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 본기 (晉書 帝紀)-3:
동이(東夷)와 삼한(三韓)의 어원
중국기록에서 대륙 백제란 기록이 없다. 이를 찾아내야 하는 첫 걸음은 시야를 넖혀 빠짐없이 찾아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백제(百濟)가 마한(馬韓)땅에서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 마한은 삼한의 하나고, 삼한은 동이의 한 지류라고 볼수 있다. 모두들 삼한(三韓)이라고 부르는 명사는 진수의 삼국지에 처음 나온다. 삼국지 동이전 (東夷傳)을 제탕한 후한서에는 왕제(王制)에 실린 내용을 인용하여 동쪽에 사는 사람들을 이(夷)라 했고, 공자님이 그 지역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신 곳이라 했다 . 위진시대를 대표하는 삼국지( 三國志)와 진서(晉書)에는 구이(九夷) 사이(四夷) 하는 문구가 보인다 . 진서에 나온는 뜻이다 .
사이(四夷)는 네 방향에 사는 (중원 사람과는 언어 풍속이 다른; 四夷之樂. 四夷舞) 사람이란 뜻이다 . 유교경전인 예기왕제(禮記 王制)이 이르기를 <나라 안(中國) 에는 융적오방지민(戎夷,五方之民)이 사는데, 모두 그들의 특성이 있다. 이러한 풍속은 바꾸기가 불가(不可推移)하다. 동방 사람을 이(夷)라 하고, 서방 사람을 융(戎), 남방 사람을 만(蠻)북방사람을 적(狄)이라 한다 . 여러 방향에 사는 사람들의 풍속이 특이하지만 서쪽 사람과 동쪽 사람 (戎夷)은 다 같이 머리를 피발(被髮) 했다. 같은 “hair style”을 했다니 기원이 같다는 뜻으로 풀이 된다.
지난해에 올린 “Oct 22, 2016 7:36pm동이 (東夷)의 뜻과 그 변천 과정”과 금년 여름에 올린“May 19, 2017 5:50pm.고조선의 가무(歌舞)-1: 회소곡(會蘇曲):”에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 있다.
어디를 영점(zero point)으로 하여 동서남북을 가렸나를 찾아 올라가면, 상서 대우모 (尚書 大禹謨)에 사이(四夷)란 글자가 보인다. 홍수로 범람이 심했던 함곡관 서쪽에 있던 서주 초기 수도를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 사방을 기술했다 . 왕제(王制)가 생긴 시절 이전 부터 중원에는 언어와 풍속이 다른 여러 부족이 이 지역에 여러 부족국가를 이루고 살았다. 이렇게 된 원인을 필자는 생활 필수조건과 연관이 있다고 추리했다:
우왕과 같이 치수사업을 성공시킨 두사람이 단군조선의 첫 두 지도자가 이 곳에서 활동 했다. 백익 (伯益)이 다제다능한 동이부락의 수령(東夷部落的首領)이였다 .
지나주(Oct 04, 2017 9:27am)에 올린 “백익(伯益)이 단군왕검 (壇君王儉):”에서 설명 했다.
동쪽에 사는 사람들 동이(東夷)를 왜 삼한(三韓)이라 했는지, 글자를 어떻게 선택 했는지 궁금하다.
강희자전에 따르면, 삼한(三韓)의 이름자(辰韓,示韓,馬韓)를 (글자 속에 잠긴 지역의 한계를 바꾸려고) 후한 광무제 (漢光武) 때에 다른 글자로 바꾸었다. (앞에 인용한) 후한서 동이전을 보라고 했다 . 진수가 만든 삼한(三韓)이란 이름을 살펴 보면, 삼한의 이름자에 진자와 마 (辰, 馬)자는 언제나 남아 있었다. 두 글자에 삼한(三韓) 이란 이름의 숨은 뜻이 있다고 본다. 진수가 진한(辰韓)이라 한 곳은 한서(漢書)에서는 진국(辰國)이라고 했다. 같은 지역을 사기에서는 갈석산 부근의 천연적인 국경을 지난 지역에 살던 여러 부족 국가를 의미 했다; “ 真番旁眾國欲上書見天子,又擁閼不通.”
