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가 남긴 [今古雛加駮位居]는 무슨 뜻인가?
온조형 비류가 정착 했던 곳을 삼국유사에는 미추홀(彌雛忽)이라 했다 . 같은 곳, 같은 어음을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彌鄒忽”로 광개토대왕 비문에는미추성(彌鄒城)으로 기록 했다 . 또한 요하를 아리수(阿利水)라 했다. 비문과 삼국사기에는 삼국 건국초기에 “彌,雛”자가 많이 실렸다.
전한 말에 신나라(新朝; 8년 ~ 23년)를 만든 왕망이 유리왕 32년(기원후 12년)에 요서지역으로 진출한 고구려 군사와 싸우다 실패 하여 고구려 장군 연비 즉 후추(延丕侯雛)를 유인하여 목을 첬다. 그로부터 고구려를 하구려라고 불렀다 . 연비후 추를 고구려 후라고 했다. 같은 사음자 추“雛,騶,鄒”를 뜻이 약간 다른 여러 글자로 기록 했다 . 삼국유사에는 하나 같이 병아리 추(雛)자로 기록 했다. 유리명왕의 첫 아들 해명 (太子解明)이 옛적에 조선왕 비가 흉노에게 살해 당한 조양 일대에 있던 골도(王太子解明在古都, 骨都)에 갔다가 황룡국왕이 선물한 활를 부려 뜨려 책망을 받아 자살했다 . 태자 해명을 이리저리 돌려 만든 글자가 연비후추(延丕侯雛)다.
진수는 고구려전와 부여의 관계 그리고 관제등 자세히 설명 했다. 언어 풍속(言語諸事)이 부여와 같고, 다섯 부족(部) 연맹이 있다. 왕의 종족을 모두 고추가(古雛加)라고 했다 . 처음에는 연노부 (涓奴部)에서 왕이 나타났지만 점차 약해저서 진수가 집필할 당시에는 계루부(今桂婁部代之) 가 왕위를 대신 했다 . 이를 “今雖不為王”하여 “適統大人,得稱古雛加”라 했다. 지금에는 그 금수 같은 여노부(涓奴部)가 왕위를 잃고 적통 대인이 고추가의 칭호를 얻어 종묘와 시직을 모셨다.
동이전에는 대인(大人)이란 지도자를 뜻한 직책이 선비, 오환, 부여, 읍루등 여러 곳에 실렸다. 왜인전에 대인은 모두 사오명의 부인(大人皆四五婦)을 두었다. 후한말 혼란기에 그 부인 중에 어는 한 사람이 비미호가 되었다고 본다. 그 전후에도 비미호란 칭호가 남자 왕에게도 쓰이 있었다.
[왕자 발기(拔奇)는 요동으로 돌아가고 졸본부여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고추가 박위거(今古雛加駮位居)라 했다 . 절노부(絕奴部) 딸이 왕과 결혼 하여 절노부 또한 고추란 호를 썼다. 더할 가 (加)자는 현제 사용하는 집가(家)자와 같은 뜻으로 고추가란 옛적에 추(騶,鄒)로 기록했던 곳 (彌鄒城) 또는 그 사람의 집안 이란 뜻, 즉 활 잘쏘던 사람의 가무(家門) 이란 뜻이다. 하여 다른 부족에서도 왕위를 빼았으면 그 부족을 고추가라 했다. 고구려의 왕위는 여러번 성씨가 다른 집안으로 옮겨 젔다.
고구려의 왕위를 이어 받은 동생 이리모는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다. 이를 삼국지에는 이리모가 새로 나라를 만들었다(伊夷模作新國)고 기록 했다.
후한 말기에 졸본주에서는 이러한 분쟁으로 인하여 여자무당을 지도자로 뽑아 비미호가 나타 났다. 그러한 내용이 삼국지, 후한서, 진서에 실렸다. 그러난 한국 기록에는 당시 왜여왕 비미호가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
고구려 왕자로 기록된 발기(拔奇)는 대방 땅 미추홀(彌鄒忽)에 정착 했던 비류의 후손으로 대륙백제 사람이다. 그의 후손이 양자강 하류(西界越州, 江東)에 정착하여 살았다. 광운(廣韻:1007-1008)을 편찬할 당시 오군 (今吳郡)에 전해오는 예기로는 오공자 부개(吳公子夫摡)는 서북 쪽 초(楚) 땅으로 도망을 가고 그곳(江蘇省, 蘇州市)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백제왕 夫餘씨라 했다 . 삼국유사에 실린 남부여(南扶餘)에 관한 스님의 설명을 살펴보면, 강소성 소주에 자리 잡았던 비류의 후손을 남부여라 했다 .
