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기록에는 고구려와 부여의 건국에 나오는 해모수 (解慕漱), 그의 아들 해부루(解夫婁), 그리고 금와(蛙, 蝸)란 이름이 없다 . 한서 지리지와 통전에 나온 개마(蓋馬: 蓋; gài gě hé音合; hé gě) 란 이름을 비교해 보면, 해모(解慕) 같은 뜻이 분명하다. 수(漱)자는 도망을 간 지도자 (澣)란 뜻으로, 현토군에 있던 서개마현의 지도자 해모수 (解慕漱)를 뜻했다 . 흑(黑; [hēi] hēi hè/흐어/해) 자 해(解)자가 모두 해(sun, sun-ray)를 사음한 글자(蓋音合)와 같은 사음자다. 고구려와 부여는 현토군에 있는 선비산(鮮卑山)으로 증명된 의무려산 (醫巫閭山)이 있던 곳에서 나타났다. 조양시 동쪽에서 북진시 서쪽에 있는 높은 산이다. 중원에서 북쪽으로 갔다 하여 북부여(北扶餘)라 했다.
한해(翰海 瀚海)란 글자에는 부여의 후손이 그 바다의 통치권을 잡고 동서 해안에 살았다는 뜻이다. 위진시대 이전 태고적 부터 빛을 숭상 하던 고조선의 후예들이 살던 여울이라 해하(海河), 또는 작은 여울은 사수(斯水)라고 이름 했던 곳에 살았다. 그들이 바다로 나가는 관문이 해하 입구 천지(天津)항이다. 북부여왕 해부루의 손자 (北扶餘王解扶婁庶孫) 비류(沸流)가 그 곳에 정착하여 미추홀 (彌鄒忽)이라 했다 . 광개토대왕이 정벌한 미추성(彌鄒城)이다.
비류가 정착하기 이전 한무제 집권 초기 부터 이곳 사람들이 해안을 따라 활동 했다. 사기에 창해지군(滄海之郡)이 나타났다 는 곳이다. 사마천은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조용히 살던 수미 즉 부열(傅說)의 후손(靡:無也.)유목민 이 움직여 나가기 시작 했다(燕齊之閒靡然發動)는 글자로 기록 했다 . 마(靡)자에는 불암성에서 죄수 로 일하던 부열의 후손(是時說為胥靡, 筑於傅險)이란 뜻이다 . 한서에 동이맥군 남려가 280,000명을 이끌고 와서 세운 맥국 (東夷穢君南閭等降為倉海郡今貊穢國)이 나타났다는 곳이다 . 이렇게 졸본주에서 해안을 따라 천진 (天津)항으로 이는 대륙 백제의 활발 했던 해상 교류를 뜻했다. 그곳에 부여왕과 성씨가 같은 공손홍 (公孫弘)이 한무제로 부터 봉지를 받았다. 진수는 공손홍의 아들 공손도(公孫度; ? ~ 204년)를 공손탁이라 하는 등 혼잡하게 기록 했다. 후한말에 나타난 고구려 왕자의 난에 등장하는 발기(拔奇, 發岐, ? ~ 197년)로 뒤바꾸어 발기는 요동으로 돌아 가고 아들 박위거 (駮位居)가 졸본주에 남았다고 했다. 위거(位居)의 성씨 박(駮)자 는 현지인이 쓰던 밝다는 말의 사음자로 훈역하면 높을 고(高) 즉 해(解), 햇님의 후손을 뜻한 글자다.
이로서 고구려는 이리모가 졸본주를 비류왕의 후손인 대륙백제 에게 빼았기고 환도성으로 천도(伊夷模更作新國)했다 .
후세 사람들은 양평 사람 공손도 (公孫度)가 나타나 부여왕의 대릴 사위가 되어 백제를 등에 없고 (字升濟,升即登也. 讖書云孫登當為天子), 또는 부여왕이 공손도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드려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했다 .
중원세력은 이렇게 대륙백제의 실체를 감추려 했다.
