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한인으로서 도산 사상의 실천적 방안
구한 말 민족의 선구자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년 ~ 1938년)는 안중근 (安重根, 1879년~1910년)의사와 동본 동년배셨다. 도산 사상의 실천은 현대 교육 탈 봉건 제도. 자주 독립으로 요약 된다. 국 내외 여러 사람들이 노력 하여 자주 독립은 하였지만 많은 영토를 잃어 버리고 나라는 두동강이 났다.
시대는 변한다. 배가 태풍을 만나 항해를 하듯, 주위 환경에 따라 때때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목적지는 변할수 없다. 우리는 동양 최초의 국가 조선 (朝鮮)이란 이름을 유지 하고, 개천절 (開天節) 행사를 치루고 있다.
항해사의 목적지가 분명 하듯 우리는 민족의 넋(魂)을 지켜 나가야 한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단군 왕검을 살해한 중원 세력은 우리 역사를 뿌리체 파 해쳐 놓고 동북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인접국가 세력에 몰려 은패 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일이 첫쩨요, 이를 모르는 한국 사람들에게 알려 줌이 두 쩨요, 온 세상에 알려주이 셋쩨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도산의 말씀)
도산이 살아 계신다면 유유히 흘러온 조선 (朝鮮)의 뿌리를 찾아 오늘에 이른 과정을 온 새상에 알리자고 외치실 겁니다.
우리 문화의 근간은 유불선 (儒佛仙)이다. 고려 시대 이후 불가의 가르침은
등외시 되었다. 모화사상에 잠든 한국 사학계는 반일을 부르짖는 재야 사학계의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한 소용돌이 속에 중원 세력은 꾸준히 동북 공정을 실행하고 있다. 대학에는 시진평(習近平)관 까지 설치한 현실이다.
성경에 유태인의 역사가 실려 있듯, 유가(儒家)기록 이외에 경외서(經外書) 또는 위서(僞書)라고 부르던 각종 기록과 불교경전에도 동북아 상고사가 숨어 있다.
원시 불교의 탄생과 전래에 동북아 역사가 있다. 전국시대에 금미달(今彌達)에서 미륵(彌勒)이란 글자가 나타났다. 미륵(彌勒)이 가람(伽藍)에서 다루던 영역을 미지(彌地)라 했다. 미륵을 [안왕(雁王) 또는 아왕 (鵝王) 즉; 내가 삼족오 (三足烏 를 숭상 하는 지역 사람들의 왕]이라 했다. 불당을 안당(佛堂曰鴈堂)이라 하고 기러기가 나라 가려고 (鴚)날개를 활짝 편다 하여 서안아(舒鴈 鵝)라 했다. 모두 은유법을 인용한 상징적인 표현이다.
가람(伽藍)에서 밀려 금미달을 떠난 사람들이 발해만으로 나와 동남아 해안을 따라 수천리에 흐터져 신미제국 (新彌諸國) 20여국이 나타났다. 그들이 가야국 가실왕 (加耶國嘉悉王) 의 후손이다. 해운업을 하는 큰 상인 (大商主僧伽)으로 인도 동남 해안에 있는 섬나라 승가라국(僧伽羅國), 즉 세일론에 이르러 원시불교 와 금미달 지역 토속신앙이 융합한 미륵신앙(彌勒信仰)이 나타났다.
대당서역기에 실린 사자국 (獅子國) 이 “승가라국 僧伽羅國” , 스리랑카의 옛적 이름이다. 남 천축국이라던 인도 남단 “Ceylon, Sri Lanka”에 있었다. 사자국은 한글 어음 사자 (嗣子), 스승의 아들이란 뜻 글자 사자(師子)를 음차(音借)한 이름이 “Sinhalese”다. 가라(加羅)가 진라(真臘. 占臘[Zhēnlà, Chenla)라고 부르던 크매르의 남쪽에 있었다. 그들이 사용하던 항구 승가포(僧伽浦)가 “Singapore” 라 본다. 해상 (海商)으로 일하던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의 후손들이 동남아 해안을 따라 불교를 중원에 전래 시켰다.
학계에서는 아직도 조상의 이름자를 밝달나무 단자 단군 (檀君)이라 쓰고 있다. 아니다. 제(祭)터 단 (壇)자 단군(壇君)이 옳은 글자다.
사기에 실린 미지 수천리(彌地數千里)란 문구와 삼국사기 첫장에 실린 궁예 시조 (弓裔始祖) 성박씨 (姓朴氏) 란 글자를 풀이하지 못하고 있다. 금미달 지역에서 발해만으로 내려온 역사적 사실을 몰라 왜왕 비미호(卑彌呼)가 신라 아달아 이사금 (阿達羅尼師今)에게 사신을 보냈던 사실을 오늘의 경상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고조선의 발생지를 몰라 기자묘 (箕子墓)를 평양에 세웠었고 단군 (檀君) 능을 세웠다.
한반도에서는 지정학적 연유로 동북아 역사속에 있는 한국 상고사를 옳바로 연구 할수 없다. 도산이 살아 계서서 한국 사학계의 현황을 보신다면 민족의 근원인 단군조선을 찾아 보라고 재미 지식인들에게 부탁하시리라.
여러사람 의견을 등어야 합니다. 언행(言行)은 사람의 품격이요, 역사는 민족의 혼(魂)이라 합니다. 시대는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혼(魂)은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선구자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같은 분들이 미주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싸웠 듯이, 동북 아시아 상고사 바로 세우기 운동에 중역을 맡아야 할 시대에 살고 있다.
아직도 중국몽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 시키자.
인접국가 세력에 몰려 은패 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밝혀 세상에 알리면 한자 사용법을 모르는 절대 다수의 외국인 학자들이 따르게 됩니다. 서양 학자들 에게는 중원 사람들이 글자 작란으로 이웃 국가를 우롱 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한다. 배웟다는 사람들이 중국사람들의 글자 작란에 물들어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을 일깨워 줌이 도산이 주장한 오늘의 개몽이다.
조선(朝鮮)이란 글자의 유래를 보면, 예맥(濊貊, 意在斯)족이 사는 땅에 뜻이 있어 홍산 문화권에서 내려와 글자를 만들어 동북아시아 상고사에 종주국으로 등장 했었다는 근거가 중국 문헌 여러곳에 있다. 무쇠 라고 부르던 철(鐵銕鉄)이란 글자에, 예맥 부여(濊貊,夫餘)란 글자속에 우리 선조들이 중원을 석권 했었다는 뜻이 있다. 오늘도 무쇠란 낱말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강하고 굳센 사람이나 물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다.
당나라 불교 스님들이 만든 법원주림 (法苑珠林) 에는 문수보살 (文殊菩薩) 양거 (儴佉; 晉陽을 떠난 사람)가, 범서(梵書) 다음 창힐 (倉頡) 이전에, 글자를 만들었다 는 문구가 있다. 신라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중국 산서성 오대산에 가서 문주스님 으로 부터 불법을 배울 때(文殊授法) 동이(東夷)가 문자를 만들었다는 예기를 들었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좋은 철기를 만들어 중원을 석권한 발조선 시대(發朝鮮 時代)가 있었다. 이 시기를 중원 사람들은 춘추 전국시대라 한다.
당나라에 유학 했던 최치원(崔致遠, 857년 ~ 908년? )은 [한때 고구려와 백제가 중원을 석권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 하가전 남북조 시대에 삼한의 후손들이 중원을 석권 했다. 임유관 전쟁이 나타났다. 그당시에 지나(支那)라고 부르던 남쪽나라에 살던 사람들이 대만섬을 거처 한반도와 구주에 이르렀다. 신라가 전함을 타고 울릉도를 정벌 했다. 아직도 탐모라국 (𨈭牟羅國) 이라 부르던 대만섬 (Formosa Island) 에는 아리랑의 어원이 되는 아리산(阿里山)과 가라산 (加羅山) 가라호(加羅湖)가 있다. 그후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가 처음으로 한해를 건너 일본열도와 유구를 다녀 갔다.
민족의 혼을 지키려고 일연(一然,1206년 ~ 1289년) 스님은 삼국유사를, 이승휴 (李承休, 1224년 ~ 1300년 )는 제왕운기 (帝王韻紀)를, 이암 (李嵒, 1297년 ~ 1364년) 선생은 환단고기 “단군세기”를 남겼다. 권근(權近; 1352년~1409년)의 응제시 (應製詩) 에도 단군신화가 실려있다. 이는 모두 송나라 사신과 같이 왔던 서긍을 접대 했던 김부식(金富軾, 1075년 ~ 1151년) 이후 사람들이다. 단군에 관한 예기는 스님이 인용한 위서 내용(魏書云)을 근거로 작성 했다고 본다.
