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진수가 남긴 요수(遼隧)란 곳는 어디인가?
요수(遼隧)란 글자가, 삼국지 공손도전, 무구검전, 고구려전(高句麗傳)등 세 곳에 “逆於遼隧,屯遼隧。入遼隧”란 문구로 나온다[.三國志 公孫度傳:景初元年,乃遣幽州刺史毌丘儉等齎璽書徵淵。淵遂發兵,逆於遼隧,與儉等戰。儉等不利而還。淵遂自立為燕王.二年春,遣太尉司馬宣王征淵。六月,軍至遼東.淵遣將軍卑衍、楊祚等步騎數萬屯遼隧,圍塹二十餘里。宣王軍至,令衍逆戰。宣王遣將軍胡遵等擊破之。宣王令軍穿圍,引兵東南向,而急東北,即趨襄平。衍等恐襄平無守,夜走。諸軍進至首山,淵復遣衍等迎軍殊死戰。復擊,大破之,遂進軍造城下,為圍塹。會霖雨三十餘日,遼水暴長,運船自遼口徑至城下。雨霽,起土山、脩櫓,為發石連弩射城中。淵窘急。糧盡,人相食,死者甚多。將軍楊祚等降。八月丙寅夜,大流星長數十丈,從首山東北墜襄平城東南。壬午,淵衆潰,與其子脩將數百騎突圍東南走,大兵急擊之,當流星所墜處斬淵父子。城破,斬相國以下首級以千數,傳淵首洛陽,遼東、帶方、樂浪、玄菟悉平。
高句麗傳:至殤、安之間,句麗王宮數寇遼東,更屬玄菟。遼東太守蔡風、玄菟太守姚光以宮為二郡害,興師伐之。宮詐降請和,二郡不進。宮密遣軍攻玄菟,焚燒候城,入遼隧,殺吏民。後宮復犯遼東,蔡風輕將吏士追討之,軍敗沒。
]. 무구검전에는“率幽州諸軍至襄平,屯遼隧”라 했다. 요수(遼隧)지역이 공손연(公孫淵, ? ~ 238년)이 잡혔던 양평(襄平) 가까이에 있었다는 뜻이다[. 三國志毌丘儉:率幽州諸軍至襄平,屯遼隧。右北平烏丸單于寇婁敦、遼西烏丸都督率衆王護留等,昔隨袁尚奔遼東者,率衆五千餘人降。寇婁敦遣弟阿羅槃等詣闕朝貢,封其渠率二十餘人為侯、王,賜輿馬繒綵各有差。公孫淵逆與儉戰,不利,引還.
三國史記 公孫度傳:景初元年,乃遣幽州刺史毌丘儉等齎璽書徵淵。淵遂發兵,逆於遼隧,與儉等戰。儉等不利而還。淵遂自立為燕王.二年春,遣太尉司馬宣王征淵。六月,軍至遼東.淵遣將軍卑衍、楊祚等步騎數萬屯遼隧,圍塹二十餘里。宣王軍至,令衍逆戰。宣王遣將軍胡遵等擊破之。宣王令軍穿圍,引兵東南向,而急東北,即趨襄平。衍等恐襄平無守,夜走。諸軍進至首山,淵復遣衍等迎軍殊死戰。復擊,大破之,遂進軍造城下,為圍塹。會霖雨三十餘日,遼水暴長,運船自遼口徑至城下。雨霽,起土山、脩櫓,為發石連弩射城中。淵窘急。糧盡,人相食,死者甚多。將軍楊祚等降。八月丙寅夜,大流星長數十丈,從首山東北墜襄平城東南。壬午,淵衆潰,與其子脩將數百騎突圍東南走,大兵急擊之,當流星所墜處斬淵父子。城破,斬相國以下首級以千數,傳淵首洛陽,遼東、帶方、樂浪、玄菟悉平。
毌丘儉:率幽州諸軍至襄平,屯遼隧。右北平烏丸單于寇婁敦、遼西烏丸都督率衆王護留等,昔隨袁尚奔遼東者,率衆五千餘人降。寇婁敦遣弟阿羅槃等詣闕朝貢,封其渠率二十餘人為侯、王,賜輿馬繒綵各有差。公孫淵逆與儉戰,不利,引還.
