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랑(樂浪)에 잠긴 사연 (事緣)들-5:
삼국정립 초기에는 낙랑(樂浪)이란 글자가 여러 곳에 실려 있다. 그러나 그 위치가 어디였나를 뚜렸하게 판가름할수 없게 되여 있다. 삼국사기 여러 곳에 나타 나는 낙랑(樂浪)이 어느 지역을 뜻했는지, 또 서로 어떠한 관계가 있었나 하는 문제는 차후에 다시 살펴 보기로 한다.
낙랑(樂浪)이란 글자를 살펴 보면 그 앞에 한(漢) 또는 자(自)하는 글자가 보이고 뒤에는 태수(太守)라는 직책을 붙었다. 이는 모두 한나라가 통치하던 지역에 있던 한낙랑(漢樂浪)이란 뜻이 분명하다.
한낙랑(漢樂浪)이 아니였던 낙랑의 대표적인 예가 호동(好童, ? ~ 32년)왕자가 낙랑공주(樂浪公主) 를 만났던 곳이다. 중국기록에는 이 애처로운 일화가 보이지 않는다.
1.낙랑왕 최리(樂浪王崔理)
한낙랑(漢樂浪)은 고을 군(郡)자로 쓰던 통치 영역이였다. 그 수장을 태수 (樂浪太守)라 했다. 최리(崔理)를 왕이라고 했스니, 그가 다스리던 지역은 하나의 국가였다. 국가라 하면, 통치 영역의 규모가 크다고 볼수 있다. 여러 군소읍을 다스리던 지도자라고 볼수도 있다.
순리를 생각하면 고구려의 건국과 수도 설정에서 부터 제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재위: 18년-44년) 임기 말년 까지 설명이 있었서야 하나, 필자의 두 영문본에서 밝힌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 하면, 그가 다스리던 고구려의 수도는 남만주 요동 반도 서쪽 요동만 수계(遼東灣 水界,Liadong bay watershed)에 있었다 . 지금 까지 몇차례에 걸처 필자가 보여 드린 “신라, 백제, 가야 연맹, 왜”가 남만주 발해만 연안에 있었다는 설을 감안 하면 쉽게 이해가 되리라 본다.
시조 주몽이 졸본부여 땅에 와서 비류수 북쪽에 수도를 정했다. 시조 주몽이 도읍을 정한 곳이 위서를 인용한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 비문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첫 수도는 비류수 북쪽이라고 했던 심양(瀋陽)과 요양 (遼陽)일대에 있었다.
건국초기에 부여 연맹체를 이루던 여러 작은 나라들과 영토 분쟁이 있었다.
고구려 2대 유리명왕(瑠璃明王, 제위 기원전 19년-기원후 18년) 3년에 애첩으로 있던 한녀(漢女)가 정실 부인과 싸우고 도망을 가자 그녀가 그리워 한자로 된 황조가를 읊었다 .당시 고구려의 수도가 한나라 영역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멀지 않았다는 증거다. 전한말 중원 세력이 위축 된 기회를 타서 옛 고조선 땅에 살던 사람들이 여러개의 국가를 이루고 살았다. 왕망(王莽, 기원전 45년-기원후 25년)이 실권을 잡고 나서는 옛적 한 낙랑과 현토 땅을 회수하려고 노력 했다. 유리왕은 서북쪽에 있던 부여와 서남 쪽에서 밀어오는 왕망의 세력막고 서기 13년에는
왕자 무휼(無恤)지략으로 부여군을 격파하였다. 서기 14년에는 요양 일대에 있던 양맥(梁貊)을 정복하고 옛 현도군(玄菟郡) 땅에 있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되 찾았다.