원나라 역사서에는 지나(支那) 라고 부르던 중국 남쪽에 신라 가라 백제가 있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실려 있다. 운남성에는 신라 가라의 자치주도 있었다.
십육국 시대 남조 역사서에는 광개토대왕 비문에 실린 신라 임나 가라(新羅, 任那 加羅)와 같은 글자가 실렸고, 같은 글자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 세 지역에 나타난 이름자의 상관 관계를 아무도 합당하게 설명 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 사학계에서도 중원의 그늘 밑에 옳바른 풀이를 못하고 영토 마저 점차로 빼앗긴 수치를 당해 왔다. 모두들 이를 “지정학적”이란 술어로 그 사정을 설명 한다. 해가 지구를 돌아 새날이 온다고 오랫동안 잘못 인식 했듯이, 중국몽 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아직도 좁은 시각에서 풀이 하여 이러한 오류가 나타났다.
지정학의 핵심 요인:
지정학(地政學: geopolitics)이란 지리적인 위치 관계가 정치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이란 뜻이다. 핵심 요인은 교류와 의사 소통이다.
옛적에는 큰 산맥과 강을 국경으로 했다. 교류에 불편을 느껴서다. 그러나 생활 필수품을 찾아서는 그러한 자연 장애를 극복 하고 교류를 했다는 사실이 스리랑카 역사에 승가라국 (僧伽羅國) 이란 이름이다. 홍산 문화권 에서 분수계곡을 따라 소금을 찾아 산서성 해지(解池)에 이르렀고, 차마고도를 따라 히말리아 동단에 이르렀다. 뱃길로는 해안을 따라 동남아 여러 곳에 이르렀다.
자연과학의 발달로 문물 교류의 양상이 바뀌었다. 자연적 장애물을 지나 자유로운 의사 소통이 실천 되고, 해양을 건너 좋은 값에 많은 물량을 구입 하여 수만리에서 운송해 오고 있다.
지중해를 페니키아(Phoenician)인이 개척 석권하듯, 동아시아 해안을 오랫동안 부여씨가 통치 했다. 금미달 쌍간하 연안에서 나타난 북부여(北扶餘,夫餘, 기원전 4세기~494년)에서 삼한(三韓)이 나타났다. 부여씨가 바다를 건너 여러 나라를 세워 이를 백제라 했다.
광운에는 중원에 자리잡은 부여씨의 유래를 왕성하게 중원에 퍼져 살았다는 뜻이있는 글자로 예맥 족으로 설명 했다. 지나 (支那)라고 하는 남쪽에는 오랫 동안 신라 백제 가야 왜가 있었다. 광운여(廣韻 余)자 설명에는 금백제왕 부여씨 (今百濟王夫餘氏)란 문구가 있다. 통일 신라 이후 북송 (北宋) 시절에도 백제가 중원에 있었다는 뜻이다.
부여씨가 넓은 바다 해상권을 장악 했다 하여 한해(瀚海, 翰海)라 했다. 태평광기(太平廣記)에는 “金可記,新羅人也”라 출처를 “續仙傳”이라 했다. 흥부-놀부의 원전이라 한다. 이렇게 중원에는 오랫동안 삼한의 후손이 살았다.
부여씨가 대륙백제를 건국했다. 수서(隋書)에 실린 백가제해 (百家濟海)를 간략한 글자다. 백제 전성기에는 큰바다 동서 연안에 수도를 두고 22개 담노 (擔魯)가 있었다. 중국 동쪽 바다를 한해라고 했다. 삼한 (三韓)이 다스리던 바다를 음이 같은 글자로 바꾸어 날개를 펴다는 뜻의 글자 한해(翰海)라고 기록 했다.
신라 백제 왜 일본(倭, 日本)과의 관계:
진수가 금미달 (今彌達) 지역 호타하 연안에 살던 세 지도자 삼감 (三監)이란 뜻을 삼한(三韓) 이란 명칭을 만들고 높은 지도자(큰 가한 Kahan )란 뜻을 비하 음차 하여 적을 소다 왜(倭; wēi wō wǒ; 魏, 微: 汗[hán])자로 기록 했다. 글자를 바꾸었다. 근거가 삼국지 왜인전과 단석괴전에 있다. 한국(汗國)을 공격하고 한인(汗人) 수천명을 잡아갔다. 동이전에는 원시 불교가 중앙 아시아를 돌아온 전래 경로에 왜(倭)자가 실렸다. 태평어람에는 왜(倭)인전에 실었다.
이 왜(倭)자가 신라 백제 임나 가라와 같이 광개토 대왕 비문에 실렸고, 중원의 동쪽 해안을 따라 흐처져 나가 왜왕이 다스렸다는 기록이 여러 남조 역사서에 실렸다. 이들이 모두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 하던 시절에 한해(瀚海)를 건너 동쪽으로 와 수나라에 듣기 불쾌한 문구를 보냈다.
부여씨가 대륙에서 밀려나 수나라에 보낸 서한에 “해뜨는 나라 천자가 해지는 나라 족하에게” 하는 문구에서 나타났다. 화가난 수양제 가 609년에 사신으로 처음으로 한해의 남단 항로를 따라 백제를 대만섬(𨈭牟羅國)을 지나 죽도를 돌아 낙동강 하구 김해를 거처 구주를 다녀 왔다.
문무왕 10년 봄에 왜(倭) 가 이름을 일본으로 부꾸었다(倭國更號日本) 는 통고를 하고 701년에 당나라에 알렸다. 수로왕이 통치했던 김해를 도사마 (都斯麻),즉 백제 무녕왕(武寧王;462년~523년)의 수도라고 했다.
중원 사람들이 한해(瀚海)의 동쪽을 탐방한 첫 기록이 수서에 있다. 그에 백제와 신라 여러 나라가 왜를 강국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당시 수나라가 동번기(隋東蕃風俗記云; 대만섬 방문기)를 만들어 양나라 때 부터 그 섬에 있던 신라 왕실의 유래를 남겼다. 통전에 실린 이 기록이 사라졌다고 한다. 통전과 같은 시대 편술된 신구 당서와 수서는 살아 있다.
왜(倭)의 종주국이 었던 부여씨의 백제가 멸망 660년에 멸망 했다. 왜가 주동이 돼여 한반도 이외 백제 담로(擔魯) 였던 여러 나라를 동원하여 (너무 늦게) 구원병으로 왔다가 백강 전투 (白江戰鬪; 663년 8월)에서 패망하고 돌아가 오늘의 관동 지역에 도읍을 정하고 일본(日本)이란 칭호를 사용 했다. 그후로도 구주에 있던 왜는 계속 신라를 치려 하여 문무왕이 죽어서라도 왜를 막겠다는 결심에 유언을 남겨 바닷속 왕릉(海中王陵) 이라 한다.
신라 본기에는 [문무왕 이후에도 왜는 신라에 적대 관계였고 일본은 우호적이 었다]는 증거가 여러 곳에 보인다. 그러한 여파가 임진란 때에도 나타났다. 구주 사람들(倭)이 조동이 되여 정명가도 (征明假道)란 기치 아래 한반도를 침략 했다. 임진란 이전에는 대만섬을 침략 했다. 일본땅 (관동)에 자리잡은 도꾸가와 막부는 임진란에 관여 하지 않아 이조(李朝) 왕실 사절단을 극진히 맞아 드렸다.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일행의 방문을 그린 그림이 국보로 전해 온다.
부여씨가 장악 했던 동양의 해양권을 해신으로 추모하는 신라의 해상 장보고(張保皐 .弓福 ?~846년) 가 이어 받아 월남 부터 중국 동해안 여러 지역에서 그를 추모하고 있다. 옛부터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사는 만주(滿洲) 심양 (瀋陽)에서는 장보고 기념관( 張保皐 記念館) 을 설립 했다고 영문 위키에 실렀다. Jang Bogo – Wikipedia.
모르는 사이에 매수 당하다.
특히 가까운 지역은 강 하구에 염수가 밑으로 올라 오듯, 모르는 사이에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뜻에서 시작한 결과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이적 행위로 비판 반을 수도 있다. 도산은 이러한 점에 조하라 했다.
