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 (三韓)땅 청구 (靑丘)는 발해만 서쪽 대현 오대산 구릉을 뜻했다.
한무제가 새운 군현의 이름을 살펴 보니 삼한(三韓)의 이름이 그 속에 숨어 있었다. 이들이 살던 낙랑구릉(樂浪之丘)을 시적 표현으로 청구(靑丘, 青丘)라 했다.
청 (靑)자는 선진시대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설문해자에도 없다. 사기에는 “靑자가 없고 모두 青”자로 썼다. 같은 뜻을 한 글자를 왜 바꾸었나 궁금하다.
옛적 강희자전에는 산해경에 실린 청구(靑丘)란 글자가 여섯 곳에 보이고 낙랑 (樂浪)을 설명할때 인용한 물 맑을 영(渶)자가 청구산(靑丘山)에서 시작 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제 쓰는 강희자전에는 모두 “청구 (靑丘) 를 (青丘)로 기록” 했다 .
진시황 이전에 편잔된 여씨춘추에는 대우가 인물을 구하려고 동쪽으로 갔다는 지명에 조곡(鳥谷)、청구지향(青丘之鄉), 흑치지국(黑齒之國)이란 이름이 있다 . 조곡은 까마귀 오자 오곡(烏谷)으로 오씨가 살던 곳이고, 흑치국의 흑자는 해(sun, sun-ray,亥, 奚, 解)의 사음자로 단군조선의 한 부족이 살던 곳을 뜻한다.
문맥을 보면 여기 나온 청구는 “산의 서쪽과 산의 동쪽이란 뜻에서 산서성 과 산동성”하는 말이 생긴 해지 동쪽 산맥을 뜻했다. 한무제가 조선을 친입하기 이전에 죽은 사마상여(司馬相如, 기원전 179년- 기원전 117년)가 남긴 자허부 (子虛賦)에 초나라를 자랑 하던 오유선생과의 대화에서 청구(青丘)란 글자가를 썼다 . 같은 문구에 발해 (浮勃澥)에서 떠놀고, 맹저(游孟諸)에서 즐기고, 발해만 서남 연안에 있던 숙신(肅慎為鄰)과 이웃하고 하는 표현을 보면 청구(青丘)는 산동반도에 있던 사냥하기 좋은 곳이였다. 똑 같은 청구(青丘)란 글자가 일주서 왕회해에도 실려 있다. 글 내용을 보면 기자 (箕子)가 조선에 왔다는 기원전 1043년 때 예기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토굴꾼이 서진(晉,265-316년) 태강(太康, 280-289년)연간에 급총(汲冢)에서 찾아낸 죽간이 나왔다. 그 내용을 주서(周書)와 합하여 만들어 급총주서 (汲冢周書)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잃어 버렸던 주나라 때의 기록이라 하여 일주서(逸周書)라고도 한다. 많은 서지학자들은 서진시대의 석학이 였던 공조(晋孔晁)가 가필 또는 수정했다고 본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서진은 이 시대에 삼한의 후예들로 부터 호된 공격을 받았다. 하여 진수는 중국 동쪽 해안 일대에 흐터저 있던 여러 연맹부족국가 백제를 은미하게 남겼다. 그 단서가 삼국유사에 보인다 . 공조에게도 같은 정서가 작용했다고 본다. 급총주서 (汲冢周書)에는기자(箕子)에 관해 기록이 없는 편목만 있다. 이 시기에는 옛 고조선의 후손들이 들고 일어나 서진의 동쪽 경계선은 여러번 바뀌어싸. 서주의 세력이 만주 서남일대에 까지 이르렀다 일방적인 거짓된 기록이 적혀 있다. 성주대회에 참석한 주변국가 청구(青丘)사절단 이 꼬리가 9이 달린 여우를 선물로 갖고 왔다. 사절단을 그들이 온 곳을 순서대로 동서남북으로 나누에 좌석을 정해 주었다. 옛적 낙양의 동북쪽에서 부터 동남 쪽에서 온 부족이름에 숙신(稷慎) 예인(穢人) 해(解) 발인 (發人) 더 남쪽에 청구와 흑치(黑齒)가 실렸다. 여씨춘추, 사기 자허부에서와 같이 청구는 산동 반도에 있었다 . 이로부터 구미호 (九尾狐)란 이름이 생겼다. 여우 호(狐 [hú]/후)자는 사음자로 활 만든 사람을 설명할때 나타난 “호 후 휘”라고도 기록된 단군 조선의 한 부족을 뜻했다. 진서(晉書)에는 호씨 (狐氏)가 제후국 진(晉)의 선조라는 당숙(唐叔)이 후예라 했다 . 상형글자 진(晉)은 조선과 같은 뜻이라고 이미 밝혔다.
