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략하기 전에 만리장성 남쪽에 발해만 서남쪽에 조선이 있었다. 전국시대에 중원 사람들이 조선에 드러와 사회적 혼란이 이러났다. 해하 수계(燕代朝鮮洌水之間. 燕之外郊朝鮮洌水之間)에 살던 사람들이 연예군남여(濊君南閭)를 따라 발해만 서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 수용소가 창해군 (滄海之郡)이다 . 진수는 한서(漢書) 의 진국(辰國)을 글자를 바꾸었다. 이는 사마천이 말한 “옆에 있는 작은 여러 마을”이란 뜻의 방소국(旁小邑)을 의미 한다. 신라 발생지에 조선유민이 여섯 고을에 살았다(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為六村)라 한 곳이다.
이 사건은 사마천이 어린 시절에 있었고 한나라 군사가 우거왕을 칠때는 사마천이 한무제 조정에서 중요한 직책에 있었다. 사기에 실린이 두 사건은 가장 신빙성이 높은 사료라 본다. 이 두 기록을 정확 하게 판독해야 동북아시아 역사를 바로 이해 하게 된다.
사마천은 창해군을 평준서(平準書)에 실었다. 같은 내용을 글자를 바꾸어 한서(漢書)에서는 식화지(食貨志)에 창해군(蒼海郡)이라는 이름으로 제물과 관계되는 편명에 올렸다. 사마천은 같은 사회적 풍파를 기록 하면서 피난민을 이끌고 온 사람의 이름도 숫자도 밝히지 않았고, 한나라 장삿꾼이 조선땅에 들어가 뇌물을 써서 조선이 멸했다고 했다. 한서에서도 같은 표현을 했지만 그들이 갔던 지역을 “예맥 조선;穢貊、朝鮮” 이라 했다 . 조선이라는 연합 공동체에서 한 부족이 떠났다는 뜻이다. 후한시대 순열(荀悦;148-209년)이 편찬한 전한기에는 “무력으로 동이예맥군 남녀등 28만 명을 항복받아 창해군은 설치 했다고 기록 했다 . 먼 뒷날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범엽(398년 ~ 445년)이 정리한 후한서에 예군남여 (濊君南閭)가 28만명을 이끌고 요동으로 갔다고 했다 .
평준서에 실린 창해지군 (滄海之郡)이라는 곳은 한고조 사당이 불에 탔었다는 요동(遼東高廟災)이다.
후세 사관들은 사마천이 “창해지군”이라 한 이름의 글자를 이리저리 바꾸어 창해군(蒼海郡)이 한반도 함경도 해안에 있었다고 한다. 연의 장성을 과장 하듯 이 사건 또한 많이 과장 되여 갔다. 그러나 그에 관한 여러 기록을 모아 분석해 보면 발해만 서남 연안이 분명하다.
예라고 발음하는 소리를 다른 글자(濊, 穢)로 적었다. 이 글자는 옛적에 해지연안에 살던 “huì/휘, huò/회, wèi/위”라고 하던 사람들을 서주의 노예(奴隸 )로 삼아 예서(隸書)체를 남긴 사람들의 후손이다. 이들이 산해관에서 발해만 서안을 따라 왕검성이 있던 조양 가까이에 살았다. 요동이란 이름은 여씨춘추에 나오는 요수(遼水) 동쪽이란 뜻이다. 피란민 수용소는 당산 일대에서 발해만 서남쪽 늪지대, 연과 제의 국경 지역에 있었다는 뜻이다.
사마천은 이를 한무제 당시의 대부였던 공손홍이 봉작을 받은 “발해만 서안일대를 뜻하는 평진후(平津侯) 편”에 실었다. 조용하던 연 제 지역에 사회적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한서에서 이 피난민 수용소가 생긴 곳을 요동이라 했다. 진시황이 통일하고 연의 장성을 더 동쪽으로 옮겨 만든 산해관 남쪽땅, 즉 발해만 서안을 요동이라 했다. 그 곳에 있는 바다 즉 발해를 창해(滄海)라 했다. 창해(滄海)가 발해만 서안을 뜻한다는 증거는 여러 곳에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 (曹操)가 원소 잔당을 소탕하고 돌아오는 길에 산해관 가까이에 있는 갈석산에 올라가 읊은 시문이 관창해 (觀滄海)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려고 대군을 이끌고 갈석산 지역에 이르러 그도 갈석산에 올라가 시를 읊었다. 남쪽에서 올라온 두 군 사령관이 같은 곳 같은 계절에 시를 읊었지만, 조조의 시문은 즐거움과 활기가 가득 하지만, 당태종의 시문은 밝지 못하고 번민이 숨어 있다. 이러한 사령관의 기분을 전환 시키고저 그를 수행 하던 여러 사람들의 권유로 양사도(楊師道)가 읊어 ‘답예로 당 태종에게 바친 시문’이 봉화성제춘일망해 (奉和聖制春日望海)다. 양사도의 시문에는 그 일대 지명이 나온다. 앞에 내려다 보이는 바다를 창해 (滄海)라 했다. 한국상고사에서 논란이 되는 “창해 (滄海) 청구 (靑丘) 숙신(肅愼) 대방(帶方)”하는 이름들이 모두 갈석산 유역에 있었다.
