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을 찾아야 올바른 해결책이 나온다. 재야 사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한국 상고사가 잘못 되였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지만 아직도 그 해결책은 고사하고 그 원인조차 밝혀 지지 않았다. 많은 강단 사학자들은 그 원인(原因)을 “사료의 부족”이라 한다. 이는 외세에 의한 문헌의 분실이든, 기록을 하지 않았던, 또는 있었으나 그 뜻 풀이를 할 수 없어 정리 하지 않았다는 등의 해석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시야를 넓혀 놓고 보면 앞에 말한 이유는 “근인, 近因, a proximate cause” 이고 그 보다 멀리서 그러한 일이 생기도록 유도한 “원인, 遠因, 간접적 原因”이 있다. 우리가 쓰는 “간접적 원인”이 인과관께를 놓고 보면 원흉이다. 이를 영어로 표기하면;
There are two levels of causality to consider: proximate that is an immediate historical event and ultimate (deeper evolutionary motives.) 의사가 최종적으로 사망 진단서를 작성 할 때는 이렇게 둘로 나누어 표기 한다. 깊이 잠겨있는 원인 (原因, ultimate and deeper evolutionary motives)을 올바로 이해하여야 동양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고 그래야 한국 상고사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본다.
동양이 온 세계에 알려진 근거는 한자 해석을 통해서 알려 졌다. 그 문헌은 중국 사람들이 작성 했었고, 그들이 풀이한 한자의 뜻(훈고학, 訓詁學, Chinese Hermeneutics)을 그대로 받아 드려 동양의 많은 고전은 세계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다. 이 과정에서 역사서까지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해석해 왔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한자라는 그림 글씨는 다른 사람의 의견이 조금도 개입되지 않은 “중국쪽 의견만이 들어 있는 그림이고, 후에도 그들의 증언만을 듣고 그들이 그린 역사 그림을 비판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직책상으로 사가는 같은 사건을 놓고도 자기에게 유리하게 그려야 했다. 사가 (史家)는 모두 “역사서는 사실만의기록”이라 한다. 그럴 수가 없다. 역사서를 편찬한 시대의 가치관이 들어 있고, 그 글을 구성하는 글자 선택에는 글 쓴 사람의 감정이 깊이 반영 되여 있다.
춘추 전국시대이후 중원이 하나로 통일된 이후에서, 특히 사마천의 사기에서 부터는 중국의 모든 역사서가 중국 황실의 구미에 맞게 서술 되였다. 사기의 많은 부분은 사마천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한 무제가 중국영토를 넓힌 시대를 그려 놓았다. 그는 좌씨 춘추와 같은 그전의 역사 기록을 한 무제 당시 실권을 장악 하던 신흥 유교사상(Neo-Confucianism)에 따라 최초의 공식 역사서를 편찬 했다. 옛 문헌의 내용은 때때로 글자를 바꾸 사기에 기록 하였고, 변두리 이방인의 말을 한자로 기록 하거나 때로는 그 말의 뜻을 따라 그와 비슷한 한자를 선택 하여 기록 하였다. 사기에 담긴 한자 선택은 사마천의 주관이었다. 이를 영어로 표기 하면 사기에 적혀 있는 많은 글자가 “Phonetic Loan Character (PLCs)”나 “Phono-semantic Matching Characters(PSMCs)라 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국 황실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이 하나로 되고, 이방인들이 살던 지역으로 영토를 넓히다 보니, 지역마다 말이 다르다는 점을 느껴 이를 우선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후한 시대에 방언 (方言)이 만들어 졌고, 그와 같은 맥락에서 그들의 사전, 이아(爾雅)를 만들었다. 예부터 전해오던 구전문학을 기록으로 남긴 시경 (詩經) 이외에 중국이 통일 되기 전에 작성된 모든 고전을 풀이 하려니 그 문헌 속에 나타난 여러 글자의 해석이 분분했다. 이를 종합적으로 “하나의 중국” 이란 틀 안에 넣을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야 했다. 이 작업이 곧 중국 사람들이 개발한 훈고학 (訓詁學) 이다. 동양 고전 연구의 기틀이 되는 이 세 부류의 서적은 중국 사람이 만들었다. 이방인은 그 풀이를 따라야 했다. 한국은 물론 하고, 전 세계에서 동양을 연구하는 학자들 (Sinologist) 이러한 개념 속에 작성된 중국문헌을 아무런 비판 없이 원문 출처로 인용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한국 상고사는 올바른 해석이 나올 수가 없었다.