한해(翰海 瀚海)의 <동서 연안을 어느 누가 처음으로 건넜든가>하는 문제는 확실히 밝혀저야 한다. 중국 전사사(前四史)에서 삼국지 위서 30 특히 왜인전은 남만주에 살던 현지인의 증언(今使譯通)을 기록 했다[1]. 그들의 증언에 한해 교역을 자세하게 설명 했다. 한반도 서쪽 해안에서 표류된 배와 시신이 발견 되었고,
진서에는 발해만을 떠나 먼 뱃길을 개척 하려다 죽은 사람이 공손도 시절에 나타났다[2]. 공손도(公孫度; ? ~ 204년)가 발해만 일대 산동 반도 북쪽 해안을 통치 했다. 후한 말기가 되는 2세기에는 발해 요동만이 동양의 지중해 역활을 했다. 오나라 손권( 孫權, 182년-252년)이 보냈던 사신이 고구려에 왔다. 진수는 오나라 사절단 400여명이 공손연(公孫淵 , 제위; 237-238) 영역인 양평(襄平)에 도착 했다[3].
고구려와 손권 (孫權; 229년-252년)이 교류 했던 시대와 장소를 살펴 보았다.
고구려와 손권의 사절단들이 배를 타고 내린 곳이 안평구(安平口)즉 난하 입구, 한무제 수군이 도착 했던 열구(列口) 였다. 그로 부터 서쪽으로 당산 일대를 한 요동군 서안평(漢遼東郡西安平)이라 했다[4].
고구려왕 궁(句驪王宮)은 산상왕 위궁(山上王, 延優一名位宮;재위 197년~227년)
이 아니라 그의 아들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년-248년)이라야 한다[5]. 고구려는 특사로 손권을 방문한 배가 적어서(舩小) 주부 착자(主簿笮咨)가 선물로 말 80
여필을 싣고 갔다 왔다[6]. 한해를 운행하던 배가 도착한 곳을 안평구(安平口) 떠났던 곳도 안평(安平)이라 했다. 안평구는 요동의 수도 였던 양평의 외항으로 난하 입구 즉 열구(列口)의 다른 이름이다. 이를 진수는 <요동 양평 모두 오늘의 요하 동쪽 으로 몰아 지금도 태자하 서안평> 하는 이름을 쓰고 있다.
진순(陳恂)이 선조가 주군으로 모시던 조조 세력에서 떠러저 나오 손권을 주군으로 모셨다. 진순(陳恂)의 아버지 진태(陳泰, ? ~ 260년)는 조위의 진군대장군 진군 (鎮軍大將軍陳羣; ? ~ 236년)의 아들이다. 진순(陳恂)이 아들이 없이 죽어 동생 온(弟溫紹封)이 이어 받았다[7]. 양주자사 진온(楊州刺史陳溫)은 원술이 죽였다.
진순은 오나라 중서랑의 자격으로 고구려왕 궁을 선우(中書陳恂拜宮為單于)로 대접 했다.
진씨(陳氏) 족보에는 진군이후에 가세가 미약하여 알수 없다 했고, 삼국지에는 <유비(劉備)가 독립을 선언한 이후에 東南쪽에 많은 변화가 왔다. 그가 아들이 없이 죽어 동생이 후사를 이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주거지를 옮기고 주군을 바꾸기도 하고 성씨도 바꾸었다[8]. 진군(陳羣)도 한 때는 주살 당한 여포(呂布)의 군사였다. 또 한때는 손권을 주군으로 모셨다. 그러한 진군 (陳羣)을 조위문제 (文帝)가 사마선왕과 같이 조위 왕실의 중진으로 (司馬宣王等受遺詔輔政) 임명 했다[9]. 진순(陳恂)에 앞서 그의 부친 진봉(陳奉, 陳泰)이 고구려왕 궁을 만나 보았다[10]. 진순의 아버지 진태(陳泰)를 진봉(陳奉)으로 잘못 적었다. 이들은 손권의 사신으로 고구려왕 궁을 만났다. 그들이 동오로 가는 배를 탄 곳이 갈석산 남쪽 안평구(安平口, 列口) 였다.
공손도 전에는 227년(太和二年)에 공손연(公孫淵 文懿, ? ~ 238년)을 엄인(閹人), 즉 환관이나 내시 같은 사람에 비유하여 실권을 장악한 이면을 실었다[11]. 집권한지 7년만에 오나라와 공모 했다.