三國志 高句麗傳:至殤、安之間,句麗王宮數寇遼東,更屬玄菟。遼東太守蔡風、玄菟太守姚光以宮為二郡害,興師伐之。宮詐降請和,二郡不進。宮密遣軍攻玄菟,焚燒候城,入遼隧,殺吏民。後宮復犯遼東,蔡風輕將吏士追討之,軍敗沒。]. 고구려전에 나오는 입요수(遼隧)란 시기를 후한 상제(殤帝;105년 ~ 106년)에서 안제(安帝: 재위: 106년 ~ 125년) 집권기라 했다. 그 당시 고구려 왕궁(王宮)이 후한의 요동 태수 채풍채풍(蔡諷)과 현토 대수 요광(姚光)이 인도한 중원 세력과 싸웠다. 후한서에도 기록 되었다. 고구려 왕궁(王宮)이 사자(嗣子) 수성(遂成)에게 명하여 요광(姚光)등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싸운 장소가 발해만 서쪽 지명 (廣陽、漁陽、右北平、涿郡)으로 기록 되었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대를 보네 (夫餘王遣子尉仇台)한나라 군사를 도와 고구려가 물러 났다[.後漢書 東夷列傳:遂成因據險阨以遮大軍,而潛遣三千人攻玄菟、遼東,焚城郭,殺傷二千餘人。於是發廣陽、漁陽、右北平、涿郡屬國三千餘騎同救之,而貊人已去。夏,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攻遼隊,殺略吏人。蔡諷等追擊於新昌,戰歿,功曹耿耗、兵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以身扞諷,俱沒於陳,死者百餘人。秋,宮遂率馬韓、濊貊數千騎圍玄菟。夫餘王遣子尉仇台將二萬餘人,與州郡并力討破之,斬首五百餘級。 ].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제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宮, 47년 ~ 165년. 재위 53년 ~ 146년)재69년(121년)에 동생 수성(遂成,次大王, 71년~165년, 재위 146년~165년)과 같이 요동 현토 지역을 공략 했다[.三國史記 高句麗本紀第三:大祖大王太祖大王或云國祖王。,諱宮.三年,春二月,築遼西十城,以備漢兵.
五十九年,遣使如漢,貢獻方物,求屬玄●。『通鑑』言:「是年三月,麗王宮與穢貊,寇玄●。」不知或求屬或寇耶.六十六年,春二月,地震。夏六月,王與穢貊襲漢玄●,攻華麗城.
]. 그 당시에 유주자사 풍환이 현토태수와 요동 태수를 인솔하고 고구려와 싸웠다. 병마연 공손포(兵馬掾 公孫酺)가 요동태수 채풍(遼東太守蔡諷)을 막으려다 모두 전사 했다. 이 사건은 삼국지, 후한서 동이전과 삼국사기에 실렸다. 그러나 이 시대에 관한 역사 기술이 모두 달라 지명을 밝히려 논란이 나타난다. 미비 하지만 논란을 해결할 근거가 한서 지리지에 나타난 속에 있다.
수경주 제수(水經注 濟水)편에 이르기를 그러나 현존 하는 사기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다[. 水經注 濟水:《史遷記》曰:夏伯豕韋之故國矣。城西出而不方,城中有六大井,皆隧道下,俗謂之江井也。有馳道,自城屬于長垣。水南有金鄉山,縣之東界也。金鄉數山,皆空中穴口,謂之隧也.]. 앞서 다룬 바와 같이 수(隧)자는 이렇게 풀이가 다양 했고, 다른 글자로 바꾸어 기록 하여 본 뜻을 확인 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진수는 글자의 음과 뜻을 뒤섞어 사용 했다. 뿐만 아니라, 흔히 잘못 기록 할수 있는
방법을 인용하여 글자 꼴이 비슷한 다른 글자 수(隧)자를 대(隊)자로 바꾸어 적었다.
