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영토-9-4-5: 한사군
9-1: 서론
필자가 받아 드리기에는 거북한 한사군 (漢四郡)이란 키워드를 오늘 날짜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에 실린 내용을 근거로 인용한다. 그 내용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 할수 없는 결론을 되풀이 하여 설명”하고 있다. 필자의 역사관에서 옛 사료를 종합 분석 판단한 관점과 비교 검토해 주시기 바란다.
한사군 (漢四郡)오래 전에 조국을 떠나 “한무제가 우거왕을 정복하고 그 지역을 통치 하려고 설치 했던 군정 통치소 4곳”을 중국사람들이 만들어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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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중국황실이 임명한 사관이 천자위주의 통치체제를 제창한 신흥 유교사상 에 입각하여 옛 기록을 글자 풀이에서 부터 문맥 풀이, 문장 작성”을 하여 동북 아시아 상고사가 이모양 이꼴이 되였다는 가설을 새우고 이를 증명하려고, “古朝鮮 찾기”의 발생지를 찾아 시대를 따라 변해온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한사군이란 “이름 부터 그 영역이 한반도에 까지 이르렀다”는 내용은 중국 사람들이 중국황제 위주의 역사관에 따라 편술된 기록이라 한국사람의 역사관으로 이 문제를 냉정하게 분석 정리하여 옳바른 동북아시아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 사마천이 “조선이 안정 되여 4군으로 했다”는 뜻을 사기 여러 곳에 남겨 놓은
사군(四郡)이란 문구와 같이 “그 지역 동서 남북 전역을 4로 표시한 사방”과 같다 . 같은 맥락에서 상서에 동서남북 을 4악(四岳) 사리 (四夷)이라 했다. 이를 제왕의 통치 전역이란 뜻이라, 사마천은 한무제 통치 전역을 4해(四海)라 했다 .
한서에서 시작 된 한사군(漢四郡)이란 이름을 살펴 보면 우거왕이 다스리던 방 사천리 땅을 뜻했다. 그 땅이 “발해만 서쪽 해안을 따라 왕검성에 이르던 옛 통상로에 있던 지명”이다. 사마천의 조선 열전은 그가 사관으로서 임기중에 완료 되였고, 우거왕의 중신들에게 작위를 주고 그들이 죽거나 살해 되기 까지를 사기에 실었다 .그러나 당시 황실 사관으로 전쟁을 목격한 사마천은 사기에 “마땅히 실려 있어야 할 현토(玄菟) 낭랑(樂浪)하는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장수왕이 세워 놓은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낭랑(樂浪)과 현토 (玄菟)란 글자가 없다. 아무도 그 이유를 밝히려 노력한 근거가 아지도 보이지 않는다.
고조선의 후손들이 들고 일어나 대흥안령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중원 세력의 핵심이 였던 사마중달의 후손이 새웠던 서진(西晉, 265년-316년)을 강남으로 밀어 버리고, 대흥안령 동쪽에 살던 사람들은 광개토대왕에 이르러 고구려가 남만주에서 발해만 일대를 통치하게 되였다. 뒤를 이은 장수왕 (長壽王, 재위:
412년-49년)에게는, 동진안제(東晉安帝) 사마덕종(司馬德宗, 396년-418년)이 고구려국왕 낙안군공(高句麗王樂安郡公)이란 칭호를 주었다. 살펴 보면, 낙안군 (樂安郡)이란 이름은 옛적부터 산동성 서북부에 있던 이름이다 . 장수왕이 산동반도 서남부를 통치 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기록에는 이 낙안군공 (樂安郡公)이란 글자가 낙랑군(樂浪郡)의 오기라 한다 . 중원 황실에서 하사한 글자가 잘못된 글자라니 받아드리기 어려운 설명이다.
한무제가 중국의 영토를 확장 시킨 이후에는 옛 고전에 실린 글자 풀이를 다시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였다. 시경과 상서에서부터 춘추좌전을 비롯한 방대한 사료를 다시 정리하는 작업이 오랫동안 계속되였다 . 자연물이 풍부했던 머나먼 낙원땅을 정복한 중원 세력은 온갓 방벙을 다하여 그들의 야욕을 지키려 했다. 이러한 동기에 따라 시작된 한무제의 조선정벌 전쟁부터 마지막 “한나라의 군현(漢之郡縣)하에 있던 지역”을 삼한의 후예들이 통치하기 까지 4세기 동안의 역사는 복잡하고 방대한 문제다. 이허렇게 시작된 중원의 팽창 주의를 삼한의 후예들이 합심하여 그 진실을 밝혀야 한다. 필자는 이 지면을 통하여 핵심이 되는 몇몇을 간단히 다루기로 한다.