청구는 이렇게 옛적부터 단군조선을 이루었던 부족과 관계가 깊은 이름이다.
그 곳이 북경 동쪽 끝에서 산해관을 돌아 조양으로 이어지는 푸른 구릉지대다. 하여 옛부터 우리 선조들은 삼한 (三韓) 땅을 청구(青丘)라 불렀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친입하려고 산해관을 지날때 갈석산에 올라가 시를 읊었다. 그를 보필 하던 재상 양사도 (楊師道)가 “봉화성제 춘망일 奉和聖制春日望” 이란 오언시 (五言詩)시를 지어 답예로 바쳤다 . 그 시문에 “숙신향,청구, 갈석산, 창해”하는 문구가 실렸다.
삼한(三韓)의 발생:
한문제 시대까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해온 이름을 추적 하고 조선 열전을 풀이해 본 결과 한나라 군사는 발해만 서안을 따라 남만주 서남쪽 오늘의 조양에 있던 우거왕의 수도 왕검성을 점령 했다. 그 난리 통에 많은 피남민들이 옛부터 다니던 통로를 따라 발해만 서남쪽 옛적 연나라와 제 나라 땅에까지 내려와 살았다. 한의 군현은 조양에서 부터 남쪽으로는 천진 일대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 하기 위해 만든 행정 구 이름이였다. 이땅에 여러 한(可汗, 汗, 干, 翰, 韓, 馯)이 인솔하는 여러 부족 국가가 생겨 이들은 점차적으로 바다를 통상로로 사용하여 발해만 서쪽 연안에서 부터 산동 반도 북쪽 해안 지대와 한반도을 지나 일본 유구열도에 까지 진출 하여 살았다. 이 뱃길을 한해 (翰海), 그들이 흐터저 살던 넓은 땅을 삼한(三韓)땅이 라 했다. 현제 중국 공산당에서는 이를 다 잘라 버리고 한바도 끝 경상남도와 전라도 땅이 옛적 삼한땅이라 선전하고, 한해 (翰海)라 하던 이름은 가추어 버렸다
삼한(三韓)의 어원을 다시 한번 되살펴 본다. 문맥을 보면 한무제가 “중원 사람들이 그리워 하던, 요녕(遼寧)땅에 친입하여 기원전 108년에 한의 군현을 설치 했다. 그러나 사기는 물론하고, 한서등 한나라 시대에 편찬된 모든 사서에는(三韓)이란 낱말이 없다 . 삼한(三韓)이란 명사는 “당송시대 문헌인 후한서와 통전”에 처음 나타 난다 . 그 뜻을 찾아 올라가 보면 진수가 한전(韓傳)에서 한유삼종 (韓有三種)이라고 표현한 글자에서 시작 되였다 . 진수가 표현한 문구의 출처를 살펴 보면 그는 사기조선 열전에 “진번방중국 (真番旁眾國)이라는 문구, 즉 그 당시 국경 이였던 갈석산 일대의 진한, 번한 쪽에 있든 여러 나라들”이란 뜻을 다른 글자로 기록 했다. 그후에 “만주 통치세력과 중원의 한무제”가 합의한 내용 적힌 글자 “그 방향에 있는 작은 여러 마을이 항복하니 진번(真番), 임둔(臨屯) 모두 와서 복속 했다”는 문구를 이리저리 돌려 만들었다 . 그뿐 아니라 패수를 경계로 했다는 표현을 “만번한위계 (滿潘汗為界)라 하고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한(汗)이라 불렀고 이를 한전(韓傳)에서 유 삼종(有三種)이라는 표현”을 써서 마한 진한 변한 (馬韓, 辰韓,弁韓)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사용했다. 