진번방향의 여러나라(真番旁眾國)란 문구를 한서 (漢書)에서는 동쪽에 있는 여러 나라란 뜻으로 진국(辰國)으로 바꾸었다 .
“真番、辰國欲上書見天子,又雍閼弗通.” 뒤에는 이곳에 한4군을 만들었다고 했다.
“故遂定朝鮮為真番、臨屯、樂浪、玄菟四郡.”
이곳을 진수는 라 했다 .
번한(潘汗)이 살던 지역을 선비전에서 단석괴(檀石槐)가 한인(汗人)을 대려 갔다는 한인 이 새운 나라(汗國)가 있던 곳이다 . 이곳이 산동성 북쪽 해(北海)안을 따라 남만주로 연결되는 태고적부터 사용했던 통상로다. 그곳 사람들이 한인(汗人, 韓人)이였다. 그들이 해안선을 중요 교류 통로로 이용했다 하여 북해(北海)와 발해(渤海)를 사미천은 한해(翰海)라고 했다 .
진수는 삼국지 안에서도 을 만들었다 .
한서에는 고 했다. 이곳이 낙랑가까이 바다에 왜인(倭人)있다고 한 곳이다 .
이보다 동쪽에 같은 부족이 살았다 하여 진서에는 그들을 동왜(東倭)라고 했다 .
그 부족(東倭)이 공손연을 주살한 해(魏正始元年, 240년)에 처음으로 조위에 사신을 보냈다. 후한서를 비롯한 모든 사서에는 진수가 높다는 뜻(높을 高, 魏)이 있는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말을 사음하여 했다. 이곳이 왜인(倭人)의 본향으로 한국(汗國)을 왜국(倭國)이라고 했다. 발해만 연안에 살던 사람들이 요동반도를 지나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일본열도를 거처 유구에 이르렀다 . 진수는 사마천이 쓰던 한해(翰海)에 물수변을 더하여 한반도 남쪽 바다를 한해(瀚海)라고 했다 .
三國志 魏書三十 韓傳: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潘汗為界,朝鮮遂弱。
다시 진수 (陳壽 233-297)는 옛 기조선(暨朝鮮)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여러 부족으로 분류 “烏丸鮮卑東夷傳” 하면서, 기조선(暨朝鮮) 수도, 즉 요년성 서남부에 있는 조양시(朝陽市) 동부에 사는 부족 국가는 “東夷傳”에 포함 시켰다.
진번방향의 여러나라(真番旁眾國)를 변진전으로하고, 한인 지도자들이 세운 요동반도에 있던 혀 진국(辰國) 진한전(辰韓傳)에 실었다고 설명 했다.
우거왕의 왕검성이 있던 조양시(朝陽市)일대에 있던 사람들이 기원전 125년경에 옛 교통로를 따라 발해만 서남쪽 연안에 내려와 창해군(滄海郡)이 나타났다.
또 다른 일부는 조선상 역계경 (朝鮮相歷谿卿)을 따라 요하를 건너 요동반도에 이르는지역(東之辰國)으로 갔다. 이는 사기에 기록된 “진번 방향에 있는 여러 나라, 真番旁眾國”을 의미 했다. 산해관을 지나 진번(真番)이 있는 방향 즉 중국의 동북 (만주)을 뜻하던 지역이다. 이를 한서에서는 한나라 관할권 밖이었던 요하를 건너 요동반도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을 묘사 하여 해뜨는 동쪽에 있는 나라 란 뜻의 “진국, 辰國”이라 했다. 이를 삼국지와 후한서 ( 後漢書)에서는 한반도 끝에 사는 부족 국가로 풀이 하여 “진한, 辰韓”이라 했다. 처음에 남 만주지역에 살던 “한, 汗, 馯,韓”이 다스리던 많은 부족 국가들이 한반도 남쪽에 옛 부터 살아 온듯이 기록 했다. 그게 지금까지 정설로 되여 왔다. 이러한 내용은 모두 지난 6개월에 걸처 올린 “삼국지 위서 30 (三國志 魏書三十)를 논한다”에서 다루었다.