한글 표기법을 개정한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 필자는 이를 [문법은 헌법 보다 중요 하다. 남북한으로 갈라져 있고, 만주등 해외에 사는 교포들의 의견도 참조 하는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고 극히 반대 했다. 후에 이를 주관했던 김XX 교수의 친필 편지를 받았다. 그 원인은 한글학회 두 학파간의 감정에서 시작 되었다. 물리대 국어학과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어 문턱이 높았다. 사범대학 국어학과 교사들이 전국에 흐터져 있고 정부 관계에서도 일하던 상태라, 문리대 한글학과는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잃었고 숫적으로 턱부족이었다.
현지인이 뜻을 살려 기록한 동북아 국가 명사를 현지음에 따른다는 외래어 표기법은 역사 외곡을 했던 사학가와 같은 매국 행위를 저질렀다.
삼한(三韓) 땅 한반도에 있는 큰 강은 마땅히 클 한자 한강(韓江)으로 적어야 한다. 현지인의 뜻을 살린 옛적 번체 이름자로 선조들이 쓰던 북경(北京) 상해(上海) 광동(廣東) 하는 글자로 사용해야 한다.
끝 마침 말
도산은 개몽이란 뜻을 그 당시 상황에 맞게 인문 사회 과학 분야에 적용 했다. 시대는 변했다. 도산이 인용한 개몽이란 어휘를 깊히 살펴 볼때다. 자유국가 남한에 사는 사람들은 앞서 인용한 학교 선생직을 너머 새로운 현상을 찾아 연구를 하고 있다. 각계 각층에서 활약 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한류라는 새로운 용어가 나타났다. 그러나 지식인의 모화사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 시진평관을 대학 교정에 설치한 현실이다. 우리 선조가 살아온 역사를 잘못 인식한 배운자의 행태다.
우리민족이 상형글자를 처음 만들었다. 고려가요 가시리를 진음(秦音)이라 했다.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 하고 여러 글자를 하나로 통일 하여 예서(隸書) 문자가 나타났다. 산서성(隸省)에 살던 예(濊·穢·薉) 맥(貊·貉) 사람들이 쓰던 글자가 오늘의 번체다. 번체자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동북아 상고사의 종주국으로 중원을 석권하며 살아 발조선 시대(發朝鮮 時代)가 있었다. 중원사람들이 붙인 춘추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라 부르고 우리의 역사의 뿌리를 저들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잘못 인식해서 나타난 결과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간 사람들이 과학기술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인문과학 분야에서도 동북아 상고사를 깊히 연구 하는 풍토가 자리잡아야 한다.
재미 지식인들이 주동이 되여 새로운 연구 방법으로 역사적 사실을 찾아 가는 기틀을 만들 도록 일깨워 주어야 한다. 이 길이 미국에 사는 지식인들이 해야할 도산 사상의 실천이다.
모솔, 이 돈성
McLean, Va USA
Old version.
재미 한인으로서 도산 사상의 실천적 방안
들어 가는 말:
구한 말 민족의 선구자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년 ~ 1938년)는 안중근(安重根, 1879년~1910년)의사와 동본 동년배다.
도산 사상의 핵심은 개혁 개몽이다. 현대 교육 탈 봉건 제도 자주 독립으로 요약 된다. 국 내외 여러 사람들이 노력 하여 자주 독립은 하였지만 많은 영토를 잃어 버리고 나라는 두동강이 났다. 시대는 변한다. 배가 항해를 하듯 주위 환경에 따라 방향은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목적지는 변할수 없다. 우리는 동양 최초의 국가 조선(朝鮮)이란 이름을 유지 하고, 개천절 (開天節) 행사를 치루고 있다. 항해사의 목적지가 분명 하듯 우리는 민족의 넋(魂)을 지켜 나가야 한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단군(壇君) 왕검을 살해한 중원 세력은 우리 역사를 뿌리체 파 해쳐 놓고 동북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인접국가 세력에 몰려 은패 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일이 첫쩨요 이를 온 세상에 알려 줌이 두 째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도산의 말씀)
도산이 살아 계신다면 이러한 과정을 밟아 유유히 흘러온 조선 (朝鮮)의 뿌리를 찾아 오늘에 이른 과정을 온 새상에 알리자고 외치실 겁니다.
우리 문화의 근간은 유불선 (儒佛仙)이다. 고려 시대 이후 불가의 가르침은 등외시 되었다. 모화사상에 잠든 한국 사학계는 반일을 부르짖는 재야 사학계의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한 소용돌이 속에 중원 세력은 꾸준히 동북 공정을 실행하고 있다. 대학에는 시진평(習近平)관 까지 설치한 현실이다.
원시 불교의 탄생과 전래에 동북아 역사가 있다. 전국시대에 금미달(今彌達)에서 유래된 미륵(彌勒)이란 글자다. 미륵(彌勒)이 다루던 영역을 미지(彌地)라 했다. 안문관을 지키던 왕이란 뜻에 두루미(彌)를 기러기(鴈 雁)로 바꾸어 궁홀산 (弓忽山)에 안문관(雁門關)을 지었다. 오늘의 산서성 (山西省) 대현 (代縣) 안문산雁門山) 중 요새에 살던 지도자를 중원 사람들은 고죽군 (孤竹君)이라 했고, 불가에서는 [안왕(雁王) 또는 아왕 (鵝王) 즉; 내가 삼족오 (三足烏)를 숭상 하는 지역 사람들의 왕]이라 했다. 안문관 일대에 원시 불교가 들어 와 불당을 안당(佛堂曰鴈堂)이라고도 했다. 불가에서는 두루미 미(彌)자를 기러기 안자로 바꾸어 미륵(彌勒) 안왕(鴈王) 또는 애왕(䳘, 鵝王) 이라고도 했다. [1] 맹자는 거위(䳘)를 잡아 만든 요리를 매 (hawk)고기(鶃鶃之肉)라고 속였던 기록을 왕충 (王充)이 논형(論衡 刺孟)에서 비난 했다.
금미달을 떠난 사람들이 발해만으로 나와 동남아 해안을 따라 수천리에 흐터져 신미제국(新彌諸國) 20여국이 나타났다. 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의 후손이 해운업을 하는 큰상인 (大商主僧伽)으로 인도 동남 해안에 있는 섬나라 승가라국(僧伽羅國), 즉 세일론(Ceylon)에 이르러 원시 불교를 전래 하여 미륵신앙(彌勒信仰)이 나타났다. [2] 승가라(僧伽羅)를 현지음으로 적은 이름이 “Sinhala, 해상무역을 하던 불교신자 가라 사람들이 찾던 항구를 Singapore”라 했다.
사기에 실린 미지 수천리(彌地數千里)란 문구와 삼국사기 첫장 궁예시조 (弓裔始祖) 성박씨 (姓朴氏) 란 글자를 풀이하지 못하고, 역사적 사실을 몰라 왜왕 비미호(卑彌呼)가 신라 아달아 이사금 (阿達羅尼師今) 에게 사신을 보냈던 사실을 오늘의 경상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교류가 있었다고 오인 하듯, 고조선의 발생지를 몰라 기자묘(箕子墓)를 평양에 세웠었고, 지금은 단군(檀君)능을 세웠다.
성경에 유태인의 역사가 실려 있듯, 유가(儒家)기록 이외에 경외(經外書) 또는 위서(僞書)라고 부르던 각종 기록과 불교경전에도 동북아 상고사가 숨어 있다.
한반도에서는 지정학적 연유로 동북아 역사속에 있는 한국 상고사를 옳바로 연구 할수 없다. 도산이 살아 계서서 한국 사학계의 현황을 보신다면 청나라 강희황제가 만주족의 유래를 찾아보라 지시 했듯이 우리 민족의 근원인 단군조선(壇君朝鮮)을 찾아 보라고 재미 지식인들에게 부탁하시리라 본다.
여러사람 의견 듣기
언행(言行)은 사람의 품격이요, 역사는 민족의 혼(魂)이라 합니다.
시대는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혼(魂)은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선구자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같은 분들이 미주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싸웠듯이, 재미 교민들이 [동북 아시아 상고사 바로 세우기 운동]에 중역을 맡아야 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개몽이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도산 선생님이 살던 시대에 가르쳐야 할 소제가 지금은 바뀌었습니다. 그분은 의문점을 찾아 해결하는 연구를 하라고 당부 하실겁니다. 필자는 처음으로 출판한 영문본에서 [College of William and Mary to Johns Hopkins University]를 비교하여 설명 했습니다. 단순히 다른 나라 사람들이 찾은 지식을 신대륙에 정착한 청교도들의 후손들에게 가르치던 시기를 지나서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던 새로운 현상]을 신대륙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합당하게 설명하는 기틀을 잡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새로운 연구 중심의 대학이 나타났다고 설명 했습니다.
