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 따라 二萬里-7: 한해 동쪽을 통한 교류-1: 서론
한해 서쪽 해안을 따라 이루어진 상황은 삼국지 오주전과 공손도전에, 한해의 동쪽 연안을 따라 진출해가는 상황은 동이전에 실었다. 왜인전에는 대방군에서 여왕국 까지는 12,000리 (自郡至女王國萬二千餘里) 다。끝에는 믿기 어려운 문구 마저 실렸다; 뱃길로 일년을 가야 이르는 곳에(船行一年可至) 유라국과 흑치국이 있다[1]. 그러나 그곳에 나타난 나라 이름자(有侏, 有裸의 有자는 high의 사음자) 에는 남만주 연안에 살던 사람들이 세웠다는 뜻이 있다. 고조선의 후예 한예(韓濊)들이 상당히 큰 배를 타고 풍력, 또는 해류(海流)를 이용하여 바다 멀리에 있는 섬나라와 교류를 했다는 사실을 진수에게 알려 주었다.
한해의 동남일대에 흐터져 있는 섬들은 삼국지 왜인전에 실린바와 같이 고조선의 후예들이 처음으로 발견 했다. 섬나라에는 대륙에 사는 “소 말 호랑이 표범 까치 (其地無牛馬虎豹羊鵲)는 없고”, 남쪽에 사는 원숭이와 흙치(獮猴、黑雉)가 있었다. 수로를 통한 교류가 효능적이란 기록(水行十日,陸行一月)이 왜인전에 있다[2]. 말(馬)은 위진 시대 이후에 일본 열도에 건너 갔다고 본다. 중국과의 교류가 있었다고는 했지만 중국에서 직접 왜인이 사는 섬나라로 갔다왔다는 기록은 없고 섬나라로 가는 방향을, <회계에서 동쪽으로 부는 바람을 타고 동쪽으로 가면>하는 문구로 기술 하고, 남녀의 의상을 예법 등을 기술 했다[3].
원숭이와 검은 꿩(黑雉)는 인력으로 옮긴 동물이 아니라 해류 또는 바람에 밀려 유구 일대로 올라 왔다고 본다. 앞에 인용한 <일년을 가면 흙치국(黑齒國)이 있다는 곳은 꿩 같이 생긴 흑치(黑雉)의 원산지 대만을 뜻했다. 한해의 돈남똑 여러 섬들은 한반도를 따라 내려가는 해로를 통해 고조선 후예들이 발견하고 정착 했다.
한편 중원 세력은, 黃武五年(226년)에 손권이 장안(長安)이라고 이름을 붙인 큰 배를 무창(武昌)에서 실험 하다 바람이 심하여 곡리(谷利)란 자가 손권의 명을 어기고 배를 돌려 무한(武漢)일대에 배를 정박하기 위해 목책을 밖아 놓은 항구 (樊口) 에 무사히 돌아 왔다. 그후 부터 왕명을 어긴 자를 곡 (常呼曰谷) 이라고 불렀다[4]. 호수 또는 강물에서 실험하다 실패 했다니 그 배를 바다에 끌고 나갔다고 볼수는 없다. 동오의 황제가 된 손권은 230년 봄(黃龍二年春正月)에 위온과 제갈직(衞溫, 諸葛直)등의 인솔 하에, 무장 병력 10,000명이 대만과 단주로 출항 했다. 진시황이 실패한 불사약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求蓬萊神山及仙藥)서 였다. 그 들은 봉래산 신선이 사는 곳을 찾지 못하고 겨우 대만에서 수천명을 포로로 잡아 왔다. 다음 해에는 위온 등이 칙소를 어기고 아무런 공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죄명 으로 그들을 죽였다[5].