삼한(三韓)의 석삼(三)자는 진(辰)자에서 나왔다:
별 진, 별 신, 때 신(辰)이라고 읽는 글자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다. 현제 신 또는 진 이라고 읽는 글자들(晉,秦,震,陳,神,申,愼,辛,娠)이 “辰”자에서 변해 나왔다고 한다. 한마디로 해와 달 그리고 별을 삼신 (三辰,日月星也)이라고 했다. 하늘 높히 떠 있는 빛은 내는 세 물체를 진이라고 했다. 이글자에는 아침 단(旦), 해가 뜨기전 먼 지평선 (一)밑에서 해(日)가 사라저 가는 상형 글자 () 등이 나타 났다. 그 원형이 아물아물 한 (희미한) 물체란 뜻의 현(玄:亠,幺)자다 . 좀더 밝다는 뜻을 그린 상형자(恒, 桓)가 타타났다. 그를 숭모하는 상형 자가 제터 단(壇, 坦)다. 중앙 아시아 사람들은 중국의 서쪽을 진단(震旦)이라 불렀다. 이나라가 중원을 통일했던 진(秦)이고 동쪽에서 그에 맏섯던 제후국 또한 진(晉) 이라 했다. 산서성을 뜻하는 진 (晉.㬜:《說文》晉本字.《易》曰:明出地上,㬜)자에는 조선(朝鮮)과 같은 뜻이 있다고 설명 했다.
동한의 뒤를 이은 우진 (魏晉) 시대의 두 나라 이름 또한 이 글자에서 나왔다. 삼신 (三辰)을 숭배하는 사상에서 귀신 신(神)자가 나타 났다. 삼한 (三韓)중에서 제일 크다는 마한 (馬韓)이란 글자는 사음자“Mu Mou, Mo”라고 밝혔다. 그러한 사람들, 즉 기마유목민족 (騎馬遊牧民國家, The Eurasian Steppe)이 살던 들판에서 싸었다. 이 전쟁을 전쟁 목야전(坶野.牧野之戰)이라고 기록 했다. 유목민을 모 또는 마 (牟,毛,慕,馬) 韓 이라 고도 기록 했다. 모시(毛詩)는 그들이 부르던 노래란 뜻이라고 “古朝鮮 찾기”에서 역설했다. 삼국지에 나오는 모/변진 (弁辰傳)이란 글자도 여러 과정을 통하여 변한 (弁韓 , 卞韓) 또는 시한 (示韓) 이란 말을 거처 진한 (辰韓) 으로 정착 되였다. 이것이 삼한 (三韓) 중에서 가장 컸다는 마한 (馬韓)과의 관계다. 중국기록에 뚜렷하게 “동명의 후손니 옛 대방 땅에 나라를 세우고 공손도 (야심을 품고)딸을 백제 왕에게 바쳐서 도이 (東夷)의 (最)강국(强國)이 도였다”라고 한 백제(百濟)가 옛 마한 땅을 이어 받았다 . 마한(馬韓)이란 이름으로 부르는 부족은 하북평원을 지나 남만주 해안선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 퍼져 살고 있었다. 당태종이 백암성을 정복하고 남긴 극고려백암성소 (克高麗白巖城詔)에 나탄 무구 “反三韓之士, 編列弁辰之野, 燕碣土風, 晉後苦湧水之災”가 이를 증연 한다 . 삼한(三韓) 뿌리는 하북평원에서 남만주로 이어지는 지역이였다.
끝, 다음에 계속.
October 9, 2017. revised October 10th,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