아직도 중국몽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 시키자.
인접국가 세력에 몰려 은패 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밝혀 세상에 알리면 한자 사용법을 모르는 절대 다수의 외국인 학자들이 따르게 됩니다. 서양 학자들에게는 중원 사람들이 글자 작란으로 이웃 국가를 우롱 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도산 사상의 핵심은 개혁 개몽이다. 개몽이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맑은 정신으로 어떤 문제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각자의 의견을 내세워 그것의 정당함을 논의 함이 개몽이다. 그 후에 교육 실천개혁이 나타나야 한다. 한국에는 배웟다는 사람들이 중국사람들의 글자 작란에 물들어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을 일깨워 줌이 도산이 주장한 오늘의 개몽이다.
조선(朝鮮)이란 글자의 유래를 보면, 예맥(濊貊, 意在斯)족이 사는 땅에 뜻이 있어 홍산 문화권에서 내려와 글자를 만들어 동북아시아 상고사에 종주국으로 등장 했었다는 근거가 중국 문헌 여러곳에 있다. 무쇠 라고 부르던 철(鐵銕鉄)이란 글자에, 예맥 부여(濊貊,夫餘)란 글자속에 중원을 석권 했었다는 뜻이 있다. [3]
오늘도 무쇠란 낱말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강하고 굳센 사람이나 물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다. 당나라 불교 스님들이 만든 법원주림 (法苑珠林) 에는 문수보살 (文殊菩薩) 양거 (儴佉; 晉陽을 떠난 사람)가, 범서(梵書) 다음 창힐 (倉頡) 이전에, 글자를 만들었다는 문구가 있다.[4]
신라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중국 산서성 오대산에 가서 문주스님으로 부터 불법을 배울 때(文殊授法)신라 골품제의 유래를 동이족 공공(東夷共工)의 후세와는 다르다고 했다. 동이(東夷)가 문자를 만들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좋은 철기를 만들어 중원을 석권한 발조선 시대(發朝鮮 時代)가 있었다. 이 시기를 중원 사람들은 춘추 전국시대라 한다. [5]
중국의 사가들이 우리의 상고사를 왜곡 했다는 단서는 여러 곳에 있다. 그 사람들 스스로 유림열전에 백여만언(百餘萬言)을 바꾸었다고 실토 했다. [6] 당나라에 유학 했던 최치원(崔致遠, 857년 ~ 908년? )은 [한때 고구려와 백제가 중원을 석권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민족의 혼을 지키려고 일연(一然,1206년 ~ 1289년) 스님은 삼국유사를, 이승휴(李承休, 1224년 ~ 1300년 )는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이암 (李嵒, 1297년 ~ 1364년) 선생은 환단고기 “단군세기”를 남겼다. 권근(權近; 1352년~1409년)의 응제시 (應製詩)에도 단군신화가 실려있다.
이는 모두 송나라 사신과 같이 왔던 서긍을 접대 했던 김부식(金富軾, 1075년 ~ 1151년) 이후 사람들이다. 이 분들이 인용한 단군에 관한 예기는 스님이 인용한 위서 내용(魏書云)을 근거로 작성 했다고 본다.
위서 내용(魏書云)은 맹자가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양혜왕 (孟子見梁惠王) 무덤이 도굴되여 우(帝禹)의 아들 개(帝啟)가 단군왕검 백익을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 졌다. [7] 양혜왕이 여러 사서에 다른 이름으로 적혔고, 생몰 연대 또한 혼잡 하게 설명 했다. [8] 논형에는 양혜왕(梁惠王)이 자신을 멀리서 온 늙은이 수(叟)라 했다. 이글자에서 독사(serpent)라고도 풀이하는 수유(須臾) 사룡(蛇龍)이란 글자가 나타났다.
맹자는 금미달 지역 에서 내려온 양혜왕(梁惠王)의 선조에 관한 역사를 은말하게 설명했다.
급총의 무덤 주인 또한 여러 글자로 기록 했다. 그러나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그의 고향에 백충장군 현령비(百蟲將軍顯靈碑)를 세웠다. 비문에는 백익(伯益)이 전욱 고양씨의 두쩨 아들이고, 성은 이씨(伊氏) 휘가 익(諱益), 자는 퇴개 (字隤敳)라 했다. 실권을 잃은 사람이란 있는 글자다. [9] 그가 납평(臘平)절을 시작 했다. [10] 이씨(伊氏)의 본향은 한혁에 실린 양산(梁山) 서쪽 낙수(洛水) 가까운 곳에 있었다. 저 늙은이란 뜻에 이기씨(伊耆氏)라 했다. 이씨가 사는 마을을 지나는 여울이라 이수(伊水), 그가 실권 했다 하여 낙수(洛水)라 했다.
한후에 실린 “奕奕梁山、維禹甸之、有倬其道” 란 문구는 한후의 선조를 우왕이라 했다. 그곳에 중원 세력의 노예로 일하던 단군 왕검 백익(伯益)의 추종자 예맥 사람(濊貊: 斯, 隷. 隷書; 斯,離也) 들이 사천성을 지나 운남성을 거처 히말리아 산맥 동쪽에 이르러 원시 불교가 나타났다. 그 곳을 신자촌(Sinja Village)이라 하여 UNESCO에 등록 되었다. [11] 옛적에 사천성을 백익의 이름자를 따서 익주(益州)라 했다.
단군조선 마지막 단군이 아사달에 돌아가 산신이 되었다는 금미달 “弓忽山 今彌達”에 관한 기록은 전국시대에 발생 했던 사건이다. 그 당시 그 지역은 주인이 자주 바뀌었고, 가치관이 다른 여러 사람들의 기록이라 더더욱 혼잡 하다. 필자는 역사란 모든 인문 사회과학의 모체라고 정의하고 개발한 세로운 방법을 인용하여, 중원 사가들이 춘추필법으로 은밀 하게 숨겨 놓은 기록을 불가기록과 고려가요 가시리, 민요 아리랑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 궁홀산 (弓忽山)이 오늘의 안문관 일대라고 논증 했다. [12]
당현장(玄奘) 법사가 17년(629년~645년)간의 서역 견문을 실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는 “汝子我之族也。斯人者我之族也 ” 란 문구가 있다. 지존,즉 석가모니가 예맥(斯: 濊貊; 夫餘國名)족의 후손 이란 뜻이다. 미륵(彌勒)이 무슨 뜻이란 설명도 있다. 많은 고대언어가 원시불교 발생지에 남아 있다. 금미달을 떠난 사람들이 동남아 해안으로 흐터저 신미제국 (新彌諸國)여러 나라가 나타났다. 남조 역사서에는 이를 왜왕이 다스리는 나라들이라 했다. 그들이 상인 (大商主云僧伽)으로 해상로를 따라 불교 국가 승가라(名僧伽羅)국이라 부르던 스리랑카(Sri Lanka, Ceylon)에 이르러 원시불교 와 금미달 지역 토속신앙이 융합한 미륵신앙(彌勒信仰)이 나타났다. 승가라란 미륵으로 기록된 마지막 단군, 즉 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의 후손이란 뜻이다. 삼한 사람들이 남방 불교를 한반도와 일본에 전했다. [13] 당서역기에는 이러한 사실을 [명나라 정화 (鄭和, 1371년 ~ 1434년)제독이 점령 했다]고 기록 했다. [14] 통전에 [관구검의 공격으로 고구려 동천왕이 요동반도로 피란을 갔다가 떠나고 남아 있던 사람들이 신라]가 되었다는 기록 또한 통일 신라 초기 기록을 그렇게 접붙였다.
글자 작란이라고 밖에 볼수 없는 훈고학이 끝났다는 당나라 이후, 송 나라때 기록 또한 다를바 없다. 서긍 (徐兢, 1091년 ~ 1153년 )이 돌아가 1123년에 고려 방문기, 고려도경 (宣和奉使高麗圖經)을 황제에게 바쳤다. 마땅히 있어야할 지도는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시조 왕건이 남만주 현도군(玄菟州都督)에서 건국했다는 사실이 은밀 하게 실려 있다. [15] 같은 내용이 송사 (宋史)에도 실렸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는 금미달 궁홀산 에서 내려 온 사람이라 궁예시조 (弓裔始祖) 성 박씨(姓朴氏)라고 밝혔다.[16] 신라 말기에 후고구려 왕이라 자칭한 궁예(弓裔) 또한 금미달 지역 궁홀산(弓忽山)에 살던 지도자의 후예란 뜻이 있다. 산적 궁예(弓裔)가 살아 있는 미륵(彌勒)이 하고 자리잡은 곳이 패강도 (浿江道) 라 했다, 산해관 연안 이란 뜻이다.