현토군 화려성(華麗城)은 서개마현(蓋馬國)에 있던 성이다. 왕과 선비군 8,000명이 요수현(遼隊縣遼隧縣)을 글자 꼴이 비슷한 라고 읽는 글자 요대현(遼隊縣)으로 바꾸었다. 이 전쟁에서 공손(公孫)이란 성씨가 요동 양평인 공손도(遼東襄平人 公孫度;?-204년)전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공손도의 어릴적 이름이 표(度少時名豹)다. 어려서 죽었다는 현토태수 공손역의 아들이 표(玄菟太守公孫琙,子豹)다. 어려서 중었다는 현토 대수 아들 공손포(公孫酺)를 발음이 비숫한 표범 표(子豹)로 기록 했다. 그가 121년에 전사 했다. 후한서에도 고구려 왕자 수성(遂成;次大王, 71년~165년, 재위 146년~165년)이 전쟁에서 이긴 곳을 요동 현토군 요대(遼隊)라고 했다. 진수가 요수(遼隧)라 한 곳을 요대(遼隊)라고 했다. 이 역사적 사건은 발해만 서쪽 연안에서 나타났다. 시대 장소 인물의 관계가 타당하게 설명 된다. 신대왕 5년인 169년에 고구려가 현토 태수 공손도을 도와 부산의 적을 토벌 했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第四:新大王 五年,王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將兵助玄●大守太守公孫度,討富山賊
三國志 高句麗傳:至殤、安之間,句麗王宮數寇遼東,更屬玄菟。遼東太守蔡風、玄菟太守姚光以宮為二郡害,興師伐之。宮詐降請和,二郡不進。宮密遣軍攻玄菟,焚燒候城,入遼隧,殺吏民。後宮復犯遼東,蔡風輕將吏士追討之,軍敗沒。]. 공손도가 장인을 몰아 내고 현토 땅의 지도권을 장악한 사건에 고구려가 협조 했다. 이 직위 찬달 사건을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는 정권을 찬탈한 일화를 실으면서 를 들어 논평 했다. 간(衎)자는 옛적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三國史記: ].
요대(遼隊)란 이름은 한서, 후한서, 수경주를 비롯한 여러 중국문헌에 나타나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漢書地理志 遼東郡) 18현 중에 양평 무려 요대 요양 험독 안시 서안평(襄平,新昌,無慮, 望平,房,候城,遼隊,遼陽,險瀆,居就,高顯,安市,西安平)이 있다. 서안평(西安平)은 삼국사기 고구려 편에 많이 나탄 중원과의 분쟁지였다. 진수 동오의 사신이 남만주와 교류 하려고 도착한 곳이 안평구(恂等到安平口)다[. 三國志 吳書二 吳主傳:恂等到安平口,先遣校尉陳奉前見宮,而宮受魏幽州刺史諷旨,令以吳使自效。奉聞之,倒還。宮遣主簿笮咨、帶固等出安平,與宏相見. ]. 여씨 춘추에 나오는 요수(遼水)의 수계에 있던 지역이다. 천진항으로 들어 가는 해하릏 요수라 했다. 요수의 요자를 중심으로 요동, 요서란 이름을 붙였다. 이 일대에 있던 이름을 오늘의 요하 동쪽으로 풀이하여 논란이 오고 있다.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가 원흉이다.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 하기전인 기원전225년 (秦始皇二十二年)에 연을 멸하고 얻었던 요동지역에 요수(遼水)가 남쪽으로 흘러 요대현 옛 성을 지난다(南逕遼隊縣故城)고 했다. 그 곳에 무구검이 군영을 설치 했다 퇴각 하고 뒤에는 사마선왕 휘가 진(司馬懿于遼隊)을 첬던 곳이다[. 水經注 卷十四:大遼水: 遼水亦言出砥石山,自塞外東流,直遼東之望平縣西,王莽之長說也。屈而西南流,逕襄平縣故城西,秦始皇二十二年,滅燕置遼東郡,治此。王莽之昌平也,故平州治。又南逕遼隊縣故城西,王莽更名之曰順睦也。公孫淵遣將軍畢衍拒司馬懿于遼隊,即是處也。]. 그 가까이에 고하 누수 패수(濕餘水. 沽河, 鮑丘水, 濡水, 浿水)가 있었다. 후한서 군국지에는 요수출 서개조 상은대(遼水出。西蓋鳥上殷台)라 했다.
결론: 진수가 요수(遼隧)라 한 곳을 후한서와 삼국사기에는 요대(遼隊)라고 했다. 발해만 서쪽 연안이였다. 삼국지 공손연 토벌작전에 나오는 둔요수(屯遼隧)란 문구는 고 풀이 함이 옳다. 공손연은 그의 고향 襄平에서 238년에 잡혔다. 고구려 동명 행사에 나타난 수신(隧神)과는 무관한 글자다.
襄平이란 지명은 요하 동쪽에는 없었다.
끝
May 13, 2019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