명제기에는 233년(青龍元年) 12월에 공손연이 오나라 사신의 수급을 바쳐 대사마 낭랑공(大司馬樂浪公)의 칭호를 받았다[12]. 한간에 도는 (世語曰)인용하여 잔꾀를 부리려다 사실이 밝혀저 큰 변을 당했다는 문구를 남겼다. 손권의 사신은 232년에 왔다.
삼국지는 사마소(韋昭, 韋曜;201-273년)의 오서(吳書曰)를 인용하여 장미 허안 등이 다 함께 양평에 도착(張彌、許晏等俱到襄平) 했다. 따라간 사람이 400여인 (官屬從者四百許人)이 였다. 공손연(公孫淵 , 제위; 237-238)이 오나라 사신이 찾아온 이유를 확인 하려고 (淵欲圖彌) 그들을 나누어 요동 여러 현에 유치 (置遼東諸縣)시키고 사신으로 온 진단 장군 사덕 황강(秦旦, 張羣, 杜德, 黃彊)등 현토군에 보냈다. 현토군은 요동 북쪽200리(玄菟郡在遼東北,相去二百里)나 된다. 자그만 현토군에 요동에서 온 사람들을 40여일을 민가에서 패를 끼치며 살펴보니 자그만 현토 태수 왕찬(王贊)의 병력이 미약해 보였다. 그해 가을 8월 19일에 불을 질러 난동을 부려 요동성을 분탈 하고 고구려 왕 궁에게 알렸다. 궁이 그들을 후히 대접 하고 손권이 보낸 조서를 받(即受詔)고 고구려 사신이 동오 사람 진단(秦旦)을 따라 도망오다 병이 나서 뒤에 숨어 있던 진군과 사덕을 환송해 (命使人隨旦還迎羣、德) 왔다. 그해에 고구려왕 궁이 조의 25명으로 하여금 진단(秦旦) 일행이 동오로 가는 길을 전송하고 돌아 왔다. 그 편에 신하로 부터 드린다(奉表稱臣)는 편지와 함께 수달피 묘피 1000여개등 고구려 특산물을 보냈다. 진단(秦旦)일행이 손권의 반응을 보니 희비가 엇갈렸다. 손권 또한 고구려왕 궁을 선우(拜宮為單于) 라 칭하며 일년간을 두고 고구려와 손권은 교류가 있었다. 공손연 말기에는 고구려와 조위 요동-현토 일대, 그리고 남쪽 오나라와의 교섭이 미묘한 상황을 기술 했다.
진군(陳羣)과 같은 반렬에 있던 오나라 강동사람 육손(江東大族 陸遜; 183년 ~ 245년)이 복건성 해변에 사는 사람들을 동원 하여 대만 (臺灣)을 정벌 했다[13]. 손권이 229년(黃龍元年)에 황제(南郊即皇帝位)라 칭했다. 5월에 장강과 관독을 (처음으로)요동에(張剛、管篤之遼東) 보냈다. 그후 다시 예기가 없어 생사를 모르겠다. 다음해인 황룡2년 정월(黃龍二年正月; 230년) 에는 장군 위온과 제갈직(衞溫, 諸葛直)등이 갑옷 입은 군사 만명을 대리고 바닷속에 있다는 이주와 단주 (夷洲及亶洲)에 가서 진시황이 실패 했다는 봉래신산 선약을 구해 오라고 (求蓬萊神山及仙藥) 했다. 돌아와 아뢰기를 <그 곳은 너무 멀어 가지 못하고 이주사람 수천명을 대리고 왔다>했다. 다음해 3월에는 위온(衞溫, 諸葛直)등이 명을 어기고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했다는 죄명으로 처형 했다[14].
손권은 232년 3월 (嘉禾元年三月)에 장군주하(將軍周賀)를 뱃길로 요동에 보냈다.