강력범죄 사건을 다루는 형사는 현장을 세밀히 기록으로 남겨야 하고, 최선을 다하여 여러 증인을 찾아야 하고 그들의 의견을 근거로 종합 정리하여 재판장에 제출해야 한다. 이러한 절차가 아직 없었다는 점이 한국 상고사가 잘못 알려진 첫째 원인이다. 같은 한자 문화권에 살면서, 일본 사람들이 쓴 일본의 역사는 비판 하면서, 중국 사람들이 편찬한 한자로 기록된 여러 문헌을 냉정하게 읽고 판단하는 관습을 기르지 않았다. 특히 역사서는 중국 사람들이 풀이한 그대로 받아 들였다. 즉 사서 (史書)의 비판, 분석, 숙독(Critical thinking, Analysis, and critical reading)이 없었다는 점이 그 둘째다. 한국민족이 살아온 지정학적 여건을 고려하면 한국 역사를 이렇게 사리에 합당하게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볼수도 있으나, 같은 입장에서도 속세를 떠나 수도생활을 하던 스님들은 불교 경전을 받아들일 때는 상당한 정도의 비판과 숙독이 있었다. 이를 보면 지정학적으로 한국이 독자적인 역사관을 새워 한국 상고사를 편찬할 정서적 기틀이 약해서였다고 분수 밖에 없다. 모화사상 (慕華思想) 에서 중국 황실사관을 그대로 지켜온 결과라 본다. 시대는 바뀌었다. 인력과 제력은 충분하다. 강단 사학계의 정서가 문제다. 새로운 시각에서 이러한 점들을 깊이 검토하여 우리의 상고사를 되찾는 작업 (Critical Editing of Ancient Korean History)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복원 했다면 “그게 어떻게 역사서가 된단 말인가 소설이지” 하고 반문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역사 에 관한 글 (Historiography) 이란 “자연의 법칙 (진리)을 찾아 “옳다 그르다, Right or Wrong”로 평가되는 학문이 아니다. 역사서는 그 글이 합당 한가 아닌가 (Reasonable, acceptable, proper)로 평가될 수밖에 없는 학문이다. 어느 유명한 역사학자가 쓴 글이고 어느 집권자가 인정 했다고 하여 그를 정사 (正史)라 받아 드릴게 아니라, 어느 누구의 역사서든 합당성(合當性)이 있는 글이 정사 (正史)가 될 수밖에 없다. 논란이 되는 “국정역사교과서”란 말은 옛 중국 “황실에서 인준한 역사기록이 정사다”하는 고정 관념에서 나온 말이다. 집권층의 가치관을 살리려는 뜻이다. 역사기록은 그 글을 쓴 사람의 가치 판단에 따라 그가 그려 놓은(가미한, editing한) 작품이다. 마치 유명한 그림을 여러 미술평론가가 저 나름대로 설명한 ‘미술 비평서’ 와 일맥상통 한다.
짧게 역사서의 특성을 요약해 보았다.
역사서라는 문헌을 구성한 “한자의 발생과 변천” 과정을 보자.
갑골문에서 보듯, 한자는 그림 (schematic drawing)에서 시작 되였다.
흔히 말하는 육서(六書)란 후한시대 작성된 설문해자 (說文解字)에 자새 하게 나타난다. 앞에서 거론한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설명 하려든 결과다.
상형(象形) 과 지사(指事)란 말의 뜻은 한자는 상형문자라는 뜻이다. 이 방법이 기초가 되어 그려 놓은 그림을 이리저리 합쳐서 여러 글자를 만들었다. 이를 회의(會意) 그리고 형성(形聲)이라 한다. 이 네 가지 분류 (four categories) 까지는 합당하다. 그 뒤에 나오는 5)전주(轉注, phonetic loan characters)와 6)가차 (假借, derivative cognates)라는 두 설명은 합당성이 없다. 이 두 부류가 현대어문학에서 쓰는 외국어의 소리를 한자로 기록한 글자 “Phonetic Loan Character (PLCs)”와 소리나 뜻을 따라 그와 비슷한 한자 “derivative cognates , that is Phono-semantic Matching Characters(PSMCs)로 적었다는 풀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누구나 인정하는 “잘못 읽거나 적은 예,Typo”, 피휘가 작용 한다. 이는 “오자 오기”를 빙자 하여, 사관이 고의적으로 그렇게 바꾸어 적었다고 분수 있는 근거가 여러 곳에 나타난다. 삼족오, 새, 제비, 상나라와 관계가 있다는 현조 의 관계가 강희자전에 실린 다음문구라 본다.
