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 따라 二萬里-5: 누가 언제 한해를 처음으로 건넜나:
한해(翰海 瀚海)의 <동서 연안을 어느 누가 처음으로 건넜든가>하는 문제는 확실히 밝혀저야 한다. 중국 전사사(前四史)에서 삼국지 위서 30 특히 왜인전은 남만주에 살던 현지인의 증언(今使譯通)을 기록 했다[1]. 그들의 증언에 한해 교역을 자세하게 설명 했다. 한반도 서쪽 해안에서 표류된 배와 시신이 발견 되었고, 공손도(公孫度; ? ~ 204년)가 발해만 일대 산동 반도 북쪽 해안을 통치 했다. 후한 말기가 되는 2세기에는 발해 요동만이 동양의 지중해 역활을 했다. 오나라 손권( 孫權, 182년-252년)이 보냈던 사신이 고구려에 왔다. 진수는 오나라 사신이 공손연(公孫淵 , 제위; 237-238) 영역에 도착 했다. 분명한 점은 오나라 사신은 한해 (翰海 瀚海)를 건너야 했다. 보다 앞서 건너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고 본다.
현존하는 문헌은 중원 사람들이 작성했다. 그들과 교류가 미약 했던 요하 동북쪽 지역에 관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위만에게 밀려 바다로 들어갔던 기준 일행이 처음에는 남만주와 교류가 있었다. 도착한 곳(海中)은 요동 반도 서남쪽 해안 이였다. 그후에 남만주와는 교류가 두절 되고, 세로 도착한 곳에서 왕이 되였다. 그 곳을 마한(馬韓) 땅이라고 했다. 그 곳에는 기준이 도착 하기전 부터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마한(馬韓)이란 이름이 만주와 한반도 땅에 있었다[2]. 신라 본기 1과 고구려 본기 3에 나오는 마한은 남만주 땅이고, 백제 본기 1 처음에 나오는 마한은 만주 땅이고 그 이후에 나오는 마한은 남만주에서 뱃길로 한반도 서해안에 이르는 지역을 뜻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에 관한 기록이 극히 미약 하다. 큰 아들 비류는 미추홀 (彌鄒忽)에 도읍을 정했다. 얼마 후에 온조가 사는 곳으로 돌아 왔다는 기록이 전부다. 이 곳이 삼국지에는 염사치(廉斯鑡)가 살던 마을 아니면 구라한국 (狗邪韓國) 이라고 했던 곳이다[3]. 구라 한국이 강서고분 유적지다. 그로 부터 멀지 않은 서쪽 큰 섬에 부여 선비족과 같은 사람들 호(胡)가 살면서 배를 타고 마한 (馬韓)의 수도(巿買韓中)와 교역을 했다[4]. 큰 섬은 강화도를 뜻했다. 백제의 도읍지 설정과 천도, 그리고 염사치 사건에 관해서는 뒤에 깊히 다루기로 한다.
사기 봉선서에는 진시황이 배를 타고 산동성 해안을 몇 차례 순행 했다. 주 목적은 행여나 삼신산의 묘약을 얻을수 있나 (冀遇海中三神山之奇藥) 하는 기대에서 였다. 그러나 얻지 몯하고 박랑사 구릉(沙丘)을 죽었다[5]. 한서 교사지(漢書 郊祀志)등 여러 사서에는 한무제 또한 선인(僊人)을 믿고 그를 만나려고 노력 했다.