원나라 역사서에는 지나(支那) 라고 부르던 중국 남쪽에 신라 가라 백제가 있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실려 있다. 운남성에는 신라 가라의 자치주도 있었다. 십육국 시대 남조 역사서에는 광개토대왕 비문에 실린 신라 임나 가라(新羅, 任那 加羅)와 같은 글자가 실렸고, 같은 글자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 세 지역에 나타난 이름자의 상관 관계를 아무도 합당하게 설명 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중국 사가는 물론하고 한국 사학계에서도 중원의 그늘 밑에 옳바른 풀이를 못하고 영토 마저 점차로 빼앗긴 수치를 당해 왔다. 모두들 이를 “지정학적”이란 술어로 그 사정을 설명 한다. 필자가 볼때는 마치 해가 지구를 돌아 새날이 온다고 오랫동안 인식 했듯이, 중국사람들이 조작한 동북아 상고사를 잘못 인식한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아직도 좁은 시각에서 풀이 하여 이러한 오류가 나타났다.
지정학의 핵심 요인:
지정학(地政學: geopolitics)이란 지리적인 위치 관계가 정치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이란 뜻이다. 핵심 요인은 교류와 의사 소통이다.
옛적에는 큰 산맥과 강을 국경으로 했다. 교류에 불편을 느껴서다. 그러나 생활 필수품을 찾아서는 그러한 자연 장애를 극복 하고 교류를 했다는 사실이 스리랑카 역사에 승가라국 (僧伽羅國) 이란 이름이다. 홍산 문화권 에서 분수계곡을 따라 소금을 찾아 산서성 해지(解池)에 이르렀고, 차마고도를 따라 히말리아 동단에 이르렀다. 뱃길로는 해안을 따라 동남아 여러 곳에 이르렀다.
자연과학의 발달로 문물 교류의 양상이 바뀌었다. 자연적 장애물을 지나 자유로운 의사 소통이 실천 되고, 해양을 건너 좋은 값에 많은 물량을 구입 하여 수만리에서 운송해 오고 있다.
부여씨가 동양의 페니키아(Phoenician)인 으로 해양을 석권 했다.
지중해를 페니키아인이 개척 석권하듯, 동아시아 해안을 오랫동안 부여씨가 통치 했다.
금미달 쌍간하 연안에서 나타난 북부여(北扶餘,夫餘, 기원전 4세기~494년)에서 삼한(三韓)이 나타났다. 부여씨가 바다를 건너 여러 나라를 세워 이를 백제라 했다. 광운에는 중원에 자리잡은 부여씨의 유래를 왕성하게 중원에 퍼져 살았다는 뜻이있는 글자로 예맥 족으로 설명 했다. [17] 지나 (支那)라고 하는 남쪽에는 오랫동안 신라 백제 가야 왜가 있었다. 광운 여(廣韻 余)자 설명에는 [여“余我也”는 나]라 했다.
금백제왕 부여씨 (今百濟王夫餘氏)란 문구는 송나라가 “廣韻”을 만들던 시절 중원에 백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부여씨가 넓은 바다 해상권을 장악 했다 하여 한해(瀚海, 翰海)라 했다. 태평광기(太平廣記)에는 “金可記,新羅人也”라 출처를 “續仙傳”이라 했다. 흥부-놀부의 원전이라 한다. 이렇게 중원에는 오랫동안 삼한의 후손이 살았다.
부여씨가 대륙백제를 건국했다. 수서(隋書)에 실린 백가제해 (百家濟海)를 간략한 글자다. 백제 전성기에는 큰바다 동서 연안에 수도를 두고 22개 담노(擔魯)가 있었다. 중국 동쪽 바다를 한해라고 했다. 삼한 (三韓)이 다스리던 바다를 음이 같은 글자로 바꾸어 날개를 펴다는 뜻의 글자 한해(瀚海, 翰海)라고 기록 했다.
오호십육국 남북조 시대 말기에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 하던 시절(平陳之歲)에 전함이 백제 영역이 었던 대만섬 탐모라국(𨈭牟羅國)에 표류 했다. 그 섬을 남북이 천리 동서가 수백라고 자세히 기록 했다. [18] 이를 후세 사람들이 글자를 바꾸어 제주도라 했다. 한국에서는 일차 사료는 무시하고 후세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인용하여 분명한 대만섬을 제주도라고 기록 했다. [19]
중국 24사 중에 속하는 수서(隋書)와 같은 사가 당 나라 이연수가 남긴 남사(南史)와 북사(北史) 그리고 통전에도 실린 뚜렷한 사실을 은패 하여 미륵 신앙을 믿고, 신라 백제 가야를 이루었던 사람들이 오랫 동안 대만섬에 살았다는 사실을 은패 했다. 대만섬에는 아리랑의 어원이 되는 아리산(阿里山)과 가라산(加羅山) 가라호(加羅湖)가 있다. [20] 서긍은 대만섬 높은 산을 봉래산 (蓬萊山) 이라 했다. 손권이 보냈던 육손이 이주(夷州及朱崖)원주민으로 부터 [그들은 불사초를 구하러 갔던 사람들의 후손] 이란 예기를 삼국지에 남겼다. [21] 가라(加羅)가 진라(真臘. 占臘[Zhēnlà, Chenla])라고 부르던 크매르의 남쪽에 있었다. [22]
중국 대륙 에서 쫓겨 대만섬에 정착 했서도 중화 사상을 지켜오는 대만인은 아직도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 한반도 북부가 중원 세력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라 백제 왜 일본(倭, 日本)과의 관계:
진수가 금미달 (今彌達) 지역 호타하 연안에 살던 세 지도자 삼감 (三監)이란 뜻을 삼한(三韓) 이란 명칭을 만들고 높은 지도자(큰 가한 Kahan )란 뜻을 비하 음차 하여 적을 소다 왜(倭; wēi wō wǒ; 魏, 微: 汗[hán])로 기록 했다. 글자를 바꾸었다. 근거가 삼국지 왜인전과 단석괴전에 있다.
한국(汗國)을 공격하고 한인(汗人) 수천명을 잡아갔다. 동이전에는 원시 불교가 중앙 아시아를 돌아온 전래 경로에 왜(倭)자가 실렸다. [23] 같은 내용을 태평어람에는 왜(倭)인전에 실었다.
이 왜(倭)자가 신라 백제 임나 가라와 같이 광개토 대왕 비문에 실렸고, 중원의 동쪽 해안을 따라 흐처져 나가 왜왕이 다스렸다는 기록이 여러 남조 역사서에 실렸다. 이들이 모두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 하던 시절에 한해(瀚海)를 건너 동쪽으로 와 수나라에 듣기 불쾌한 문구를 보냈다.
부여씨가 대륙에서 밀려나 수나라에 보낸 서한에 “해뜨는 나라 천자가 해지는 나라 족하에게” 하는 문구에서 나타났다. 화가난 수양제 가 609년에 사신으로 처음으로 한해의 남단 항로를 따라 백제를 대만섬(𨈭牟羅國)을 지나 죽도를 돌아 낙동강 하구 김해를 거처 구주를 다녀 왔다. [24]
문무왕 10년 (671/1/17) 봄에 왜(倭) 가 이름을 일본 으로 부꾸었다(倭國更號日本) 는 통고를 하고 701년에 당나라에 알렸다.[25] 위징이 대만섬을 묘사 했던 같은 이름에서 한자 빼고 담라국 (𨈭羅國) , 수로왕이 통치했던 김해를 도사마(都斯麻),즉 백제 무녕왕(武寧王;462년~523년)의 수도라고 했다. 그를 양무제 (梁武帝)가 521년에 특절도독 백제 제군사 녕동 장군(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에 봉했다. 당시 백제가 한해의 동서 연안을 통치 했다는 뜻이다.