끝
January 11, 2017
한사군-2
한무제는 왜 우거왕 영역을 친입 했나?
필자는 “古朝鮮 찾기. In Search of Old Joseon” 에서 한무제가 조선을 침입한 이유가 고조선의 제물이 탐나서 전쟁을 했다는 새로운 주장을 내 놓았다.
한무제 때에 이르러, 본래의 공자 가르침을 따르던 유학파는 진시황 말기에 참혹한 핍박을 받고 나서, 공자님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충서(忠恕)의 충자를 “집권자에게 절대 복종하라는 뜻”으로 풀이한 신흥 유학파 (Neo-Confucianism)가 등장 했다 . 이들이 한무제 조정에 들어가, 옛 부터 전해 오던 봉건제를 해체하고, 진시황 일인 통치의 기반을 목적으로 출발된 군현제를 시행하며 많은 국책 사업을 벌렸다. 이들이 황제 중심의 중화 사상을 확립 시켰다. 주변의 이민족이 사는 지역은 “그 지방 줄신의 지도자에게 황제 명으로 벼슬”을 주어 다스리는 옛부터 전해 오던, 정복하기 전의 술책을 멀리 떠러진 지역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인용 했다.
조선을 공략하기 전해에는 누선이라는 높이가 십여장(十餘丈)이나 되는 큰 배를 만들어 동월를 정벌하고 다음 해에는 옛부터 낙원이라고 알려진 고조선 땅을 정벌할 께획을 꾸려 친입했다. 성선설을 주장하던 유학파가 “부여 (夫餘)의 제물을 갖고자 함이 인간의 욕망”이라고 한 순자(荀子)의 성악설을 인용한 이율 배반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
필자는 조선열전을 읽고 전쟁의 원인을 다음과 같다고 “古朝鮮 찾기”에 기록했다 .
“첫 쩨; 한나라 사람들을 유혹해 드려 그 수가 점차로 많아 젔다.
두 쩨; 한나라에 입조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세 쩨; 진번 주위에 있는 여러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만나려 했스나 그를 막았다.
한서에는 이 “진번 주위의 여러나라들”을 “진번, 진국” 이라 하였고, 뒤 후한서 에서는 이 곳을 진한이라 했습니다. 하여 진한이 한반도 끝에 있었다고 주장 한다.
네 쩨; 옹안불통; 擁(雍)閼不通” 이라, 즉 여러마을 지도자들 (남녀 제사장)과도 친밀히 지나지 않았다. 옹안을 남녀 무당이라 풀이함이 옳다고 본다 .
다섯 쩨: 오팽이라는 잉여 무기 수출 상인들이 만주로 올라가 이권을 챙겨 풍파가 났다. 우거왕이 이들의 제안을 받아 무기를 수입하고 중원에서 시행되는 일인 독제정치 체제를 실시했다고 본다.
여섯 쩨: 꿈에도 그리던 머나먼 낙원 요녕(遼寧)땅에 길이 틔여 갑까기 인구가 증가 했다는 중국사람들의 주장은 아전인수격으로 넓은 땅을 점령 했다고 풀이 했다.
일곱 쩨: 염사치 사건이 발생 했다. 중국사람들이 나무를 짜르러 왔다 잡혀 노예로 일한다고 했다. 천연자원을 수탈해 갔다 .
이를 종합해 보면 무역 통로를 차단 했다는 점이 큰 이유였습니다.”
가라국(加羅國)이 신라 와 같이 발해만 서안에 있었다
이 이외에 새로 나타난 뚜렸한 증거가 남제서(南齊書)에 실린 문구다 .
1.여기에 실린 글자들; 원이 합화 (遠夷洽化)와 삼국지 변진전(三國志 弁辰傳)에 나오는 여러 나라 이름”과 “발해만 연안에 살던 사람들의 언어와 풍속이 같다 (言語法俗相似)는 점 등”을 고려 해 보면 “가라국왕 가지(荷知)”의 성 “가 荷, hé hè kē hē”는 해(解, 奚, 太陽, 日, sun) 씨의 다른 사음자다. 모시정의에서도 “모(毛)자가 하어(何語) 다 아니다” 하는 시비가 오래 있었다고 한다. 이 글자 또한 해의 다른 사음자라고 필자는 풀이 했다.