그해 10월에 조위의 요동태수 공손연이 교위 숙서 (魏遼東太守公孫淵遣校尉宿舒)
를 보내 손권의 번신이 되겠다고 자청 했다[15]. 손권이 기뻐서 공손연에 작위를 더하여 연왕(燕王)으로 했다. 남쪽세력과 유대관계를 성립한 공손연은 조위에 거역 했다. 사마의(司馬懿)이 238년에 친입하자 손권에 구원을 청했지만 구원병이 오기전에 양평성에서 주살 당 했다. 거리 관계로 소식이 늦었던가 아니면 계절풍 탓이였던가, 손권은 239년3월(赤烏二年春三月)에야 장군 손이(孫怡)등이 인솔한 동오의 군사를 보내 조위의 수비장 장이(張持)와 고려(高慮)를 격파하고 몇명 인질로 잡아 왔다[16].
앞서 손권은 장안(長安)이라는 별명이 붙은 커다란 배를 만들었다. 그와 같은 큰 배를 만들어 풍력으로 요동과 대만으로 사신을 보냈다. 한해의 서쪽 연안은 진시황이 불사약을 찾으려고 양자강 하류에서 산동 반도를 거처 발해만 서쪽 갈석산에 이르는 뱃길을 개척 했다. 그 항로를 따라 손권의 집권 시기에 발해만에서 대만에 까지이르렀다.
끝
[1].三國志 魏書三十 倭人傳: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依山島為國邑。舊百餘國,漢時有朝見者,今使譯所通三十國。
評曰:史、漢著朝鮮、兩越,東京撰錄西羗。魏世匈奴遂衰,更有烏丸、鮮卑,爰及東夷,使譯時通,記述隨事,豈常也哉.
[2]. 晉書 公孫度: 後漢末,公孫度自號平州牧。及其子康、康子文懿並擅據遼東,東夷九種皆服事焉.遼東太守公孫度欲彊用之,
敏乘輕舟浮滄海,莫知所終。胤父信追求積年,浮海出塞,竟無所見,欲行喪制服,則疑父尚存,情若居喪而不聘娶 。
[3].三國志: 吳主傳:吳書曰:初,張彌、許晏等俱到襄平,官屬從者四百許人。淵欲圖彌、晏,先分其人衆,置遼東諸縣,
以中使秦旦、張羣、杜德、黃彊等及吏兵六十人,置玄菟郡。句麗作國,依大水而居,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麗別種依小水作國,因名之為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
[4]. 漢書 地理志下: 遼東郡。縣十八:襄平,新昌,無慮,望平,房,候城,遼隊,遼陽,險瀆,居就,高顯,安市,武次,
平郭,西安平,文,番汗,沓氏. 三國史記: 秋八月,王遣將,襲漢遼東西安平縣,殺帶方令,掠得樂浪大守太守妻子。
『梁書』:「以司馬懿討公孫淵,王遣將,襲西安平,毋丘儉來侵。」『通鑑』:「以得來諫王,為王位宮時事。」
通典 高句麗:漢遼東郡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麗之別種,依小水作居,因名之為小水貊.
[5].山上王,諱延優一名位宮,故國川王之弟也.東川王或云東襄。,諱憂位居,少名郊●,山上王之子。母酒桶村人,
入為山上小后,史失其族姓。前王十七年,立為太子,至是嗣位
[6].權義之,皆拜校尉。間一年,遣使者謝宏、中書陳恂拜宮為單于,加賜衣物珍寶.宮遣主簿笮咨、帶固等出安平,與宏相見。宏即縛得三十餘人質之,宮於是謝罪,上馬數百匹。宏乃遣咨、固奉詔書賜物歸與宮。是時宏舩小,載馬八十匹而還
[7]. 三國志 魏書二十二 陳羣傳子泰: 干寶晉紀曰:高貴鄉公之殺,司馬文王會朝臣謀其故。太常陳泰不至,使其舅荀顗召之.
魏氏春秋曰:帝之崩也,太傅司馬孚、尚書右僕射陳泰枕帝尸於股,號哭盡哀 子恂嗣。恂薨,無嗣。弟溫紹封。
咸熈中開建五等,以泰著勳前朝,改封溫為慎子。案陳氏譜:羣之後,名位遂微。諶孫佐,官至青州刺史
[8]. 三國志魏書曰:自劉備叛後,東南多變。太祖以陳羣為鄖令,夔為城父令,諸縣皆用名士以鎮撫之,其後吏民稍定
太祖與紹合擊,大破術軍。術以餘衆奔九江,殺楊州刺史陳溫,領其州.