이렇게 처음에 사마천이 “음과 뜻을 섞어 사용여 발해만 서안에 여러 소읍국가를 이루고 살던 사람들을 뜻 했던 글자”를 후세 사가들이 다시 이리저리 돌려 새로 빼았은 영토에 적용 하여 “새 지역이 옛부터 중원 세력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합리화 시켜다 . 삼한(三韓)이란 뜻은 한(韓)이 다스리던 여러 마을이 있던 곳을 크게 세 지역 (三地域)으로 나누어,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의미 했다. 진수가 한(韓)을 한(汗)이라 표기 하였드시, 옛부터 이 “한 이란 발음은 여러 사음자”를 써왔다는 증거가 “Daum 한자 사전”에도 있다 . 하여 사기와 한서에는 이들이 주권을 잡고 있던 발해만 에서 남만주에 이르는 북해(北海)를 한해 (翰海)라 했다 . 이를 후한 말에 이르러 요동반도에 이르는 바다를 한해(瀚海)라 했다. 삼국지를 편찬하며 남만주 노인들의 예기를 들은 진수는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일본을 지나 유구에 이르는 바다를 한해(瀚海)라고 했다. 북해(北海)를 한해 (翰海)라 하던 글자에서 한해(瀚海)라고 바꾸어 쓴 과정에는 동북아시아에서 해상로를 따라 중원 세력과 교류가 이루어져가는 역사의 흐름을 설명 하고 있다. 남조 역사서 양나라 때 부터 “倭, 新羅, 任那, 伽羅, 秦韓, 慕韓六國” 여섯 나라를 다스렸다는 왜왕은 백제 여왕 비미호의 후손이다.
고조선의 후예들이 금미달(今彌達)에서 발해만으로 내려와 여러 소읍 국가를 세웠다, 점차로 한해의 동서 연안을 따라 해안으로 흐터 졌었다. 중원 동해안으로 내려 갔던 삼한의 후예가 해안을 따라 내려가 남중국 해안 4000 여리에 걸쳐 신미제국(新彌諸國) 20여국을 이루고 살았다. 옛 서주시절에 흉노의 전신인 험융에 시달리고, 연(燕)나라를 괴롭히더니, 한나라 때에는 바다로 흐터저 북쪽 육지에서 선비족이, 바다에서는 뱃길을 통치하던 삼한 사람들이 큰 문젯거리라고 했다 .
삼국지에는 기자(箕子)의 교화가 한전(韓傳) 예전(濊傳)에 모두 실려 있다. 요사와 광개토 대왕 비문에도 한예(濊韓)가 같이 나온다. 요사에는 “요나라 땅이 옛적 기자 (箕子)가 봉해진 조선 땅”이고 요양을 요 제국의 동경이라 했다 . 기자의 후손이 내몽고는 물론하고, 변진전 진한전과 함께 모두 발해만 북쪽 해안에 살던 사람들 이란 뜻이다. 이들을 숙신씨의 고향이라 했고 그들이 새운 나라를산해경에서는 맥국((貃國, 貊國) 해국(蓋國)이라 했고 왜(倭) 북쪽에 있다고 했다 . 천진시 일대에서 발해 서북쪽 해안에 이르는 지역이 삼한 (三韓)이란 명사의 출발 점이다.
끝
January 31, 2017. Edited November 11th, 2023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