아라가야(加羅阿羅, 阿羅國)가 발해만 서안에 있었다는 증거가 삼국지 관구검전에도 실려 있다 . 천진 방면에서 산해관을 지나는 길목, 발해만 서안, 즉 청구(靑丘)에 있었다.
그가 관구검이 옛적에 실패 했던 “공손연을 토벌하는 작전에 참여하여 성공하고 뒤 이어 고구려 국내성 친입의 길”을 열어 주었다. 이 곳에 있던 “아라가야가 (阿羅國)”의 지도자는 우부평 오환 선우 구루돈(右北平烏丸單于寇婁敦)의 동생 아라반(弟阿羅槃)이다. 글자 반(槃)은 변한(弁/卞韓) 의 변으로 발음되는 다른 글자로 썼다. 이 곳에 변산(卞/弁/山)이 있었다. 이 곳이 천진 일대다. 변산 지역이 지금은 반산(槃山)공원이 되였다.
2.사기 조선열전을 그대로 인용한 한서 편찬자가 찬(贊曰)하기를 처음에 조선에 협상하러 갔던 섭하 (涉何)가 국경선 까지 배웅 나온 조선의 비장을 죽인 이유가 직접 원인이라 하지만, 더 큰 원인은 한무제 조정에서 정책을 잘못 실행했다. 그 뜻을 은유법을 인용하여, 춘추에 실린 “관중이 제 환공에게 한 조언”을 예로 들어 설명 했다 .
3.전쟁 후에 나타난 수탈작전이 염사치 (廉斯鑡) 사건이다 .
삼국지에 실린 오림이 낭랑(吳林以樂浪)이 원주민을 속이다 탄로가났던 사기극이다. 이 두 사건은 “낭랑 평양설”의 근본이라 뒤에 깊히 다루기로 한다.
4.전후에는 많은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 갔다. 그 잔학상이 두고두고 여러 시문에 나타났다.
5. 우거왕의 중진들이 투항하여 봉작을 받았지만 “한의 참혹상을 보다 못해” 반항 세력에 가담하려 했지만 모두 2-3년후에 직위를 탈퇴 당하거나 처형 되였다.
그 당시 목격자 사마천이 쓴 조선열전을 숙독해 보면, 한사군은 발해만 서쪽 해안을 따라 조양에 이르는 옛부터 있었던 를 한나라 군사가 점령지역의 난민들을 통치 하기위하여 설치 했던 4게의 군영(軍營)이다 .
끝
January 12, 2017
한사군-3: 한의 군현(漢郡縣) 설치
조선 열전을 복사 하여 설명한 한서에 처음으로 지금까지 인용 하고 있는 “진번 (真番)、임둔(臨屯)、낭랑(樂浪)、현토 (玄菟)하는 사군(四郡)의 이름”이 나타 났다 . 같은 한서의 천문지에는, 점을 친 괘에 따라 시행하여 “조선을 벌하고 낭랑 현토(樂浪, 玄菟郡)두 군을 설치했다. 조선은 바다에 있다. 북방에 사는 호(胡)지역을 이긴다는 점괘다”라고 했다. 다시 점괘에 따라 3년 후 추운 정월에 요동성과 현토성을 쌓았다 . 한나라의 행정 구역을 설명한 지리지에는 단지 낭랑(樂浪)과 현토 (玄菟) 두 군이 옛적 진시황의 동북지역에 새로이 나타났다. 진시황의 땅을 물러 받은 한고조 때에 동북지역에는 앞서 1월 6일에 올린; “진말 한초의 혼란 시대. 8-1 개요”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발해만 연안 까지를 완전히 통치 했다는 증거가 미약하다. 