산동성 북쪽 해안에 살던 사람들은 진시황 이전 부터 바다 안에 여러 선인(僊人, 仙人)이 산다고 믿던 삼신산(三神山 )이라고 세 섬을 알았다. 진시황 이전에 제나라 위왕(기원전 356년 ~ 기원전 320년)과 선왕(기원전 319년 ~ 기원전 301년) 그리고 연 소왕(燕昭王; 前335年-前279年) 이 모두 사람을 보내 바닷 속에서 삼신산을 찾았다[6]. 공손연(公孫弘)은 이러한 신선(神仙)을 밑고 한무제에게 권했다. 하여 한무제는 감천궁을 짖고 바다 안에서 삼신산의 묘약을 구하려고 했다. 사기 봉선서에 따르면, 삼신산은 발해(渤海)란 바다가 아니라 성수(聖水) 예수(濊水) 치수 (治水) 호타하(滹沱河)가 흐른다고 하던 발해(勃海), 즉 발조선이 있던 산서성 (此三神山者,其傅在勃海中)에 이썼다[7]. 이를 추적해 올라가면 삼신산(三神山)의 어원은 동양의학의 근간이 되는 “황제 내경(黃帝岐伯經) 자부선인, 편작”하는 이름과 직결 되고, 삼신(三神)은 삼성(三聖)으로 록도문이 나왔다는(河出綠圖) 서주 발생지에서 산서성 북쪽을 지난 남만주로 흘러 왔다[8]. 주로 산동반도에서 점술과 일자 방사(巫, 方士)의 예언을 믿는 도참 참위설이 나타났다. 그 곳 사람들의 믿음을 대표한 사람이 한무제 당시 제상을 지냈던 공손홍(公孫弘)이 창해지군 (滄海之郡)이 있던 곳을 봉지로 받은 평진후다. 그의 아들이 공손도 (公孫度)라 했다[9]. 창해군과 공손씨와의 관계는 뒤에 깊히 다루기로 한다.
지리지형과 계절풍을 고려 하면, 남만주 해안(요동 반도 끝)에서 산동 반도 북쪽 해안에 이르는 짧은 해로가 전국시대에 알려 젔다. 산서성 해지연안에서 옮겨온 한인(汗人, 汗國, 貊國)이 그물로 고기를 잡던 해(翰海)는 삼한의 후예가 처음으로 동양의 지중해로 알려진 한해(翰海)의 관문이 되는 요동 반도 끝에서 산동반도 봉래시(蓬萊市)를 오가는 뱃길(海路)을 찾았다. 삼국지에 보면, 손권이 장미 허안등 함께 양평에 도착한 사신 일단이 400여명 (張彌、許晏等俱到襄平,
官屬從者四百許人) 이었다. 동손연은 장미 사절단의 의중을 알아 보려고 (淵欲圖彌、晏) 그들을 나누어 요동 여러 현에 유치(置遼東諸縣)시키고 진단 장군 사덕 황강(秦旦、張羣、杜德、黃彊)등 병사 60여명을 현토군에 감시병으로 보냈다. 요동에서 현토군 까지 200리(玄菟郡在遼東北,相去二百里)나 된다.
자그만 현토군에 요동에서 온 사람들을 40여일을 민가에서 패를 끼치며 살펴보니 자그만 현토 태수 왕찬(王贊)의 병력이 미약해 보였다. 그해 가을 8월 19일에 불을 질러 난동을 부려 요동성을 분탈 하고 고구려 왕 궁에게 알렸다. 궁이 그들을 후히 대접 하고 손권이 보낸 조서를 받았(即受詔)고 고구려 사신이 진단을 따라 장군과 사덕을 환송해(命使人隨旦還迎羣、德) 보냈다. 그해에 고구려왕 궁이 조의 25명이 진단 일행()을 전송하고 돌아 왔다. 신하로 부터 드린다(奉表稱臣)는 편지와 함께 수달피 묘피 1000여개등 고구려 특산물을 보냈다. 진단 일행이 손권의 반을을 보니 희비가 엇갈렸다. 손권 또한 고구려왕 궁을 선우(拜宮為單于) 라 칭하며 일년간을 두고 고구려와 손권은 교류가 있었다. 오나라 사신이 도착한 곳을 안평구(安平口) 출발한 곳도 안평이라고 했다[10]. 고구려롸 손권의 교류행각이 도위 유주자사 풍지(魏幽州刺史諷旨)가 알아 고구려왕이 사과 했다. 안평(安平)은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공손연을 토벌 하고 난 후에 영토 중원 세력과의 영토 분쟁에서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이 서쪽 요동에 있던 서안평(西安平)을 격파 했다. 손권과의 교류가 있었던 안평구(安平口)는 해하 입구를 뜻했다[11]. 동천왕의 부인이 임종에 앞서 자신의 잘못으로 고구려의 첫 도읍지 (沸流水上)를 대륙백제에 빼앗겼던 사실을 실토 했다. 하여 아무런 구덩이에 묻지 못하겠스면 동천왕의 형 상사왕 곁에 묻어 달라고 했다[12].
