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인전에 郡자가 몇 곳에 실렸다.
필자는 이 글자를 “백제 온조왕의 형, 비류(沸流)가 자리 잡은 彌鄒忽, 帶方郡”을 뜻한다고 풀이 했다. 그로 부터 여왕이 다스리는 지역 끝을 지나면 남자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있다. 천진(天津, 帶方郡)에서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여왕이 다스리는 영역 끝 까지가 12,000리다 .
이를 진수는“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란 문구로 남겼다. 한반도 서해안의 중요한 정착지 대동강 하류에 있던 구라한국(狗邪韓國)일대를 대방이라고 했다. 이곳이 강서고분 유적지다.
천진항(帶方郡)에서 구라한국을 지나 <七千餘里를 가면 큰 바다를 건너게 된다. 바닷길 천리를 가면 대마도에 이른다>. 그러니 대마도로 부터 4000리를 가면 여왕국 영역 끝이 된다. 일본 구주 남쪽 끝까지가 여왕국 영역이란 뜻이다.
발해-요동만, 즉 북해를 한해(翰海)라 하고, 당 태종은 고구려 백암성을 점령하고 남긴 칙소;극고구려백암성소 (克高麗白巖城詔)에 고구려 사람들을 삼한사 (三韓士)라 부르고 백암성 일대를 변진지야 (弁辰之野)라 했다. 남만주 서남쪽을 삼한 땅이라고 했다.
진수는 대한해협을 한해(瀚海)라하고 구주 땅에 한(Hahn:韓, 駻, 幹)이 도착한 지역을 발해만 연안에 있던 로국(盧國) 사람들이 도착한 곳이라 하려 말로국 (末盧國)이라고 했다. 그 항구를 한진(韓津)이라고 했다. 삼한의 후예가 일본 서남 쪽 구주 땅에서 활발하게 해상 교류를 이르렀다. 해상교류의 중요지점이였던 이끼섬(壱岐島, 一支國, 一大國)에는 여인숙(許家)이 많이 나타났다. 삼한의 후예들이 다스리던 영역을 기술한 한원(翰苑)을 Daum 사전에는 “예전에, ‘한림원’이나 ‘예문관’을 예스럽게 이르던 말”, 한문 사전인 한전(漢典)에는 “翰林院” 의 다른 이름 또는 어는 지역을 떳한다 “文士聚集的地方”는 문구가 있다. 일어편에 삼한의 후예를 다룬 문서라는 증거가 있다: “1.한원2.당(唐)나라 초기의 張楚金撰ちょうそきんせん의 유서(類書)
3.원래 30권4.蕃夷部ばんいぶ 1권만이 일본에 현존하고 그 안에 倭国わこく ‧朝鮮ちょうせん 삼국(三国) 등의 기사가 있다 ”
당나라 초기에 편술된 사료라 일본이란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다.
청나라때 고염무(顧炎武:1613년-1682년)는 통전의 내용을 인용하여; 「三韓之地在海島之上,朝鮮之東南」라고 했다:
<삼한(三韓) 땅은 바다에 있는 여러 섬들이다. 조선반도의 동남쪽이다.>
삼한 땅은 일본열도 서남 해안에서 유구에 이르는 여러섬이 포함 되였다는 뜻이다.
고려와 이조시대에 <북 쪽에는 여진이, 남쪽으로는 왜구가 왕성하여 대만을 정벌했다. >
여왕국(女王國)은 비미호가 다스리던 지역의 총칭으로 夫餘氏가 다루던 百濟를 뜻했다. 百濟王이 왜왕에게 보낸 선물이 칠지도다.
칠지도(七支刀)가 혼슈 나라 현 (本州, 奈良縣)에 있다.
“泰■四年十■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錬■七支刀■辟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 奇生聖音 故 爲倭王旨 造 傳示後世”
사료를 종합해 보면 칠지도가 만들어진 시기는 268년에서 468년 사이가 된다 .
시대와 장소가 판명 되었다. 왜왕(倭王)이 있던 나라현 지역은 삼국지 왜인전에는 나타나지 않은 곳이다. 진수(陳壽, 233년 ~ 297년)가 왜인전을 마친 이후에 열도 백제 세력이 구주 북쪽 해안을 따라 내해(內海)를 지나 혼슈(本州)에 정착 하여 세로운 나라를 세웠다. 이곳을 “나라”라고 불렀다. 한자로 쓰는 국(國, Nation)을 옛적 부터 “나라”라고 했다.
대마도에서 한해(현해탄, 대한해협)를 건너 일지도를 지나 구주 땅에 도착한 곳에 末盧國이 있다. 말로국이란 한전과 변진전에 실린 여러盧國 사람들(Hahn:韓, 駻, 幹, 可汗)이 도착한 곳이란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 항구를 한진(韓津)이라 불렀다. 이를 당나라 당자 당진(唐津)이라 개명 했다 . 당진에서 구주 북쪽 해안을 따라 동북동으로 가면 漢倭奴國王印이 발견 되였다는 시카노 섬(志賀島, Shikanoshima Island) 이 후쿠오카 (福岡) 항구의 방파제를 이루고 있다.
漢倭奴國王印 다음으로 로래된 금석문이 점제현신사비(棕蟬縣神祠碑)와 강서고분 유적이다. 왜왕인을 그 곳에 살던 지도자에게 주어진 기념품 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받아 드릴수는 없다.
구주에서 해로를 따라 나라에 이르는 지역에는 <가야 신라 백제>의 유적이 많다. 그후에 고구려가 멸망하고 구주 동 쪽에 니혼(二忽, 日本)이 나타난 지역 원주민이 아이누가 살던 지역(관동지역, 동경 동북 일대)에는 주로 고구려 유민이 정착 했다. 일본(日本)이란 글자 안에는 卒本(忽本) 扶餘에서 떠러저 나온 사람들이 세운 두번 쩨 나라란 뜻(北海之帝為忽)이 있다 .
한해 따라 二萬里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의 해석 문제는 뒤에 종합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종전의 해석은 받아 드릴수 없다는 논증을 다루기로 한다.
August 6th, 2018.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