그에 실린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인구 이동에 반대 현상이 일어 났다. 남만주에서 난리가 나면 발해만 서쪽을 따라 남쪽으로 연나라와 제나라 땅으로 내려 왔다. 우거왕 영역에 살던 조선의 피난민들은 이렇게 남쪽으로 내려와 발해만 서안에 내려와 이곳이 낙랑군의 남단이 되였다. 이를 천문지에서는 “조선 땅에 2 군을 정하니 조선은 바다에 있었다”고 했고, 2 군은 “한무제 때 설치 했다. 모두 조선, 예맥, (고)구려의 만이가 사는 곳”이라고 했다 . 낭랑군에 속했던 군현 이름을 보면 뚜렸하다. 좌장군이 조선을 정벌하여 임둔(臨屯)을 열으니 피란민이 많이 내려와 연과 제가 예맥(穢貉) 으로 휩싸였다는 기록이 염철론에 있다 . 피난민들이 옛적에 창해군이 있던 곳에 내려 왔다는 뜻이다. 이리 하여 낭랑군의 여러 현이 갈석산 남쪽 발해만 서남 연안에 있었다.기자가 상나라 유민을 이끌고 조선 땅(요동)에 갔다는 시대부터 한무제가 조선을 멸망하고 군현을 설치 할때까지의 인구 이동을 종합해 보면, 예맥족은 산동성에서 발해만 연안을 따라 육로로 뒤에는 해변 뱃길을 타고 남만주 서남쪽과 계속하여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서는사마천이 남긴 4군(爲四郡)의 뜻을 따라 4개의 이름을 체우려고 “정보의 원조가 되는 사기(史記)에 없던 현토와 낭랑을 새로 만들어 한의 네 군현”이라 했다. 후한말기에 요동에서 북쪽으로 도망가서 원주민의 협조를 받아 남만주에 웅거 하며 발해만 일대를 휘드르던 공손강(公孫康)이 후한 마지막 황제 시절(漢献帝, 建安中; 196년- 220년)에 낭랑군 남쪽을 잘라 대방군(帶方郡)을 새로 만들었다 . 바로 이곳에 옛적 진번과 임둔이 있던 지역이 된다. 후한서는, 예군 남여가 인솔한 피난민촌인 창해군과 조선을 같은 사람들로 보았다. 조선을 멸하고 낭랑, 임둔, 현토, 진번 4 군을 설치 했다가 기원전 82년 (昭帝始元五年)에 “임둔과 진번”이 낭랑에 통합 되고 현토는 다시 고구려로 너머갔다 . 한서지리지에 임진과 진번이 없스니, 낙랑 현토에 실린 현이름은 이후에 시행한 국세조사 기록이라 본다.
이와 같이 “한사군”에 관해서는 처음부터 중국 사람들이 모호하게 기록에 남겨 의혹이 많이 생겼다. 사기에 실린 4군(四郡) 의 관활 영역은 “옛 조선 땅 이외에 피난민들이 밀려온 옛 요동 땅, 연과 제의 일부”도 포함 되였다. 이러한 사실을 후세 중국 사관들이 되도록 (한의 군현이 중원에서) 멀리 떠러저 있던 곳이라는 뜻으로 조선열전에 실린 본문의 뜻과 음을 이리저리 돌려 기록에 남겼다. 이러한 중국문헌 을 인용하여 편집된 일본과 한국의 사서 (史書)에 나타나는 대방 (帶方) 낭랑 (樂浪) 현토 (玄菟)의 실체는 더 알수 없이 되여 갔다.