其年,宮遣皁衣二十五人送旦等還,奉表稱臣,貢貂皮千枚,鶡雞皮十具。旦等見權,悲喜不能自勝。權義之,皆拜校尉
宮等大喜,即受詔,命使人隨旦還迎羣、德。其年,宮遣皁衣二十五人送旦等還,奉表稱臣,貢貂皮千枚,鶡雞皮十具。旦等見權,悲喜不能自勝。權義之,皆拜校尉。間一年,遣使者謝宏、中書陳恂拜宮為單于,加賜衣物珍寶。恂等到安平口,先遣校尉陳奉前見宮,而宮受魏幽州刺史諷旨,令以吳使自效。奉聞之,倒還。宮遣主簿笮咨、帶固等出安平,與宏相見。宏即縛得三十餘人質之,宮於是謝罪,上馬數百匹。宏乃遣咨、固奉詔書賜物歸與宮。是時宏舩小,載馬八十匹而還。
여기 나오는 고구려왕 궁(句驪王宮)은 고국천왕(재위: 179∼197(또는 199)의 동생 상산왕(山上王,諱延優 一名位宮, 故國川王之弟) 이다. 신대왕 백고(新大王 伯固; 재위 165년~179년)의 큰 아들이 요동 태수 공손도에게 갔다 돌아와 비류수 상에 사랐다는 발기, 둘째 아들이 고국천왕 이다. 동천왕의 아들이 뒤를 이은 제 12대 중천왕 (中川王,재위 248년~270년)이다.
(以中使秦旦、張羣、杜德、黃彊 等及吏兵六十人,置玄菟郡。)
공손도 전에는 연이 열양장군(揚烈將軍)요동 태수로 임명 되고 남쪽 손권에 사신을 보내 두 나라 사이에 뇌물이 (往來賂遺) 오고갔다. 공손도가 발해만 서쪽 갈석산 이남 요동에 실권자로 임명을 받아 그 아들 강(康)이 오장으로 그 곳의 수도 양평시 를 도륙하여 (笞殺於襄平市) 그곳의 호족 백여 가문이 멸살 당했다. 동쪽으로는 고구려를 치고 서쪽으로는 오환을 처서 그의 만행이 그 일대에 알려 졌다[13]. 남만주와 손권과의 교류에는 부여 또는 백제란 이름이 없이 고구려와 공손씨 세력만이 보인다.
한해 서쪽 연안의 해상로는 남만주 사람들이 먼저 개발 했다.
하여 시경에는 대인이 점을 치니(大人占之)하는 구절이 보이고, 여씨춘추등 여러 경외서에는 대해(大解) 대인지국 (大人之國)이 있다고 했다[14]. 고전에 나오는 “大解, 王公, 大人”하는 이름은 <햇 님의 후손, 즉 해치(解豸, 獬豸)와 같은 뜻으로 > 고조선의 지도자를 묘사한 글자다[15]. 이들이 산서성에서 남만주로 옮겨와 이들을 선인(僊人, 仙人) 으로 기록에 남겼다. 왕공대인의 가르침을 선교(仙敎) 라 한다. 단군조선 사람들이 믿던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道) 교를 신선이 가르침이라 하여 선교(仙敎) 라 한다. 당태종이 그토록 사모하던 석학 위징은 선교(仙敎) 와 불교를
방외지교(方外之教), 즉 외국사람이 믿던 교라고 했다.
September 24, 2018
끝.
[1].三國志 魏書三十 倭人傳: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依山島為國邑。舊百餘國,漢時有朝見者,今使譯所通三十國。
評曰:史、漢著朝鮮、兩越,東京撰錄西羗。魏世匈奴遂衰,更有烏丸、鮮卑,爰及東夷,使譯時通,記述隨事,豈常也哉.