[9]. 三國志袁渙傳: 布(呂布)誅,乃得歸太祖.袁氏世紀曰:布之破也,陳羣父子時亦在布之軍,見太祖皆拜.
曹真傳: 曹真字子丹,太祖族子也。太祖起兵,真父邵募徒衆,為州郡所殺. 魏略曰:真本姓秦,養曹氏。或云其父伯南夙與太祖善. 七年,文帝寢疾,真與陳羣、司馬宣王等受遺詔輔政.
[10]. 三國志 吳主傳:淵果斬彌等,送其首于魏,沒其兵資。權大怒,欲自征淵,旦等見權,悲喜不能自勝。權義之,
皆拜校尉。間一年,遣使者謝宏、中書陳恂拜宮為單于,加賜衣物珍寶。恂等到安平口,先遣校尉陳奉前見宮,而宮受魏幽州刺史諷旨,令以吳使自效。奉聞之,倒還。宮遣主簿笮咨、帶固等出安平,與宏相見。宏即縛得三十餘人質之,宮於是謝罪,上馬數百匹。宏乃遣咨、固奉詔書賜物歸與宮。是時宏舩小,載馬八十匹而還。
[11].初,恭病陰消為閹人,劣弱不能治國.太和二年,淵脅奪恭位。明帝即拜淵揚烈將軍、遼東太守。淵遣使南通孫權,往來賂遺。吳書載淵表權曰:「臣伏惟遭天地反易,遇無妄之運;王路未夷,傾側擾攘。自先人以來,歷事漢、魏,階緣際會,為國效節,繼世享任,得守藩表,猶知符命未有攸歸。
[12].三國志 魏書三 明帝紀: 青龍元年,十二月,公孫淵斬送孫權所遣使張彌、許晏首,以淵為大司馬樂浪公。
世語曰:并州刺史畢軌送漢故度遼將軍范明友鮮卑奴,年三百五十歲,言語飲食如常人。奴云:「霍顯,光後小妻。明友妻,光前妻女。」博物志曰:時京邑有一人失其姓名,食啖兼十許人,遂肥不能動。其父曾作遠方長吏,官徙送彼縣,令故義傳供食之;一二年中,一鄉中輒為之儉。傅子曰:時太原發冢破棺,棺中有一生婦人,將出與語,生人也。送之京師,問其本事,不知也。視其冢上樹木可三十歲,不知此婦人三十歲常生於地中邪?將一朝欻生,偶與發冢者會也?
[13]. 三國志 吳書十三 陸遜傳:陸遜字伯言,吳郡吳人也。本名議,世江東大族.權欲遣偏師取夷州及朱崖,
皆以諮遜,遜上疏曰:「臣愚以為四海未定,當須民力,以濟時務。」
[14].黃龍二年正月遣將軍衞溫、諸葛直將甲士萬人浮海求夷洲及亶洲。亶洲在海中,長老傳言秦始皇帝遣方士徐福將童男童女
數千人入海,求蓬萊神山及仙藥,止此洲不還。世相承有數萬家,其上人民,時有至會稽貨布,會稽東縣人海行,亦有遭風流移至亶洲者。所在絕遠,卒不可得至,但得夷洲數千人還。
三年春二月,遣太常潘濬率衆五萬討武陵蠻夷。衞溫、諸葛直皆以違詔無功.
[15].吳主傳: 黃龍元年 南郊即皇帝位. 五月,使校尉張剛、管篤之遼東. 嘉禾元年三月,遣將軍周賀、校尉裴潛乘海之遼東.
冬十月,魏遼東太守公孫淵遣校尉宿舒、閬中令孫綜稱藩於權,并獻貂馬。權大恱,加淵爵位二年春正月。特下燕國,奉宣詔恩,令普天率土備聞斯慶。」三月,遣舒、綜還,使太常張彌、執金吾許晏、將軍賀達等將兵萬人,金寶珍貨,九錫備物,乘海授淵
[16].吳主傳: 赤烏 二年春三月;遣使者羊衜、鄭冑、將軍孫怡之遼東,擊魏守將張持、高慮等,虜得男女.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