“按《說文》本作乙。燕乙乙,鳥也。齊魯謂之乙,取其鳴自呼。象形,重文作鳦。互見乙字註。燕.”
때로는 글 쓰던 사람의 멋 (aesthetics)과 이상이 담겨 있다; “春曰蒼天,夏曰昊天,秋曰旻天,冬曰上天.” 동양적 미덕에서 함구무언(緘口無言) 즉 묵비권(默秘權)을 쓰기도 했다. 뚜렷이 있었던 사실을 어느 사가는 그가 집필한 史書에 아예 적어 넣지 않았다. 사마천이 글자를 선택 할 때나 그 후의 모든 사서를 보면, 우리 역사와 관계되는 부족이름은 비하하여 묘사 하고 기록 했다. 이렇게 얽히고설킨 잘못된 자료를 중국 사람들이 그려놓은 글자대로 풀이 하다 보니 앞뒤가 틀린다. 첫 단추부터 잘못 귀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동양 역사서의 시발점부터 마지막 황제 가 다스리던 시대까지를 기록한 중국정사 (中國正史)라는 이십사 사(二十四史)를 살펴보자. 그 첫째가 되는 사마천의 사기는 그 존재가 알려진 직후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였다. 글자를 바꾸고, 첨부 했다. 그가 무게를 두고 기록한 전한(前漢, 西漢)시대의 기록은 한 무제 당시에 급성장 하던 새로운 황실 위주의 유교학파 (Neo-Confucian School)가 받아 드릴 수 없었다. 한서 (漢書)와 전한기(前漢紀)가 더 많이 인용 되어져 왔다. 그 후에 모든 사서는 후대에 비판의 대상이 되여 왔다. 특히 남쪽과 북쪽 세력은 서로의 사서를 비판 해 왔다. 이 상반되는 증언이 우리 상고사를 올바로 불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청대에 한족 학자 대진 (戴震) 은 건륭황제 (乾隆皇帝)의 임명을 받아 사고전서 (四庫全書) 편찬에 관여 했고 맹자자의소증 (孟子字義疎證)을 남겼다. 이를 철학적 관점에서 옛 문헌을 비판한 글이라 하지만 그 속에 글자 하나하나의 풀이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알려 주고 있다. 그러한 여파는 청조 말기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년) 이후에 북경대학 교수들이 옛 역사서를 비판 하는 학술지를 발간하면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글자 풀이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남북조 시대 (南北朝, 420- 581)에 편찬된 안씨 가훈 서증 (顔氏家訓 書證)편에 많이 나온다. 옛적 문헌에는 “PLCs”와 “PSMCs”를 많이 사용하여, 서주(西周) 초기부터 글자를 잘못 풀이 했다는 지적이 많이 있다; “보/포甫자”란 남자란 뜻을 듣기 좋게 부르 뜨의 표현이 였는데, 이를 사음대자로 잘못 알고“아버지와 아들”이라 풀이한 옛 문헌이 많다고 했다. “甫者,男子之美稱,古書多假借為父子.”
이 안씨가훈 서증에 처음으로 왕검(王儉)이란 글자가 보인다. 이 문장의 풀이는 논란의 대상이 되나, 서진이 남쪽으로 옮겨간 이후에는 왕검(王儉)에 관한 기록이 모두 가짜라고 설명 했다. “王儉四部目錄,不言姓名. 南方以晉家渡江後,北間傳記,皆名為偽書.” 하북지역에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왕검(王儉)이란 명칭이 일반에 전해 내려왔다는 증거다.
이렇게 한국 상고사와 관계가 깊은 자료는 감추어지거나 소멸 되였다. 그 원인부터 찾아보아야 갰다는 생각에서 필자가 이를 찾아보았다. 여기 한국 상고사 복원에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
壇君王儉.藏唐京,국경선 패수(浿水)는 산해관을 지나가는 大石河다. 그 하구를 연수라 했다. 그 곳에서 연태자 단이 죽었다 하여 太子河라 했다.
2015년 10월 12일.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