[2]. 論語 子罕:子欲居九夷。或曰:「陋,如之何!」子曰:「君子居之,何陋之有?」. 漢書 志 地理志
故孔子悼道不行,設浮於海,欲居九夷,有以也夫!樂浪海中有倭人,分為百餘國,以歲時來獻見云。
[3]. 論語 子罕:子欲居九夷。或曰:「陋,如之何!」子曰:「君子居之,何陋之有?」. 漢書 志 地理志
故孔子悼道不行,設浮於海,欲居九夷,有以也夫!樂浪海中有倭人,分為百餘國,以歲時來獻見云。
[4].韓傳: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其人差短小,言語不與韓同,皆髠頭如鮮卑,但衣韋,好養牛及豬。其衣有上無下,略如裸勢。乘船往來,巿買韓中。
[5].封禪書:始皇自以為至海上而恐不及矣,使人乃齎童男女入海求之。船交海中,皆以風為解,曰未能至,望見之焉。其明年,始皇復游海上,至瑯邪,過恒山,從上黨歸。後三年,游碣石,考入海方士,從上郡歸。後五年,始皇南至湘山,遂登會稽,并海上,冀遇海中三神山之奇藥。不得,還至沙丘崩
[6]. 論語 子罕:子欲居九夷。或曰:「陋,如之何!」子曰:「君子居之,何陋之有?」. 漢書 志 地理志
故孔子悼道不行,設浮於海,欲居九夷,有以也夫!樂浪海中有倭人,分為百餘國,以歲時來獻見云。
[7].史記 封禪書: 自威、宣、燕昭使人入海求蓬萊、方丈、瀛洲。此三神山者,其傅在勃海中,去人不遠;患且至,
則船風引而去。蓋嘗有至者,諸僊人及不死之藥皆在焉。其物禽獸盡白,而黃金銀為宮闕。
[8].《註》蓬萊,方丈,方壺,三者皆羣仙所居《孔安國·尚書序》九州之志,謂之九丘。言九州所有,皆聚此書也。又崇丘,亡詩篇名。言萬物得極其高大也。《註》蓬萊,方丈,方壺,三者皆羣仙所居 太平御覽 雲《黃帝岐伯經》曰:
岐伯乘絳雲之車,駕十二白鹿游于蓬萊之上.《詩》曰:薈兮蔚兮,南山朝躋。注曰:「薈蔚,雲興貌;南山,曹南山;躋,升雲也.시경 조풍에 “薈兮蔚兮、南山朝隮。婉兮孌兮、季女斯飢” 墨子 非攻下:。赤鳥銜珪,降周之岐社,曰:
『天命周文王伐殷有國。』泰顛來賓,河出綠圖,地出乘黃。武王踐功,夢見三神曰2:予既沈漬殷紂于酒德矣,往攻之,予必使汝大堪之』。武王乃攻狂夫,反商之周,天賜武王黃鳥之旗。王既已克殷,成帝之來,分主諸神,祀紂先王,通維四夷,而天下莫不賓,焉襲湯之緒,此即武王之所以誅紂也。若以此三聖王者觀之,則非所謂攻也,所謂誅也」。
[9].史記 平津侯主父列傳: 元狩二年,弘病,竟以丞相終。子度嗣為平津侯。度為山陽太守十餘歲,坐法失侯
漢書: 弘子度嗣侯,為山陽太守十餘歲,詔徵鉅野令史成詣公車,度留不遣,坐論為城旦
[10].史記 平津侯主父列傳: 元狩二年,弘病,竟以丞相終。子度嗣為平津侯。度為山陽太守十餘歲,坐法失侯
漢書: 弘子度嗣侯,為山陽太守十餘歲,詔徵鉅野令史成詣公車,度留不遣,坐論為城旦
[11].三國史記 高句麗國本紀第五: 十二年,魏大傅太尉司馬宣王率衆,討公孫淵。王遣主簿大加,將兵千人助之. 十六年,王遣將,襲破遼東西安平.