제 3대 대무신왕 무휼(大武神王, 無恤; 재위 : 18년44년)이 집권5년에는 갈사부여를 통합하여 국토를 확장 해 나갔다. 제위 9년에는 개마국(蓋馬國)을 정벌 했다. 개마(蓋馬)는 사음자로 개모(蓋牟)라고도 기록 했다. 요사에는 고구려 개모성 (蓋牟城)이 요양 근처이 있었다. 발해(渤海)시대에는 그곳을 해/개주(蓋州)라 했고 거란은 진주(辰州)라 불렀다. 그 곳이 진한(辰韓)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 옛 우거왕의 수도에 차려 놓았던 현토군 서개마(西蓋馬)에 살던 사람들과 같은 부족이 요하 동쪽에 새운 나라란 뜻이다. 왕자 호동이 옥저땅에 사냥을 나갔다가 최리왕을 만났다. 최리(崔理)의 낙랑국은 고구려와 부여 (扶餘), 동옥저, 개마국, 갈사부여 와 같이 요양 (遼陽)에 가까이 있었다는 증거다.
유리왕의 손자 호동(好童, ? ~ 32년)왕자가 4월에 사냥을 나갔다가 가벼운 차림으로 봄나들이 나온 낙랑왕 최리(樂浪王崔理)를 만났다 . 사냥 나온 왕자가 봄나들이 나온 최리 보다는 더 먼 거리에 살았다. 그 들이 만난 곳은 최리왕의 영역 이였다. 이를 삼국사기에는 옥저 (沃沮) 라고 했다. 동천왕이 도망가서 살아났던 동옥저 (東沃沮)에 갔다는 뜻이다. 진수는 “동옥저가 한 때는 환도성 관하의 현”이였다고 했다. 지리 지형을 고려해 보면, 호동왕자가 고구려의 수도 였던 요양일대에서 남쪽으로 요동 반도에 갔었다 . 사냥하러 만주에서 평양으로 갔다 또는 봄 나들이를 한반도 평양에서 만주로 갔다고는 볼수 없다. 최리가 다스리던 낙랑은 요동반도에 있던 동옥저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 곳을 진수는 예맥전에 실었다. 낙랑본통한국(樂浪本統韓國)이라고 기록한 진한(辰韓)땅에 역계경 (歷谿卿)이 2000가구를 인솔하고 우거왕이의 수도였던 조양을 떠나 요하를 건너 도착했던 진국(辰國)이다. 이낙랑본통한국(樂浪本統韓國)이라고 한 곳은 옛적부터 여러 가한들이 주오국가를 이루고 살던 한의 땅(韓國)이란 뜻이다.
최리의 선조가 갈석산 유역에서 요동만을 건너 요동반도에 정착하여 옛 고향 이름을 따서 낭랑(樂浪)이란 나라 이름을 지었다고 본다. 그의 선조가 요동반도에 온 시기는 낭랑이라는 이름이 나온 후에 뱃길로 요동반도로 왔다. 삼국지 동옥저전 에 따르면,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요동반도에 살았다. 그들을 진한 (辰韓)사람 이라 했고, 옛적에 역계경이 인솔하고 온 사람들이 그들이라 했다 . 그 곳 사람들 (辰韓者)은 낭랑 사람들(樂浪人)을 아잔 이라 했는대, 그 뜻은 자기들이 떠나 올때 남겨 놓은 사람들(樂浪人爲阿殘)이라고 했다 . 진수는 이 곳을 설명 하면서 “부종사오림이(部從事吳林以)란 문구”를 남겼다. 옛부터 모두 많은 한이 다스리던 땅(樂浪本統韓國)에 있던 진한 범오십여국(凡五十餘國)중에 여덟 나라를 나누어 낙랑과 같이 만들었다”고 했다. 최리왕은 고구려에 항복 했었지만 다른 부족 국가들이 반항하여 대무신왕이 낙랑을 5년 간격으로 두차례 정벌 했다. 그 여파로 멸망한 낙랑의 유민 5000명이 신라로 투항하니 그들을 나누어6부에 살게 했다 . 당시 신라 (新羅)는 요동만 북쪽 연안에 있었다. 이 문제는 “낙랑본통한국 (樂浪本統韓國)”편에서 깊히 다루기로 한다.
동호에게 피살당한 비왕의 아들 준(侯準)이 위만의 기습작전에 패하여 뱃길로 도망을 갔다는 곳, 즉 요동 반도다. 그와 만주사람들이 한동안 왕래가 있었다가 후에는 교류가 두절 되였다니 그들이 더 멀리 떠나 갔다고 본다 .
끝.
February 16,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