왜인전에 나오는 친위왜왕비미호(親魏倭王卑彌呼)를 공손연과 같은 씨족이라고 진서에 적혔다. 후한 말에 그곳에 난리가 있어 여자를 왕으로 정했다. 그녀가 비미호다. 사마의가 공손연(公孫淵, ? ~ 238년)을 정벌하니까, 그 여왕이 사신을 보내 대방에서 만났다.
그후로는 공빙이 그치지 않았다. 서진의 초대 황제인 무제의 아버지인 사마소(文帝; 司馬昭:211- 265)가 그들을 (文帝作相)으로 만들었다. 무제 제임 태시초(泰始265年-274年)에 다시 사신을 보냈다 . 서주 황실의 척신이 되어 팔왕의 난에,남쪽으로 다시 내려와 동진을 거쳐 남조의 송-양나라의 황실과 교류 하였다
삼국지 동이전에 나타난 지금(今)이란 글자가 붙은 후한 말기에 졸본부여의 통치권이 발기의 후손 박위거(駮位居)가 다스렸다. 발기(拔奇)가 요동에 두 차레 갔다. 처음에는 그를 사자위구대(嗣子尉仇臺)라 했다. 부여왕의 첫 아들이란 뜻이다. 후에 공손도(公孫度)가 요동을 장악 했던 때에는 부여왕 위구대라 했다 .
졸본주는 북쪽에서 내려온 부여의 후손이 통치 했다. 태평어람에 실렸다. 사료의 출처를 후한서와 위지(魏志)라 했다. 서진 시대에 나타나지 않았던 신라 백제(新羅, 百濟) 란 이름이 동진 말기에 복건성 이남 지역에 나타났다. 서진말기 291년에 발성(拔城)에서 큰 전쟁이 있었다. 국운이 쇠할 증조로 풀이 했다. 팔왕의 난(八王-亂)시작이다. 사마의(司馬懿, 179년 ~ 251년) 가 공손연을 토벌하고 비미호(倭)의 후손을 제상으로 임명 했던 발기의 후손이 살던 곳을 발성(拔城)이라 했다.[3] 당시 발성(拔城)은 강북에 있었다. 광개토 대왕 비문에 실린 x발성(x拔城,, 從拔城, 敦拔城)을 맡길 임자 임나(任那) 라고 했다. 그곳에 공손도 세력과 인척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남아 살던 곳이란 뜻에서 진유고씨 (陳留高氏) 라고 했다. 임나가라(任那加羅)의 발원지다.[4] 박사고흥이 백제 서기를 남겼다는 발해고씨의 발생지이도 하다.
진수의 삼국지에 혼미하게 남긴 내용을 이렇게 풀이 했다.
끝. February 22, 2020
[1]. 北史: 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始立國於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強國。初以百家濟,因號百濟。其國東極新羅,北接高句麗,西南俱限大海,處小海南,東西四百五十里,南北九百餘里。其都曰居拔城,亦曰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城,東方曰得安城,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王姓餘氏,號「於羅瑕」,百姓呼為「鞬吉支」,夏言並王也。王妻號「於陸」,夏言妃也
[2]. 단군왕검(壇君王儉)은 실존 인물이였다. The legendary Dangun Wanggeom was a real person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3]. 晉書: 東倭重譯納貢,鮮卑名王,皆遣使來獻。天子歸美宰輔,又增帝封邑。是歲,扶南等二十一國、馬韓等十一國遣使來獻。 宣帝之平公孫氏也,其女王遣使至帶方朝見,其後貢聘不絕。及文帝作相,又數至。泰始初,遣使重譯入貢.
[4]. 北史: 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始立國於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強國。初以百家濟,因號百濟。其國東極新羅,北接高句麗,西南俱限大海,處小海南,東西四百五十里,南北九百餘里。其都曰居拔城,亦曰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城,東方曰得安城,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王姓餘氏,號「於羅瑕」,百姓呼為「鞬吉支」,夏言並王也。王妻號「於陸」,夏言妃也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