[12].三國史記 高句麗國本紀第五:東川王或云東襄。,諱憂位居.八年,魏遣使和親. 八年,魏遣使和親。秋九月,
大后太后于氏薨。大后太后臨終遺言日曰:「妾失行,將何面日目見國壤於地下?若群臣不忍●於溝壑,則請葬我於山上王陵之側。」遂葬之如其言。
[13].公孫度傳: 公孫度字升濟,本遼東襄平人也。度父延,避吏居玄菟,任度為郡吏。時玄菟太守公孫琙,子豹,年十八歲,
早死。度少時名豹,又與琙子同年,琙見而親愛之,遣就師學,為取妻。後舉有道,除尚書郎,稍遷兾州刺史,以謠言免。同郡徐榮為董卓中郎將,薦度為遼東太守。度起玄菟小吏,為遼東郡所輕。先時,屬國公孫昭守襄平令,召度子康為伍長。度到官,收昭,笞殺於襄平市。郡中名豪大姓田韶等宿遇無恩,皆以法誅,所夷滅百餘家,郡中震慄。東伐高句驪,西擊烏丸,威行海外。
[14].呂氏春秋 恃君: 非濱之東,夷、穢之鄉,大解、陵魚、其、鹿野、搖山、揚島、大人之居,多無君. 淮南子 時則訓:
東方之極,自碣石山過朝鮮,貫大人之國,東至日出之次,木之地,青土樹木之野,太皞、句芒之所司者,萬二千里
[15].解:《廣韻》自唐叔虞食邑于解,後因氏。又複姓。《姓苑》北魏有解枇氏,後攺爲解氏。又《說文》解廌,獸也。《史記·司馬相如傳》弄解豸。《註》解豸,似鹿,一角,一名神羊。古者決訟,令觸不直者。唐御史法冠,一名解廌冠,取其能觸邪也。《晉書·輿服志》作獬豸。《王充·論衡》作觟𧣾。又與嶰通。嶰谷,谷名。《前漢·律歷志》取竹之解谷。《孟康曰》解,脫也。一說昆侖之北谷名也。又與澥通。《前漢·揚雄傳》江湖之雀,勃解之鳥。又與蟹同。《呂覽·恃君篇》大解、陵魚,大人之居。《山海經》作大蟹
오눌.
누가 언제 한해를 처음으로 건넜나:
한해(翰海 瀚海)의 <동서 연안을 어느 누가 처음으로 건넜든가>하는 문제는 확실히 밝혀저야 한다. 중국 전사사(前四史)에서 삼국지 위서 30 특히 왜인전은 남만주에 살던 현지인의 증언(今使譯通)을 기록 했다[1]. 그들의 증언에 한해 교역을 자세하게 설명 했다. 한반도 서쪽 해안에서 표류된 배와 시신이 발견 되었고, 공손도(公孫度; ? ~ 204년)가 발해만 일대 산동 반도 북쪽 해안을 통치 했다. 후한 말기가 되는 2세기에는 발해 요동만이 동양의 지중해 역활을 했다. 오나라 손권( 孫權, 182년-252년)이 보냈던 사신이 고구려에 왔다. 진수는 오나라 사신이 공손연(公孫淵 , 제위; 237-238) 영역에 도착 했다. 분명한 점은 오나라 사신은 한해 (翰海 瀚海)를 건너야 했다. 보다 앞서 건너간 사람이 있을수도 있다고 본다.
현존하는 문헌은 중원 사람들이 작성했다. 그들과 교류가 미약 했던 요하 동북쪽 지역에 관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위만에게 밀려 바다로 들어갔던 기준 일행이 처음에는 남만주와 교류가 있었다. 도착한 곳(海中)은 요동 반도 서남쪽 해안이였다. 그후에 남만주와는 교류가 두절 되고 도착한 곳에서 왕이 되였다는 땅을 마한(馬韓)이라 했다. 그 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요동반도 끝을 돌아 정 동쪽으로 배를 돌려 한반도 서해안 대동강 하구에 정착 했다. 온조왕이 남만주 우래성에서 한반도로 수도를 옮겼다. 삼국사기에는 마한(馬韓)이란 이름이 만주와 한반도 땅에 있었다[2]. 삼국지에는 구라한국(狗邪韓國)이라 한 곳이다[3]. 이곳이 강서고분 유적지다. 그로 부터 멀지 않은 마한(馬韓) 서쪽 큰 섬에 부여 선비족과 같은 사람들이 살면서 교역을 했다[4]. 호(胡)가 살던 큰 섬은 강화도를 뜻했다.
사기 봉선서에는 진시황이 배를 타고 산동성 해안을 몇 차례 순행 했다. 주 목적은 행여나 삼신산의 묘약을 얻을수 있나 (冀遇海中三神山之奇藥) 하는 기대에서 였다. 그러나 얻지 몯하고 박랑사 구릉(沙丘)을 지나다 습격을 받고 도망치다 죽었다[5].