끝
January 14, 2017
한사군-3: 한의 군현(漢郡縣) 설치
조선 열전을 복사 하여 설명한 한서에 처음으로 지금까지 인용 하고 있는 “진번 (真番)、임둔(臨屯)、낭랑(樂浪)、현토 (玄菟)하는 사군(四郡)의 이름”이 나타 났다 . 같은 한서의 천문지에는, 점을 친 괘에 따라 시행하여 “조선을 벌하고 낭랑 현토(樂浪, 玄菟郡)두 군을 설치했다. 조선은 바다에 있다. 북방에 사는 호(胡)지역을 이긴다는 점괘다”라고 했다. 다시 점괘에 따라 3년 후 추운 정월에 요동성과 현토성을 쌓았다 . 한나라의 행정 구역을 설명한 지리지에는 단지 낭랑(樂浪)과 현토 (玄菟) 두 군이 옛적 진시황의 동북지역에 새로이 나타났다. 진시황의 땅을 물러 받은 한고조 때에 동북지역에는 앞서 1월 6일에 올린; “진말 한초의 혼란 시대. 8-1 개요”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발해만 연안 까지를 완전히 통치 했다는 증거가 미약하다. 그에 실린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인구 이동에 반대 현상이 일어 났다. 남만주에서 난리가 나면 발해만 서쪽을 따라 남쪽으로 연나라와 제나라 땅으로 내려 왔다. 우거왕 영역에 살던 조선의 피난민들은 이렇게 남쪽으로 내려와 발해만 서안에 내려와 이곳이 낙랑군의 남단이 되였다. 이를 천문지에서는 “조선 땅에 2 군을 정하니 조선은 바다에 있었다”고 했고, 2 군은 “한무제 때 설치 했다. 모두 조선, 예맥, (고)구려의 만이가 사는 곳”이라고 했다 . 낭랑군에 속했던 군현 이름을 보면 뚜렸하다. 좌장군이 조선을 정벌하여 임둔(臨屯)을 열으니 피란민이 많이 내려와 연과 제가 예맥(穢貉) 으로 휩싸였다는 기록이 염철론에 있다 . 피난민들이 옛적에 창해군이 있던 곳에 내려 왔다는 뜻이다. 이리 하여 낭랑군의 여러 현이 갈석산 남쪽 발해만 서남 연안에 있었다.기자가 상나라 유민을 이끌고 조선 땅(요동)에 갔다는 시대부터 한무제가 조선을 멸망하고 군현을 설치 할때까지의 인구 이동을 종합해 보면, 예맥족은 산동성에서 발해만 연안을 따라 육로로 뒤에는 해변 뱃길을 타고 남만주 서남쪽과 계속하여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서는사마천이 남긴 4군(爲四郡)의 뜻을 따라 4개의 이름을 체우려고 “정보의 원조가 되는 사기(史記)에 없던 현토와 낭랑을 새로 만들어 한의 네 군현”이라 했다. 후한말기에 요동에서 북쪽으로 도망가서 원주민의 협조를 받아 남만주에 웅거 하며 발해만 일대를 휘드르던 공손강(公孫康)이 후한 마지막 황제 시절(漢献帝, 建安中; 196년- 220년)에 낭랑군 남쪽을 잘라 대방군(帶方郡)을 새로 만들었다 . 바로 이곳에 옛적 진번과 임둔이 있던 지역이 된다. 후한서는, 예군 남여가 인솔한 피난민촌인 창해군과 조선을 같은 사람들로 보았다. 조선을 멸하고 낭랑, 임둔, 현토, 진번 4 군을 설치 했다가 기원전 82년 (昭帝始元五年)에 “임둔과 진번”이 낭랑에 통합 되고 현토는 다시 고구려로 너머갔다 . 한서지리지에 임진과 진번이 없스니, 낙랑 현토에 실린 현이름은 이후에 시행한 국세조사 기록이라 본다.
이와 같이 “한사군”에 관해서는 처음부터 중국 사람들이 모호하게 기록에 남겨 의혹이 많이 생겼다. 사기에 실린 4군(四郡) 의 관활 영역은 “옛 조선 땅 이외에 피난민들이 밀려온 옛 요동 땅, 연과 제의 일부”도 포함 되였다. 이러한 사실을 후세 중국 사관들이 되도록 (한의 군현이 중원에서) 멀리 떠러저 있던 곳이라는 뜻으로 조선열전에 실린 본문의 뜻과 음을 이리저리 돌려 기록에 남겼다. 이러한 중국문헌 을 인용하여 편집된 일본과 한국의 사서 (史書)에 나타나는 대방 (帶方) 낭랑 (樂浪) 현토 (玄菟)의 실체는 더 알수 없이 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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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14, 2017
한사군-4:한 군현의 어원