사기유후 세가 (留侯世家)에는 창해군(倉海君) 이라는 글자로 나온다 . 이 곳에서 사람을 구해 진시황을 살해 하려다 잘못 철퇴를 휘둘러 실패 했다는 사람을 창해역사 (滄海力士)라 했다. 이 사건이 진시황 일행이 방랑사(博浪沙)을 지날 때 이 사건이 발생 했다. 이 곳이 발해만 서남쪽, 오늘의 하북성 창주시 (滄州市) 일대다. 이 지역을 여씨 춘추에서는 사음대자(PSMCs)하여 예인(穢人)들의 고향 이라 했다 . 피난민 수용소가 생겨 연과 제 사이의 조용하던 지역에 사회적 풍파가 생겼다는 사마천의 표현을 고려 하면, 요동에 생겼다는 창해군은 천진에서 방랑사 일대에 까지 흐터저 있었다.
기원전 128년 발해만 연안이 설치되었던 난민 소용소는 2년후에 평준후가 된 공손홍의 제안을 받아드려 패지 해다지만, 이는 스스로 없어지고 말았다. 그 곳에서 왜인 (倭人)이란 글자로 기록된 사람들이 나타 났다. 이 곳이 산동성에서 만주로 이어지는 길목이라 사회가 혼란해 지면 이 길목을 통하여 남북으로 피란을 갔었고 그 곳에서 “백제, 왜, 가야 연맹체”가 나타 났다. 진수가 단석괴(檀石槐)에 관한 설명을 할때 나타난 한인(汗人) 이 망으로 생선을 잘잡는다는 소식을 듯고 그들이 살던 곳 한국(汗國)을 정벌하고 천여 가구를 포로로 잡아 갔다는 말을 후한서 에서는 왜인(倭人) 왜인국(倭人國)이라고 바꾸어 기록 했다. 왜인들이 살던 곳이 옛 창해군이 있었던 발해만 서남쪽에서 황하 하류에 이르는 늪지대 였다 . 이곳이 “백제, 가야 연맹, 왜라 부르던 사람들”의 옛 고향 이다.
이 지역을 다스리던 사람을 사마천은 유후 세가에서 창해군(倉海君)이라 하고 그 지역에서 구했다는 청해역사(倉海力士)는 한무제를 도운 개국공신 한초삼걸 (漢初三傑)의 한사람 장량에 관한 일화다. 진시황 시절에 발해만 서남연안에 예맥족이 사는 큰 지역이 있었다는 증거다. 이 지역에 살던 예맥(穢貊)족이 발해만 서안을 따라 남북으로 교류를 했다. 이러한 상황을 염철론에서는 “조선을 벌하여 임문이 열리니 연제지역이 예맥으로 고생 했다”고 기록 했다 . 삼국지 변진전(弁辰傳)에 나오는 여러 나라들이다. 그들은 체격이 크고 왜와 진한 여러나라와 접해 살고 언어가 유사 하다고 했다 . 이지역을 광개토대왕 비문 2면에; “왜를 뒤 쫓아 임나가라 (任那加羅) 종발성(從拔城) 에까지 이르니 성은 즉각 항복하여 신라인으로 지키게 하였다”한 곳이다 . 지난주에 실은 “광개토대왕 비문 “而倭以”의 새로운 해석”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마천은 조선 이라 하고, 한서에서는 예맥조선이라 했다. 산동성 치천국 (菑川國) 사람으로 한무제 조정에서 일하던 공손홍은 이미 60세였다 . 그가 창해군을 패지 함이 좋겠다고 제언 할 때는 76세였다. 그후에 그는 천진 지방에 평순후로 봉해졌다.
이 발해만 연안에 살던 사람들이 우거왕이 사라진 뒤에는 바다(朝鮮在海中)와 육지 (胡)사방으로 흐터져 나갔다.
끝
January 8,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