산동성 북쪽 해안에 살던 사람들은 진시황 이전 부터 바다 안에 여러 선인(僊人, 仙人)이 산다고 믿던 삼신산(三神山 )이라고 세 섬을 알았다. 진시황 이전에 제나라 위왕(기원전 356년 ~ 기원전 320년)과 선왕(기원전 319년 ~ 기원전 301년) 그리고 연 소왕(燕昭王; 前335年-前279年) 이 모두 사람을 보내 바닷 속에서 삼신산을 찾았다[6]. 공손연(公孫弘)은 이러한 신선(神仙)을 밑고 한무제에게 권했다. 하여 한무제는 감천궁을 짖고 바다 안에서 삼신산의 묘약을 구하려고 했다. 사기 봉선서에 따르면, 삼신산은 발해(渤海)란 바다가 아니라 성수(聖水) 예수(濊水) 치수 (治水) 호타하(滹沱河)가 흐른다고 하던 발해(勃海), 즉 발조선이 있던 산서성 (此三神山者,其傅在勃海中)에 이썼다[7]. 이를 추적해 올라가면 삼신산(三神山)의 어원은 동양의학의 근간이 되는 “황제 내경(黃帝岐伯經) 자부선인, 편작”하는 이름과 직결 되고, 삼신(三神)은 삼성(三聖)으로 록도문이 나왔다는(河出綠圖) 서주 발생지에서 산서성 북쪽을 지난 남만주로 흘러 왔다[8]. 주로 산동반도에서 점술과 일자 방사(巫, 方士)의 예언을 믿는 도참 참위설이 나타났다. 그 곳 사람들의 믿음을 대표한 사람이 한무제 당시 제상을 지냈던 공손홍(公孫弘)이 창해지군 (滄海之郡)이 있던 곳을 봉지로 받은 평진후다. 그의 아들이 공손도 (公孫度)라 했다[9]. 창해군과 공손씨와의 관계는 뒤에 깊히 다루기로 한다.
지리지형과 계절풍을 고려 하면, 남만주 해안(요동 반도 끝)에서 산동 반도 북쪽 해안에 이르는 짧은 해로가 전국시대에 알려 젔다. 산서성 해지연안에서 옮겨온 한인(汗人, 汗國, 貊國)이 그물로 고기를 잡던 해(翰海)는 삼한의 후예가 처음으로 동양의 지중해로 알려진 한해(翰海)의 관문이 되는 요동 반도 끝에서 산동반도 봉래시(蓬萊市)를 오가는 뱃길(海路)을 찾았다.
하여 시경에는 대인이 점을 치니(大人占之)하는 구절이 보이고, 여씨춘추등 여러 경외서에는 대해(大解) 대인지국 (大人之國)이 있다고 했다[10]. 고전에 나오는 “大解, 王公, 大人”하는 이름은 <햇 님의 후손, 즉 해치(解豸, 獬豸)와 같은 뜻으로 > 고조선의 지도자를 묘사한 글자다[11]. 이들이 산서성에서 남만주로 옮겨와 이들을 선인(僊人, 仙人) 으로 기록에 남겼다. 왕공대인의 가르침을 선교(仙敎) 라 한다. 단군조선 사람들이 믿던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道) 교를 신선이 가르침이라 하여 선교(仙敎) 라 한다. 당태종이 그토록 사모하던 석학 위징은 선교(仙敎) 와 불교를
방외지교(方外之教), 즉 외국사람이 믿던 교라고 했다.
September 24, 2018
끝.
[1].三國志 魏書三十 倭人傳: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依山島為國邑。舊百餘國,漢時有朝見者,今使譯所通三十國。
評曰:史、漢著朝鮮、兩越,東京撰錄西羗。魏世匈奴遂衰,更有烏丸、鮮卑,爰及東夷,使譯時通,記述隨事,豈常也哉.