한서에 올린 이름을 어떻게 만들었나, 군현(郡縣)이름의 출처가 궁금하다. 그 지역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 왔는가를 먼저 알고 있서야 한다. 한무제의 친입부터 후한 말이후에도 중원 세력은 원주민을 통치하려고 최선을 다했고 수탈 했다.그 곳 원주민들의 상황을 진수 처음으로 자세 하게 삼국지 위서 30(三國志 魏書三十)에 “오환 선지 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을 만들어 지역을 위주”로 원주민의 모습을실었다. 원주민은 사방으로 흐터졌다.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 지네던 사람들끼리 모여 소읍 국가를 만들었다. 옛적에 가까이 지내던 같은 마을 사람들이 난리텅에 이산 가족이 되듯, 다른 방향으로 피신하여 영원한 이산가족으로 주어진 조건에 적은하여 갔다. 한 군현은 이렇게 원주민이 흐터저 소읍 국가를 이루고 사는 상태를 지역별로 나누어 크게는 두 세력이 서로 밀고 밀리는 통에 통치 영역 (한 군현)의 경계가 여러번 바뀌였고, 원주민은 중원으로 또는 한반도를 거처 일본 열도에 까지 흐터저 나갔다. 남쪽으로 갔던 사람들은 중원에 동화 되였다. 대흥안령을 너머 서북쪽으로 갔던 사람들은 “오한 선비 가비능전”에 싣고, 산맥 동쪽으로 피했던 사람들은 따로이 동이전(東夷傳)을 만들어 북쪽부터 “부여 고구려 읍루”를 싣고 남만주 발해만 연안에 살면서 뱃길을 따라 교류하던 사람들을 한 예(濊, 韓)로 분류했다. 이들이 흐터저 여러 곳에 산다는 예기를 듣고 이를 다시 “진한과 변진 왜인”으로 나누어기록 했다. 주로 뱃길로 교류했던 부족국가를 모아서 한의 군현에 실었다. 남만주지역 노인들의 예기를 들어 “요동 반도 동쪽에는 얼굴이 다른 사람들”이 산다는기록을 남겼고, 삼국지 이전에는 중원 세력이 요하를 건너지 못했다고 실토 했다 .뒤에는 기원전 209년에 흉노 모두선우가 대흥안령을 너머 “동호왕 비”를 살해 하던 때에 고조선 영역에 살다 한무제의 친입을 받고 대흥안령을 너머갔던 부족들과 동북쪽으로 피란 갔던 부족들도 간단히 다루기로 한다.
진번(真番) 임둔(臨屯):
진번(真番): 사마천의 서술을 보면 진번과 임둔은 국경선에서 멀리 떠러저 있지 않은 발해만 서안에 있던 마을이다.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통털어 만이 (蠻夷)라고 했다. 전한기 (前漢紀)에는진번(真番)을 정번 (貞番)이라 했고, 사마천 또한 같은 이름을 다른 글자 “真番, 真藩”로 기록 했다 . 설문해자를 보면, 그 곳을 반/판/번국(潘國)이라 했고 맥국(貉國) 가까이 있었다. 이 곳에서 여러 종류의 생선이 잡혔다 . 삼국지에서 “번한(潘汗)이 살던 지역을 경계로 했다”고 하고, 뒤에는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이 그물로 생선을 잘잡았다. 그들을 한인 (汗人)이라 했고, 나라 이름을 한국(汗國)이라 했다 . 후한서에서는 한(汗)을 왜(倭)자로 바꾸어 적었다 . 이곳이 연나라 진개가 조선을 친입하여 연나라 쌓은 성의 동쪽 끝이다. 연을 멸한 진시황이 쌓은 장성이 해안에서 끝나, 기조선 (暨朝鮮)과 경계를 이루었다는 곳이다 . 이를 논어, 동관한기, 일주서에서; “옛적 상나라 말기에 주 무왕의 형명 세력에 동참하지 않았던 3 주를 예기하던 곳이 바로 산동성에서 발해만 서남쪽 해안을 따라 갈석산 쪽으로 이어지는 곳이다”라고 남겼다. 목야전 이후에 삼감지란 (三監之亂)을 치루고 패한자들이 이통로를 따라 고조선 땅으로 올라 갔다. 제후국 한(韓)이 망하자 그 후손 장량이 창해역사를 시켜 진시황의 마차에 철퇴를 휘들렀다는 곳이고, 사기열전과 한시외전(韓詩外傳)에도 실린 명의 편작 (扁鵲)의 활동 무대였다 . 발해만 서남연안은 이렇게 태고적 부터 예맥족이 살던 곳, 기조선(暨朝鮮)이 있었고, 그곳에서 요수가 바다에 이른다 하여 발해만 서남 일대 해안을 기요해(暨遼海) 라 불렀다. 기조선(暨朝鮮)이 상(商)나라와 서주(西周) 시대 그곳에 있었다 .
이 지역을 여러 사음자로 기록 했다. 그 곳에 남제서 (南齊書)에는 산해관 너머에 살던 가라국 (加羅國) 왕이 한무제(기원전 141-기원전 87년)원년에 사신을 보냈다 . 이 나라 이름이 삼국지 변진전 (弁辰傳)에 나오는 구야국(狗邪國)이다.
