 같은 흉노(匈奴)가 살던(狼居), <서로 서, 깨날 소 (胥xū xǔ 山)에 올라 가서 천신께 제사를 바치고, 열수 하구에 있던 고사국(姑射國)에서 지신께 제사를 올리고 패수(浿水)가 바다로 들어가는 언(衍)에 이르러 돌아 왔다. 한무제가 우거왕 영역을 친입 하기 전이라, 국경이 패수(浿水)였다는 증거가 뚜렸하다.
고전에는 여러 곳에 한글 어순이 남아 있다. 후세 사람들은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살던 지역에 관한 글자들을 많은 경우에 어조사 또는 접속사로 잘못 풀이 했다.
끝
October 6, 2018
[1].孝武本紀:天子既聞公孫卿及方士之言,黃帝以上封禪,皆致怪物與神通,欲放黃帝以嘗接神僊人蓬萊士,高世比德於九皇,東巡海上,考神僊之屬,未有驗者。方士有言「黃帝時為五城十二樓,以候神人於執期,命曰迎年」。上許作之如方
[2].自黃帝至舜、禹,皆同姓而異其國號,以章明德。故黃帝為有熊,帝顓頊為高陽,帝嚳為高辛,帝堯為陶唐,帝舜為有虞。帝禹為夏后而別氏,姓姒氏。契為商,姓子氏。棄為周,姓姬氏
[3].史記 夏本紀:禹於是遂即天子位,南面朝天下,國號曰夏后,姓姒氏. 十年,帝禹東巡狩,至于會稽而崩。
以天下授益。三年之喪畢,益讓帝禹之子啟,而辟居箕山之陽。禹子啟賢,天下屬意焉。及禹崩,雖授益,益之佐禹日淺,天下未洽。故諸侯皆去益而朝啟,曰:「吾君帝禹之子也」。於是啟遂即天子之位,是為夏后帝啟.
[4].萬章問曰:「人有言:『至於禹而德衰,不傳於賢而傳於子。』有諸?」禹薦益於天,七年,禹崩。三年之喪畢,益避禹之子於箕山之陰。朝覲訟獄者不之益而之啟,曰:『吾君之子也。』謳歌者不謳歌益而謳歌啟,曰:『吾君之子也。』丹朱之不肖,舜之子亦不肖
[5].海內南經:夏后啟之臣曰孟涂,是司神于巴,人請訟于孟涂之所,其衣有血者乃執之,是請生。居山上,在丹山西。丹山在丹陽南,丹陽居屬也
[6].晉書: 蓋魏國之史書,大略與《春秋》皆多相應。其中經傳大異,則云夏年多殷;益乾啟位,啟殺之
[7].逸周書 嘗麥解: 天用大成,至于今不亂,其在啟之五子,忘伯禹之命,假國無正,用胥興作亂,遂凶厥國,皇天哀禹,
賜以彭壽,思正夏略,今予小子,聞有古遺訓. <《書·甘誓》大戰于甘。《傳》甘,有扈郊地名>
[8].韩非子 外儲說右下: 潘壽見燕王曰:「臣恐子之之如益也。」王曰:「何益哉?」對曰:「古者禹死,將傳天下於益,
啟之人因相與攻益而立啟。今王信愛子之,將傳國子之,太子之人盡懷印為,子之之人無一人在朝廷者,王不幸棄群臣,則子之亦益也。」王因收吏璽自三百石以上皆效之子之,子之大重.
[9].戰國策 燕一 燕王噲既立:或曰:「禹授益而以啟為吏,及老,而以啟為不足任天下,傳之益也。啟與支黨委公益而奪之天下,是禹名傳天下於益,其實令啟自取之。今王言屬國子之,而吏無非太子人者,是名屬子之,而太子用事。」王因收印自三百石吏而效之子之。子之南面行王事,而噲老不聽政,顧為臣,國事皆決子之.
[10]. 論衡 雷虛 :盛夏之時,雷電迅疾,擊折樹木,壞敗室屋,時犯殺人。世俗以為「擊折樹木、壞敗室屋」者,天取龍;
其「犯殺人」也,謂之陰過
[11]. 史記 世家 晉世家:公曰:「得晉侯將以為樂,今乃如此。且吾聞箕子見唐叔之初封,曰『其後必當大矣』,
晉庸可滅乎!」乃與晉侯盟王城而許之歸。
[12].春秋左傳 僖公 \ 僖公十五年:秦伯又餼之粟,曰,吾怨其君而矜其民,且吾聞唐叔之封也,箕子曰,其後必大,晉其庸可冀乎,姑樹德焉,以待能者,於是秦始征晉河東,置官司焉
[13].春秋左傳 僖公 \ 僖公十五年:秦伯又餼之粟,曰,吾怨其君而矜其民,且吾聞唐叔之封也,箕子曰,其後必大,晉其庸可冀乎,姑樹德焉,以待能者,於是秦始征晉河東,置官司焉
[14]. 史記 正義 : 正義此泰山上築土為壇以祭天,報天之功,故曰封.此泰山下小山上除地,報地之功,故曰禪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