중원 사람들이 한해(瀚海)의 동쪽을 탐방한 첫 기록이 수서에 있다. 그에 백제와 신라 여러 나라가 왜를 강국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당시 수나라가 동번기(隋東蕃風俗記云; 대만섬 방문기)를 만들어 양나라 때 부터 그 섬에 있던 신라 왕실의 유래를 남겼다. 수서에는 가야국 (加耶國)을 떠나 멀리서 왔다는 뜻에 불가에서 쓰는 글자로 가라(迦羅)라고 기록 했다. 이를 중원에서는 일본 동쪽 3000리 밖에 부쌍(扶桑)국이 있다고 연막을 쳤다. 통전에 실린 이 기록이 사라졌다고 한다. [26] 통전과 같은 시대 편술된 신구 당서와 수서는 살아 있다. 금미달을 떠난 사람들이 동남아 해안을 장악 했다. 남북조 시대에 나타났던 [왜왕이 다스렸다는 “新羅 任那加羅”라는 글자들] 이다. [27]
왜(倭)의 종주국이 었던 부여씨의 백제가 멸망 하여 왜가 주동이 돼여 한반도 이외 백제 담로(擔魯) 였던 여러 나라를 동원하여 (너무 늦게) 구원병으로 왔다가 백강 전투 (白江戰鬪; 663년 8월)에서 패망하고 돌아가 오늘의 관동 지역에 도읍을 정하고 일본(日本)이란 칭호를 사용 했다. 그후로도 구주에 있던 왜는 계속 신라를 치려 하여 문무왕이 죽어서라도 왜를 막겠다는 결심에 유언을 남겨 바닷속 대왕암 바위에 뭍혀 바닷속 왕릉(海中王陵) 이라 한다.
신라 본기에는 [문무왕 이후에도 왜는 신라에 적대 관계였고 일본은 우호적이 었다]는 증거가 여러 곳에 보인다. 그러한 여파가 임진란 때에도 나타났다. 구주 사람들(倭)이 조동이 되여 정명가도 (征明假道)란 기치 아래 한반도를 침략 했다. 임진란 이전에는 대만섬을 침략 했다. 일본땅 (관동)에 자리잡은 도꾸가와 막부는 임진란에 관여 하지 않아 이조(李朝) 왕실 사절단을 극진히 맞아 드렸다.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일행의 방문을 그린 그림이 국보로 전해 온다. [28]
누가 언제 한해(瀚海)의 남쪽 항로를 개발 했나?
이는 동북아사아 역사 연구자는 마땅히 깊히 다루어야 한다. 남북조 시대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관한 기록은 한중 두나라 기록이 모두 혼미 하다.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의 부인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였던 허황옥(許黃玉) 뱃길로 김해에 와서 가락국(駕洛國) 김수로(金首露)왕의 부인이 되었다는 전설은 불교 전래와 깊은 관계가 있다. 부여씨라고 설명 했던 가야국 가실왕의 후손 들이 한해를 석권했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이 대동강 하구에 있던 백제 개로왕(蓋鹵王, 扶餘慶: ? ~ 475년 )의 수도를 급습 했다. 그 시절에 왕자가 신라에 구원병을 청하러 갔다. 구원 병을 이끌고 돌아 오니 한성은 이미 함락 되었다. 문주왕(文周王, 文淵王 汶淵王: ? ~ 477년) 이란 칭호에 물수 변을 붙이기도 한다. 서해안 어느 섬에 일시 정착 했었다고 본다. 그 시절에 중원에 도움을 청하러 갔던 사신이 479년에 한반도에 도착 했다. [29] 그당시 (南齊 建元元年) 가라왕 하지(加羅王荷知)가 중원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제서에 있다.
이를 종합 하면 아래와 같다. 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이 산동반도에 내려와 정착 했던 곳을 삼국사기에 신라 북쪽 영토로 기록한 실직(悉直谷國. 悉直國. 悉直州)이라 했다. 고구려 장수왕이 신라영역이었던 사직성(新羅悉直州城)을 점령 했다. 그후 한해 중앙 항로를 장악 했던 부여융 세력(餘奴)을 제거 하고 남제태조 도성(南齊太祖蕭道成; 427년~482년) 과 교류 했다. 이 당시에 나라를 잃은 연왕 홍(燕王弘)의 아들 태자 왕인(取其太子王仁) 이 왜 (일본)로 도망 갔다. 그를 박사왕인 (博士王仁) 이라 한다.
고구려에 인질로 잡혔던 왕인은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구주에 갔다. 그러나 백제 부여융이 중원에 있던 대륙 백제에 구원병을 청하려 보냈던 사신 이름은 불명 하다. 수서에 백제 부용국으로 풀이 하는 도사마국 (都斯麻國) 으로 풀이 한 가락국 (駕洛國) 하지왕이 백제 사신으로 허황옥(許黃玉) 이 올라온 뱃길로바다를 건너 중원에 갔다고 본다.
금미달 지역에서 옥새(玉璽)의 원조가 되는 화씨벽(和氏之璧) 이 나타났다. 지도자란 뜻의 감(監)자에 물수 또는 풀초 변등을 더해 여러 글자를 만들어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사자성어가 나타났다. 진수가 금미달 (今彌達) 지역 호타하 연안에 살던 세 지도자 삼감 (三監)이란 뜻을 삼한(三韓) 이란 명칭을 만들고 높은 지도자(큰 가한 Kahan )란 뜻을 비하 음차 하여 적을 소자 왜(倭; wēi wō wǒ; 魏, 微: 汗[hán])로 기록 했다. 글자를 바꾸었다는 근거가 삼국지 왜인전과 단석괴전에 있다. 발해만 서쪽 한국(汗國)을 공격하고 한인(汗人) 수천명을 잡아갔다. 동이전에는 원시 불교가 중앙 아시아를 돌아온 전래 경로에 왜(倭)자가 신라의 옛이름 시라(斯羅)와 같이 실렸다. [30] 같은 내용을 태평어람에는 왜(倭)인전에 실었다. 삼국지 위서에 실린 선비(鮮卑)와 여러 미(彌)자가 금미달 지역을 떠난 사람들이 세운 도읍을 뜻했다.
이러한 글자들이 신라 백제 임나 가라와 같이 광개토 대왕 비문에 실렸고, 중원의 동쪽 해안을 따라 흐처져 나가 왜왕이 다스렸다는 기록이 여러 남조 역사서에 실렸다. 이들이 모두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 하던 시절에 한해(瀚海)를 건너 동쪽으로 와 수나라에 듣기 불쾌한 문구를 보냈다.
문무왕 10년 (671/1/17) 봄에 왜(倭)가 이름을 일본으로 부꾸었다(倭國更號日本) 는 통고를 하고 701년에 당나라에 알렸다.[31] 일본 (日本) 이라고 바꾼 유래는 부여씨가 대륙에서 밀려난 수나라에 보낸 서한에 “해뜨는 나라 천자가 해지는 나라 족하에게” 하는 문구에서 나타났다. 화가난 수양제가 609년에 배청 (裴清)을 사신으로 처음으로 한해의 남단 항로를 따라 백제를 대만섬(𨈭牟羅國)을 지나 죽도를 돌아 낙동강 하구 김해를 거처 구주를 다녀 왔다. [32] 위징이 대만섬을 묘사 했던 이름에서 한글자를 빼고 담라국 (𨈭羅國) , 김해를 도사마(都斯麻)즉 백제 무령왕(武寧王, 462년 ~ 523년)의 수도라고 했다.
중원 사람들이 한해(瀚海)의 동쪽을 탐방한 첫 기록이 수서다. 백제와 신라 여러 나라가 왜를 강국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수서에 있다. 그 당시 수나라가 동번기(隋東蕃風俗記; 대만섬 방문기)를 만들어 신라 왕실의 유래를 남겼다. 수서에는 가락국을 멀리서 왔다는 뜻에 불가에서 쓰는 글자 가라(迦羅)라 했다. 통전에 실린 이 기록이 사라졌다고 한다. [33] 신구 당서와 통전은 살아 있다. 백제(百濟) 왕인(王仁, ?~?) 박사가 왜국에 건너가 천자문 과 논어를 전했다는 기록이 일본사서에 있다.
금미달을 떠난 사람들이 중원 해안을 따라 지나라고 부르던 중국 남쪽 지역에 살았다. 그 들이 상인으로 동남아 해안을 항해 했다. 남북조 시대에 나타났던 [왜왕이 다스렸다]는 글자들 이다.