한무제가 집권하고 안정되자 오팽 두 무기상인이 저선 땅에 드나들며 풍파를 이르켜, 역계경이 진국으로 갔고, 만여를 따라28만명이 옛 동로를 따라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창해군”이 생겼었다. 결국 위만조선이 한무제에게 패망하여 원주민은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 지네던 사람들끼리 모여 소읍 국가를 만들었다. 진수는 이렇게 원주민이 흐터저 소읍 국가를 이루고 사는 상태를 지역별로 나누어
삼국지 위서 30(三國志 魏書三十)에 실었다.
삼국지 변진전 (弁辰傳)은 변한(弁韓)과 진한 (辰韓)에 관한 설명이다. 그들은 “체격이 크고 왜와 진한 여러 나라와 접해 살고 언어가 유사 하다”고 했다 . 변진전에는 “변진을 형용사로 쓴 나라 이름”이 특히 많이 보인다. 같은 이름을 쓰던 나라가 다른 곳에도 있었다는 증거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따르면, 변진전
(三國志 弁辰傳)에 실린 사로국(斯盧國)이 신라 (新羅)의 옛 이름이다 .
신라와 가야연맹이 발해만 서쪽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또한 이지역을 기록 할 때는 사음자를 많이 썼고, 뒤에는 그 글자를 이리저리 돌려, 첫 찬술자의 진의를 찾기가 어렵게 되였다는 산 증거다.
임둔(臨屯)의 어원과 위치을 같이 다룬다 :
한서지리지에는 난하 하류 열구(列口)가까이 대방, 해명,소명, 둔유 (屯有)가 보인다 . 임둔군(臨屯郡)이 설문 해자에 나오는 동이현(東暆縣)에 있었다.
삼국지에는 “후한 말기 (漢獻帝 建安,196 – 220년)에 한과 예가 강성해 저서 (韓、獩強盛)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 (屯有縣) 남쪽을 잘라 대방군을 만들었다. 같은 내용이 태평어람에는 옛적 위지(魏志)에 근거하여,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마한(馬韓) 이라 했다 . 임둔군(臨屯郡)이 낭랑군 동이현(東暆縣)즉 소명 (昭明) 현에 있었다. 이 곳에 살던 마한 사람들이 뱃길로 용동반도로 갔고, 더 남쪽으로 대동강 하구에서 자리를 잡았고, 더 내려가 강화도에 살았다는 뜻을 “마한 서쪽에 있는 큰섬 호주 (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에 살면서 한반도 사람들과 배로 왕래하며 무역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마한 사람들이 왕성해 지자, 그들이 살던 땅에 쫒겨와 살던 공손도가 꾀를 내여 옛적부터 여러 한(汗•干•翰•韓•馯•邯 )이 다스리던 군소국가를 땅 진한(辰韓)을 여덟으로 나누었다 . 이 지역 낙랑은 옛부터 한들이 살던 땅이란 뜻으로 낙랑본통한국( 樂浪本統韓國)이라 했다. 낙랑을 설명 할때 다루기로 한다. 북해 연안에 여러 한들이 다스리던 작은 나라들이 있었고, 그들이 주름잡고 다니던 바다라 하여 발해연안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바다를 한해 (汗/韓/翰/瀚海)라고 했다. 뒤에는 한해 (翰/瀚海)란 표현을 “한반도 서해안 에서 일본 열도에 이르는 항로”를 뜻했다. 주로 발해만 서안에 살던 마한 (馬韓) 사람들이 해양권을 잡았다.
염철론에는 “좌장군 (순치가 우거왕을 정벌)이 임둔을 열어 난민이 내려와 연 (燕)나라와 제(齊)나라 땅이 온통 예맥사람으로 싸였다”는 기록이 있다 . 이는 “발해만 서남쪽 해안, 즉 하북성과 산동성 일대에 조선 피난민이 내려와 살았다”는 뜻이다. 하여 이 피난민 들도 통치의 대상이 돼였다.
무제 초기에 예군 남여가 28만 명을 인솔하고 요동에 내려와 창해군을 만들었다는 것과 똑 같은 현상이 같은 지역에 또다시 나타났다. 이를 보면 임둔(臨屯)이란 뜻은 옛적 상나라 시절에 기자를 따라 갔던 “산동성 임치(臨淄) 사람들이 올라가 자리 잡고 살던 곳”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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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17,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