개황의 치(開皇之治) 라고 하는 수나라(隋, 581년~ 619년) 초기에야 대륙백제가 개설한 해로를 따라 동쪽에 있는 유구(琉球)를 정벌 했다. 그 당시에 수나라 전함이 모라국(제주도, 耽羅, 牟羅國)에 표류되여 백제를 통하여 돌려 보넸다[6]. 그 곳에는 노루와 사슴(麞鹿)이 많았다고 하니 어느누가 배에 싣고 백제 관활의 모라국에 도착 했다고 본다. 같은 수서(隋書)에 “麞鹿”란 글자가 실위(室韋)에 나타난다. 그 곳에 사는 노루와 사슴이 만주에서 왔다고 추리 된다. 현제 실행되는 DNA를 근거로 여러 의문점을 밝힐수 있다고 본다.
동오에서는 232년 봄(嘉禾元年春正月) 에 계절풍을 타고 뱃길로 요동에 주하 (周賀) 등을 사신으로 보냈다[7]. 그 해 9월에(明帝紀에는 10월) 오환 선비 전예 (田豫)가 성산에서 주하를 죽였다. 오환 선비 추장이란 전예를 명제기에는 <다할 진자 진리장군 전예 (殄夷將軍田豫)라는 묘한 표현>을 했다. 그는 어양 사람으로 호가 나라를 바쳤다는 뜻의 국양(字國讓,漁陽人也)이다. 그가 가비능과도 겨루던 부족을 이끌었고 공손연 토벌 당시 앞장서서 뱃길로 양평에 이르 렀다[8]. 대륙에
자리 잡았던 백제 비류왕의 후손인 듯 하다. 하여 고구려에서 동오 사신을 죽였다고 했다. 동오에서 처음으로 남만주에 보냈던 사신들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조위 통치하의 오환선비 영역에서 232년 가을(太和末) 에 사살 당했다. 이 사건을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동천왕 10년(236년) 봄 2월에 손권이 보냈던 사신 호위 (胡衛通和)등을 7월에 참수하여 동맹관계에 있던 조위에 보냈다[9]. 공손연이 10월에 답예로 값진 모피와 말(貂馬)을 사신을 통해 보내 면서 손권의 신하가 되겠다고 했다. 그들의 수행원이 얼마 였다는 보고가 없다.
그 다음 해 3월에는 태상 장미(張彌、許晏等俱到襄平)가 인솔하에 장병 만명 (將兵萬人)을 이끌고 많은 보물을 선물로 배에 싣고 양평으로 떠났다[10]. 이렇게 극진히 대한 손권의 특사를 분산시켜 요동(遼東) 여러 현에서 감시하게 하였다. 그 과정에 오나라 사신이 음모를 꾸렸다 실패 하여 고구려로 도망갔다. 고구려는 배가 작아 선물로 말 84필을 싣고 (載馬八十匹而還) 서안평에 있는 항구(安平口)를 떠나 동오에 다녀 왔다[11]. 동오와의 무역 항구는 난하 입구, 즉 한나라 수군이 상륙 했던 열구(列口)다. 우호관계에 있던 고구려와 조위는 관구검의 침략으로 사이가 악화 되여 고구려가 요동 서안평 을 점련 했다. 봉상왕(烽上王, 재위 292년~300년)은 모용씨와 서안평에서 겨루었고, 뒤를 이는 미천왕 (美川王, 281년 ~ 331년) 또한 유업을 이어 조양 일대에서 발해만 서안 남쪽 서안평 대방 일대를 석권 하여 서진 초기에 평쥬자사 최필이 고구려로 망명(晉平州刺史刺使崔毖來奔) 했다.
이와 같이 한해 서쪽연안은 동오 손권 집권 시대 (吳 太祖 孫權, 229년 ~ 252년)에 한해의 서쪽 해상 교류가 왕성했다. 그 전에도 창해군이 나타 났던 발해만 연안 천진-안평구 일대에서 중원의 동해안을 따라 영자강 하류 지역을 거처 대만에 까지 이르렀다는 증거가 진시황의 불로초 불사약 을 구하러 갔다는 일화로 나타났다.