이는 왜(倭)의 종주국이 었던 백제가 멸망 하여 왜가 주동이 돼여 한반도 이외 백제 담로(擔魯) 였던 여러 나라를 동원하여 (너무 늦게) 구원병으로 왔다가 백강 전투 (白江戰鬪; 663년 8월)에서 패망하고 돌아가 오늘의 관동 지역에 도음을 정하고 일본이란 칭호를 사용 했다. 담로(擔魯)란 백제의 관어(魯言語)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귀머거리 (擔 譫𨈭)들이 사는 지역이란 뜻이 있다. 그후로도 구주에 있던 왜는 탐탐히 신라를 치려고 했다 하여 문무왕이 죽어서라도 왜를 막겠다는 결심에 유언을 남겨 바닷속 바위에 뭍혔다.
신라 본기에는 [문무왕 이후에도 왜는 신라에 적대 관계였고 일본은 우호적이 었다]는 증거가 여러 곳에 보인다. 그러한 여파가 임진란 때에도 나타났다. 구주 사람들(倭)이 조동이 되여 정명가도 (征明假道)란 기치 아래 한반도를 침략 했다. 임진란 이전에는 대만섬을 침략 했다. 일본땅 (관동)에 자리잡은 도꾸가와 막부는 임진란에 관여 하지 않아 이조 왕실 사절단을 극진히 맞아 드렸다. [34]
이를 중원에서는 일본 동쪽 3000리 밖에 부쌍(扶桑)국이 있다고 연막을 쳤다. 또한 명나라 정화 (鄭和, 1371년 ~ 1434년)제독이 스리랑카(Ceylon) 섬을 정벌했다는 연막극을 쳤다. 신라가 고구려 평양성을 먼저 점령하고 만주에 남아 있던 사실을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할때 고구려왕이 피신했던 곳을 [고구려는 되돌아 가고 남아 있던 사람들이 신라가 되었다]고 했다. 부쌍(扶桑)국의 부쌍이란 글자는 우리양곡(居郁夷 曰暘谷) 이라 했던 지역에서 북쪽으로 밀어 산서성 대군 “쌍건하 (桑乾河)일대에 접 붙였다. [35] 당나라 에서는 백제를 공격 할때 김춘추가 우리양곡에 살던 사람들의 후예란 뜻에 에게 우이동행군총과 (嵎夷道行軍捴管)이란 작위를 주었다. 부여씨가 장악 했던 동양의 해양권을 해신으로 추모하는 신라의 해상 장보고(張保皐 .弓福:?~846년) 가 이어 받아 월남 부터 중국 동해안 여러 지역에서 그를 추모하고 있다. 옛부터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사는 만주(滿洲) 심양 (瀋陽)에서는 장보고 기념관( 張保皐 記念館) 을 설립 했다고 영문 위키에 실렀다. Jang Bogo – Wikipedia.
한국과 대만에 지정학(地政學: geopolitics)이란 개념을 비교해 보세요.
지정학이란 어떤 특정한 곳에 사는 사람들의 머릿 속에 있다. [36]
한글 표기법을 개정한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 필자는 이를 [문법은 헌법 보다 중요 하다. 남북한으로 갈라져 있고, 만주등 해외에 사는 교포들의 의견도 참조 하는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고 극히 반대 했다. 후에 이를 주관했던 김XX 교수의 친필 편지를 받았다. 그 원인은 한글학회 두 학파간의 감정에서 시작 되었다. 물리대 국어학과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어 문턱이 높았다. 사범대학 국어학과 교사들이 전국에 흐터져 있고 정부 관계에서도 일하던 상태라, 문리대 한글학과는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잃었고 숫적으로 턱부족이었다.
현지인이 뜻을 살려 기록한 동북아 국가 명사를 현지음에 따른다는 외래어 표기법은 매국 행위다. 삼한(三韓) 땅 한반도에 있는 큰 강은 마땅히 클 한자 한강(韓江)으로 적어야 한다. 현지인의 뜻을 살린 옛적 번체 이름자로 선조들이 쓰던 북경(北京) 상해(上海) 광동(廣東) 하는 글자로 사용해야 한다.
끝 마침 말
도산은 개몽이란 뜻을 그 당시 상황에 맞게 인문 사회 과학 분야에 적용 했다. 시대는 변했다.
도산이 인용한 개몽이란 어휘를 깊히 살펴 볼때다. 자유국가 남한에 사는 사람들은 앞서 인용한 학교 선생직을 너머 새로운 현상을 찾아 연구를 하고 있다. 각계 각층에서 활약 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한류라는 새로운 용어가 나타났다. 그러나 지식인의 모화사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 시진평관을 대학 교정에 설치한 현실이다. 우리 선조가 살아온 역사를 잘못 인식한 배운자의 행태다.
우리민족이 상형글자를 처음 만들었다. 고려가요 가시리를 진음(秦音)이라 했다.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 하고 여러 글자를 하나로 통일 하여 예서(隸書) 문자가 나타났다. 산서성(隸省)에 살던 예(濊·穢·薉) 맥(貊·貉) 사람들이 쓰던 글자가 오늘의 번체다. 번체자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동북아 상고사의 종주국으로 중원을 석권하며 살아 발조선 시대(發朝鮮 時代)가 있었다. 중원사람들이 붙인 춘추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라 부르고 우리의 역사의 뿌리를 저들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잘못 인식해서 나타난 결과다.
인문 사회과학에서는 동북아 상고사를 깊히 연구 하는 풍토가 자리잡아야 한다. 이를 재미 지식인들이 주동이 되여 새로운 연구 방법으로 역사적 사실을 찾아 가는 기틀을 만들 도록 일깨워 주어야 한다. 이 길이 미국에 사는 지식인들이 해야할 도산 사상의 실천이다.
끝
February 22nd, 2024.
From McLean, Va
[1]. 東觀漢記:章帝元和二年,三足烏集沛國。三年,代郡高柳烏子生三足。
[2]. 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이 마지막 단군이다.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3]. 부여의 시말: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북부여기에 나온 단군은 누구인가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발기(拔奇)가 부여왕위구대(尉仇臺):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4]. 康熙字典: 佉:《法苑珠林》造書凡三人,長曰梵,其書右行。次書佉盧,其書左行。少者倉頡, 其書下行。見《唐書·異域志》又神名。《釋書》佛說彌勒成佛經,其先轉輪聖王,名儴佉。有四種兵,不以威武,治四天下。又《陀羅尼經》佉佉。《註》文殊眷屬。《又》佉呬佉呬。《註》普賢眷屬。◎按佉,梵音去佐切,見就形門。今不从,只以音和門,丘伽切,釋之爲是。康熙字典 堂:又佛堂曰鴈堂。《釋氏要覽》毗舍離爲佛作堂,形如鴈字,因名。文巫祭.
[5]. 三國遺事 :善德王代。 貞觀十年丙申。慈藏法師西學。乃於五臺感文殊授法詳見本傳文殊又云。汝國王是天竺剎利種。王預受佛記。故別有因緣。不同東夷共工之族。然以山川崎嶮故。고조선의 황금시대-1. 동이(東夷)가 철 만드는 기술을 개발: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6]. 後漢書: 逵所著經傳義詁及論難百餘萬言,又作詩、頌、誄、書、連珠、 酒令凡九篇,學者宗之,後世稱為通儒, 世主以此論學,悲矣哉. 가규賈逵 (賈逵174年—228年)與班固、賈逵共述漢史,傅毅等皆宗事之。부의(傅毅 ?. —90年)
[7]. 孟子 梁惠王上: 孟子見梁惠王,王立於沼上,顧鴻鴈麋鹿,曰:「賢者亦樂此乎?」論衡 刺孟:孟子見梁惠王。王曰:「叟!不遠千里而來,將何以利吾國乎?」孟子曰:「仁義而已,何必曰利?史記 樂書: 故君子不可須臾離禮, 須臾離禮則暴慢之行窮外,不可須臾離樂,須臾離樂則姦邪之行窮內。故樂音者, 君子之所養義也。
[8]. 史記 樂書: 太史公曰:夫上古明王舉樂者. 夫禮由外入,樂自內出。故君子不可須臾離禮, 須臾離禮則暴慢之行窮外,不可須臾離樂,須臾離樂則姦邪之行窮內。故樂音者, 君子之所養義也。
[9]. 益乾啟位, 啟殺之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水經注 伊水:
又有《百蟲將軍顯靈碑》,碑云:將軍姓伊氏,諱益,字隤敳,帝高陽之第二子伯益者也
晉元康五年七月七日,順人吳義等建立堂廟,永平元年二月二十日,刻石立頌,讚示後賢矣.