[2]. 論語 子罕:子欲居九夷。或曰:「陋,如之何!」子曰:「君子居之,何陋之有?」. 漢書 志 地理志
故孔子悼道不行,設浮於海,欲居九夷,有以也夫!樂浪海中有倭人,分為百餘國,以歲時來獻見云。
[3]. 論語 子罕:子欲居九夷。或曰:「陋,如之何!」子曰:「君子居之,何陋之有?」. 漢書 志 地理志
故孔子悼道不行,設浮於海,欲居九夷,有以也夫!樂浪海中有倭人,分為百餘國,以歲時來獻見云。
[4].韓傳: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其人差短小,言語不與韓同,皆髠頭如鮮卑,但衣韋,好養牛及豬。其衣有上無下,略如裸勢。乘船往來,巿買韓中。
[5].封禪書:始皇自以為至海上而恐不及矣,使人乃齎童男女入海求之。船交海中,皆以風為解,曰未能至,望見之焉。其明年,始皇復游海上,至瑯邪,過恒山,從上黨歸。後三年,游碣石,考入海方士,從上郡歸。後五年,始皇南至湘山,遂登會稽,并海上,冀遇海中三神山之奇藥。不得,還至沙丘崩
[6]. 論語 子罕:子欲居九夷。或曰:「陋,如之何!」子曰:「君子居之,何陋之有?」. 漢書 志 地理志
故孔子悼道不行,設浮於海,欲居九夷,有以也夫!樂浪海中有倭人,分為百餘國,以歲時來獻見云。
[7].史記 封禪書: 自威、宣、燕昭使人入海求蓬萊、方丈、瀛洲。此三神山者,其傅在勃海中,去人不遠;患且至,
則船風引而去。蓋嘗有至者,諸僊人及不死之藥皆在焉。其物禽獸盡白,而黃金銀為宮闕。
[8].《註》蓬萊,方丈,方壺,三者皆羣仙所居《孔安國·尚書序》九州之志,謂之九丘。言九州所有,皆聚此書也。又崇丘,亡詩篇名。言萬物得極其高大也。《註》蓬萊,方丈,方壺,三者皆羣仙所居 太平御覽 雲《黃帝岐伯經》曰:
岐伯乘絳雲之車,駕十二白鹿游于蓬萊之上.《詩》曰:薈兮蔚兮,南山朝躋。注曰:「薈蔚,雲興貌;南山,曹南山;躋,升雲也.시경 조풍에 “薈兮蔚兮、南山朝隮。婉兮孌兮、季女斯飢” 墨子 非攻下:。赤鳥銜珪,降周之岐社,曰:
『天命周文王伐殷有國。』泰顛來賓,河出綠圖,地出乘黃。武王踐功,夢見三神曰2:予既沈漬殷紂于酒德矣,往攻之,予必使汝大堪之』。武王乃攻狂夫,反商之周,天賜武王黃鳥之旗。王既已克殷,成帝之來,分主諸神,祀紂先王,通維四夷,而天下莫不賓,焉襲湯之緒,此即武王之所以誅紂也。若以此三聖王者觀之,則非所謂攻也,所謂誅也」。
[9].史記 平津侯主父列傳: 元狩二年,弘病,竟以丞相終。子度嗣為平津侯。度為山陽太守十餘歲,坐法失侯
漢書: 弘子度嗣侯,為山陽太守十餘歲,詔徵鉅野令史成詣公車,度留不遣,坐論為城旦
[10].呂氏春秋 恃君: 非濱之東,夷、穢之鄉,大解、陵魚、其、鹿野、搖山、揚島、大人之居,多無君. 淮南子 時則訓:
東方之極,自碣石山過朝鮮,貫大人之國,東至日出之次,木之地,青土樹木之野,太皞、句芒之所司者,萬二千里
[11].解:《廣韻》自唐叔虞食邑于解,後因氏。又複姓。《姓苑》北魏有解枇氏,後攺爲解氏。又《說文》解廌,獸也。《史記·司馬相如傳》弄解豸。《註》解豸,似鹿,一角,一名神羊。古者決訟,令觸不直者。唐御史法冠,一名解廌冠,取其能觸邪也。《晉書·輿服志》作獬豸。《王充·論衡》作觟𧣾。又與嶰通。嶰谷,谷名。《前漢·律歷志》取竹之解谷。《孟康曰》解,脫也。一說昆侖之北谷名也。又與澥通。《前漢·揚雄傳》江湖之雀,勃解之鳥。又與蟹同。《呂覽·恃君篇》大解、陵魚,大人之居。《山海經》作大蟹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