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랑(樂浪)의 어원은 여러 방향에서 문헌을 살펴 보아야 그 참 뜻이 나타난다.
장소가 해변을 끼고 있어, 포유류를 포함한 각종 생선이 낭랑에 있는 번국(潘, pān pán fān pàn bō 國)에서 잡혔다 . 낭랑군에 “한무제 수군이 도착한 열구(列口) 현”이 있었다. 또한 조선, 대방,패수, 함자,수성현 등등 25현이 있었다 . 옛적 제후국 연(燕)의 영역을 설명하면서, 새로 빼았은 영토를 확장하여 낭랑과 현토 두 군을 연(燕)에 부속 시켰다 . 서한 말기에 양웅(楊雄, 기원전 53년- 기원후 18년)이 편찬한 양자방언(揚子方言)에 연조선열수지간(燕朝鮮洌水之間) 이라 한 곳이 한무제가 새로 빼앗은 땅이다.
설문해자에 있다는 동이현 (東暆縣)은 한서지리지에 실리지 않았다. 동이(東暆)의 상형 글자 “暆, yí/이/ 左:日,右:施”는 이(移,離,夷)로 발음하고, 뜻은 “날일 변에 기울 이”자로 해가 점점 기울어저 간다는 뜻이다. 광운에서도 “동이현이 낭랑에 있다”고 했다 . 글자 이(暆)의 뜻은 “해가 점차로 밝아 (日昭昭)진다”고 하나, 현 초절서에는 날일 변이 없는 글자(施)를 썼다. 한서에서는 동이현 (東暆縣)의 뜻을 따서 소/조명 (昭明)이라 적었다. 임유관 전투 (臨渝關戰鬪, 598년)에서 굴욕을 당한 수나라는 양제가 집권하자 총력을 다하여 대군을 끌고 요하 동쪽에 있던 고구려 수도 평양을 정벌에 나섰다. 스스로 200만이나 되는 전 군에 명령을 내렸다; 육군 전 12 군에 명하기를; 제 8군은 숙신도, 제 9군은 갈석도, 제 10군은 동이도 (東暆道) 제 11군은 대방도, 제 12군은 양평도(襄平道) 를 택하여 모두 평양에 집결하고, 수군은 창해 (滄海)를 가로질러 작은 섬들과 패강을 횅단하여… 하는 명을 내렸다 . 출발전으로 나온 지명은 모두 국경을 너머서는 갈석산 유역을 뜻했다. 그러나 한서 지리지에는 낭랑에 있다는 “邯縣, 東暆縣”두 현 이름이 없다. 이 두 현 “邯縣. 東暆縣 “이름은 사음자가 아닌가 한다고 영문본에 실었었다. 이 또한 필자의 학문적 미숙으로 저지른 잘못이다. 이 두 이름은 뜻과 음을 이리 저리 뒤 바꾸어 (PLCs, PSMCs)서 한무제 때에 한(漢)나라 사람들이 새로 만든 이름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설명과 지리지에 실린 현 이름을 종합 분석해 보면 “rǎn邯hán hàn縣”을 “俨(儼)邯”으로 적었다. 그 글자의 뜻은 “낸낸하고 잔소리 ()만 하던 나약한 지도자가 살던 마을”이란 뜻이고, 이를 사음 대자한 란한현(俨(儼)邯)은 “엄숙한(儼) 지도자 한(韓, 汗,甘, Khan)이 살던 읍(邯)이란 뜻이다 . 이 현이 조선(朝鮮)현과 패수(浿水)현 사이에 실렸다. 그 다음에 적힌 함자현(含資) 은 염사치(廉斯鑡)가 도착 한 항구가 있던 곳이다 . 삼국사기에 따르면, 수양제의 육군 우 12군이 함자(含資)를 지나 갔고, 당나라에서 소정방이 요동에 있던 고구려 수도를 공략 할 때 유덕민(劉德敏)이 지휘하는 군수물자 수송선이 함자(含資)에서 떠났다 . 진수는 염사치(廉斯鑡)가 함자 항구에 도착하고 배를 타는 장면을 남겼다 .
진한(辰韓)에서 떠난 큰 배가 발해만 서안 함자(含資)현에 있는 갈대밭이 우거진 큰 강에 정박했다. 낭랑군에 속했던 이러한 강은 “열수(列水, 洌水) 라고 부르던 난하 아니면 요수(遼水)라고 부르던 해하(海河) 입구가 되는 천진(天津)항”이라 본다. 한나라 수군이 도착 했던 “열구와 “패수, 대방”의 위치는 앞에서 설명 했다. 모두다 갈석산 가까이 있었다. 열구 아니면 천진(天津)이 함자항이 었다. 염사치(廉斯鑡)사건은 낭랑본통한국 (樂浪本統韓國)과 같이 “낭랑군 평양설”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는 뒤에 깊히 다루기로 한다. 이름들이 모두 삼국지 한전에 실려 있다 . 일찍 취소되였다는 임둔군(臨屯郡)이 동이현(東暆縣)즉 소명 (昭明) 현에 있었다. 대방군(帶方郡)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후한의 마지막인 헌제건안 (獻帝 建安,196 – 220년)중에 공손강(公孫康)이 낭랑군 남쪽을 잘라 만들어 발해만 서안에 잠깐 있었다.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다는 설은 “낭랑군 평양설”에 근거한 낭설이다.
염철론에 실린 바와 같이 전란 통에 옛 경계였던 패수 남쪽으로도 난민이 많이 내려와 이들도 통치의 대상이 돼였다. 한 무제는 조선을 정벌하고 반항하는 조선 사람들을 통치 하기 위하여 “왕검성이 있던 조양에 까지 이르는 국도를 따라 존제 했던 큰 네 마을”에 군영 (軍營)을 설치 했다. 남쪽은 옛 요동에서 부터, 임둔 진번 낭랑 하는 이름을 붙였고 그 다음 해에 옛 우거왕의 수도 영역에 현토군을 새웠다. 낭랑(樂浪)이란 이름은 갈석산 (碣石山) 일대에서 나타났고, 한의 낭랑군(漢樂浪郡) 은 발해만 서안을 따라 천진에서 부터 난하 하구, 산해관, 시황도, 갈석산이 포함된 지역을 통치 하기 위하여 설치 했던 행정구역을 뜻했다.
양자방언(揚子方言)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한무제가 새로 빼앗은 땅은 “연나나라 동북 끝에서 갈석산을 지나 조양에 이르는 난하 수계에 국한된 지역”이였다.
끝.
January 23, 2017
여러분 모두 안녕하신지요?
저가 올린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오늘로서 “漢 四郡”이름의 뜻과 발생지를 밝혀 설명 드립니다.
그렇게 찾아가다 보니 새로운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 지역 안에 “일본의 첫 통치자로 알려진 히미/매꼬(卑彌呼)가 살았습니다. 그 여자 무당이 “요양 또는 해성 일대에 자리 잡은 백제의 통치자”로 밝혀 졌습니다.
속어로 표현 하면 “원훙은 중국 사학자들”이였습니다. 한일 양국의 사가들이 모두 이를 깊히 새겨 풀이 못한 연유로 오늘까지 역사 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올리는 글을 심사숙고하여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발설자
모솔, 이돈성,
은퇴한 의과대학 교수.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