[10]. 단군왕검(壇君王儉)은 실존 인물이였다. The legendary Dangun Wanggeom was a real person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납일 (臘日)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11].Sinja Valley – Wikipedia. Sinja Rural Municipality – Wikipedia
[12]. 고조선(古朝鮮. 故)의 수도: 아사달 (阿斯達) 금미달(今彌達)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http://mapp.koreatimes.com/article/20240206/1500889.
[13]. Origin of Tibetan Buddhism-미륵신앙의 유래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14]. 大唐西域記: 商主僧伽. 僧伽羅國。古之師子國。又曰無憂國。即南印度。其地多奇寶。又名曰寶渚。昔釋迦牟尼佛化身名僧伽羅:皇帝遣中使太監鄭和。奉香華往詣彼國供養。鄭和勸國王阿烈苦柰兒。敬崇佛教遠離外道。王怒即欲加害。鄭和知其謀遂去。後復遣鄭和往賜諸番。拜賜錫蘭山國王王益慢不恭。用兵五萬人刊木塞道。分兵以劫海舟。會其下預洩其機。鄭和等覺亟回舟
[15]. 宣和奉使高麗圖經: 王氏之先葢髙麗大族也當髙氏政衰國人以建賢遂共立為君長後唐長興三年遂自稱權知國事請命于明宗乃拜建𤣥菟州都督充大義軍使封髙麗王晉開運二年建卒子武立漢乾祐末武卒子昭立. 宋史: 權知國事王建承高氏之位,遣使朝貢,以建為玄菟州都督,充大,封 高麗國王.
[16]. 三國史記 新羅本紀第 : 弓裔始祖 姓朴氏,諱赫居世。 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四月丙辰, 一曰正月十五日。即位,號居西干,時年十三。國號徐那伐。先是,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為六村 北原賊帥梁吉,遣其佐弓裔,領百餘騎,襲北原東部落及溟州管內酒泉等十餘郡縣.
崔致遠進時務一十餘條,王嘉納之,拜致遠為阿●弓裔自北原入何瑟羅,衆至六百餘人,自稱將軍.
[17]. 廣韻 穢: 濊:濊貊夫餘國名或作獩䫉又汪濊。獩:𠀤音穢。《廣韻》本作濊,濊貊,夫餘國名。或作䫉。《集韻》通作薉穢。○按《廣韻》《集韻》《類篇》俱書作獩. 廣韻 余: 余我也. 餘:殘也,䞉也,皆也,饒也,又姓晉有餘頠又漢複姓三氏晉卿韓宣子之後有名餘子者奔於齊號韓餘氏又傳餘氏本自傅說說旣爲相其後有留於傅巖者因號傅餘氏秦亂自淸河入吳漢興還本郡餘不還者曰傅氏今吳郡有之風俗通云吳公子夫摡奔楚其子在國以夫餘爲氏今百濟王夫餘氏也
[18]. 隋書: 平陳之歲,有一戰船漂至海東𨈭牟羅國,其船得還.其南海行三月,有𨈭牟羅國,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土多麞鹿,附庸於百濟。明年,上遣文林郎裴清使於倭國。度百濟,行至竹島,南望𨈭羅國,經都斯麻國,迥在大海中。又東至一支國,又至竹斯國,又東至秦王國,其人同於華夏.
[19].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silla-from-zhinasouthern-china-to-korean-peninsula/
[20]. 加羅湖、加羅山初心者攻略 – 洛一山林 (hikerzoe.com)
[21].三國志 陸遜傳:陸遜字伯言,吳郡吳人也。本名議,世江東大族.權欲遣偏師取夷州及朱崖,皆以諮遜,遜上疏曰:「臣愚以為四海未定,當須民力,以濟時務。」한해 따라 二萬里-5: 누가 언제 한해를 처음으로 건넜나-보충: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22]. 宋史 : 真臘國亦名占臘,其國在占城之南,東際海,西接蒲甘,南抵加羅希。其縣鎮風俗同占城,地方七千餘里。
[23]. 三國志 鮮卑傳: 聞汗人善捕魚,於是檀石槐東擊汗國,得千餘家,徙置烏侯秦水上,使捕魚以助糧。 至于今, 烏侯秦水上有汗人數百戶. 太平御覽 倭: 《魏志》曰:倭國在帶方東南大海中,依山島為國,舊百餘小國。漢時有朝見者, 今令使譯所通共三十國.又渡海千餘里,至未盧國,戶四千,濱山海居,人善捕魚,水無深淺皆能沉沒取之. 後漢書:烏桓鮮卑列傳: 聞倭人善網捕,於是東擊倭人國,得千餘家.
[24]. 隋書: 平陳之歲,有一戰船漂至海東𨈭牟羅國,其船得還,經于百濟,昌資送之甚厚,并遣使 奉表賀平陳 使者言倭王以天為兄,以日為弟,天未明時出聽政,跏趺坐,日出便停理務, 云委我弟. 度百濟, 行至竹島,南望𨈭羅國,經都斯麻國,迥在大海中。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 出以為名. 裴清使於倭國. 倭國: 百濟皆以倭為大國,恒通使往來。通典 :倭國一名日本, 在中國直東; 扶桑國復在倭國之東. 蓋近於日出處。
[25]. 三國史記 新羅本紀第六: 土星入月。京都地震。中侍智鏡退。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 出以為名.
[26]. 通典 新羅: 至隋文帝時,遣使來貢。其王姓金名真平,隋東蕃風俗記云:「金姓相承三十餘葉。」 文帝拜為樂浪郡公、新羅王。其王至今亦姓金。按梁史云姓慕,未詳中間易姓之由。其先附屬於百濟,後因百濟征高麗,人不堪戎役,相率歸之,遂致強盛,因襲加羅、任那諸國,滅之。並三韓之地。
[27]. 광개토대왕 비문에 실린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새로운 고찰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28]. 조선 통신사 행렬도 | 소장품 검색:국립중앙박물관 (museum.go.kr)
[29]. 왜인전(倭人傳)본론 설명-4: 한해(翰海)의 동서쪽-1: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南齊書:加羅國,三韓種也。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 「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為鎮東大將軍.
[30]. 三國志 鮮卑傳: 聞汗人善捕魚,於是檀石槐東擊汗國,得千餘家,徙置烏侯秦水上,使捕魚以助糧。 至于今, 烏侯秦水上有汗人數百戶. 太平御覽 倭: 《魏志》曰:倭國在帶方東南大海中,依山島為國,舊百餘小國。漢時有朝見者, 今令使譯所通共三十國.又渡海千餘里,至未盧國,戶四千,濱山海居,人善捕魚.
[31]. 三國史記 新羅本紀第六: 土星入月。京都地震。中侍智鏡退。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 出以為名. 通典 邊防序:倭國一名日本,在中國直東;扶桑國復在倭國之東, 約去中國三萬里. 倭一名日本, 自云國在日邊, 故以為稱。武太后長安二年,遣其大臣朝臣真人貢方物。
[32]. 隋書: 平陳之歲,有一戰船漂至海東𨈭牟羅國,其船得還,經于百濟,昌資送之甚厚,并遣使 奉表賀平陳 使者言倭王以天為兄,以日為弟,天未明時出聽政,跏趺坐,日出便停理務, 云委我弟. 度百濟, 行至竹島,南望𨈭羅國,經都斯麻國,迥在大海中。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 出以為名. 裴清使於倭國. 倭國: 百濟皆以倭為大國, 恒通使往來。 通典 :倭國一名日本, 在中國直東; 扶桑國復在倭國之東.
[33]. 通典 新羅: 至隋文帝時,遣使來貢。其王姓金名真平,隋東蕃風俗記云:「金姓相承三十餘葉。」 文帝拜為樂浪郡公、新羅王。其王至今亦姓金。按梁史云姓慕,未詳中間易姓之由。其先附屬於百濟,後因百濟征高麗,人不堪戎役,相率歸之,遂致強盛,因襲加羅、任那諸國,滅之。並三韓之地。
[34]. 조선 통신사 행렬도 | 소장품 검색:국립중앙박물관 (museum.go.kr)
[35]. 東觀漢記:章帝元和二年,三足烏集沛國。代郡高柳烏子生三足。 淮南子 天文訓: 日出於暘谷, 浴于咸池,拂於扶桑,是謂晨明。登於扶桑,爰始將行,是謂胐明。至於曲阿,是謂旦明
[36]. 台湾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대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History of Taiwan – Wikipedia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