이렇게 넓은 시야에서 한해의 동서 연안을 살펴 보면, <한해의 동쪽 해안 일대, 즉 한반도에서 구주를 거처 유구 열도에서 발굴 되는 모든 고고학적 사료는, 중국사람 들이 직접 그 곳에 갖고 가지 않고, 고조선의 후예들이 한해 서북 지역에서 소유 했던 유물>이다. 그들이 관장 했던 영역에서 중원과의 교역이 왕성하여 중원 풍의 유물이 나타났다 하여 이를 중원 세력이 한해의 동쪽 연안에 진출 하여 남겨 놓은 유물이라고 풀이 할수는 없다.
앞으로 몇차례에 걸처 한예(韓濊)들이 한해 동쪽 해안선 일대에 남겼던 고고학적 유물들이 한예의 소유물이 었다는 증거를 보충 설명 하고자 한다.
끝
October 24, 2018
[1].三國志 倭人傳: 女王國東渡海千餘里,復有國,皆倭種。又有侏儒國在其南,人長三四尺,去女王四千餘里。
又有裸國、黑齒國復在其東南,船行一年可至。參問倭地,絕在海中洲島之上,或絕或連,周旋可五千餘里
[2].三國志吳主傳:淵果斬彌等,送其首于魏,沒其兵資。權大怒,欲自征淵.吳書曰:初,張彌、許晏等俱到襄平,官屬從者
四百許人。淵欲圖彌、晏,先分其人衆,置遼東諸縣,以中使秦旦、張羣、杜德、黃彊等及吏兵六十人,置玄菟郡。玄菟郡在遼東北,相去二百里,太守王贊領戶二百,兼重可三四百人。旦等皆舍於民家,仰其飲食。積四十許日,旦、彊別數日,得達句驪王宮,因宣詔於句驪王宮及其主簿,詔言有賜為遼東所攻奪。宮等大喜,即受詔,命使人隨旦還迎羣、德。其年,宮遣皁衣二十五人送旦等還,奉表稱臣,貢貂皮千枚,鶡雞皮十具。旦等見權,悲喜不能自勝。權義之,皆拜校尉。
[3].三國志 倭人傳:計其道里,當在會稽、東冶之東。其風俗不淫,男子皆露紒,以木緜招頭
[4].三國志吳主傳:江表傳曰:權於武昌新裝大船,名為長安,試泛之釣臺沂。時風大盛,谷利令柂工取樊口。權曰:「當張頭取羅州。」利拔刀向柂工曰:「不取樊口者斬。」工即轉柂入樊口,風遂猛不可行,乃還。權曰:「阿利畏水何怯也?」利跪曰:「大王萬乘之主,輕於不測之淵,戲於猛浪之中,船樓裝高,邂逅顛危,柰社稷何?是以利輒敢以死爭。」權於是貴重之,自此後不復名之,常呼曰谷。
[5].三國志吳主傳:黃龍二年(230년)春正月,魏作合肥新城。詔立都講祭酒,以教學諸子。遣將軍衞溫、諸葛直將甲士萬人浮海求夷洲及亶洲。亶洲在海中,長老傳言秦始皇帝遣方士徐福將童男童女數千人入海,求蓬萊神山及仙藥,止此洲不還。世相承有數萬家,其上人民,時有至會稽貨布,會稽東縣人海行,亦有遭風流移至亶洲者。所在絕遠,卒不可得至,但得夷洲數千人還. 三年春二月,遣太常潘濬率衆五萬討武陵蠻夷。衞溫、諸葛直皆以違詔無功,下獄誅。
[6].隋書 列傳第四十六:平陳之歲,有一戰船漂至海東牟羅國,其船得還,經於百濟,昌資送之甚厚,並遣使奉表賀平陳
其南海行三月,有牟羅國,南北千餘里,東西數百里,土多麞鹿,附庸於百濟
[7].三國志吳主傳:嘉禾元年春正月,建昌侯慮卒。三月,遣將軍周賀、校尉裴潛乘海之遼東。校尉裴潛乘海之遼東。秋九月,魏將田豫要擊,斬賀于成山。冬十月,魏遼東太守公孫淵遣校尉宿舒、閬中令孫綜稱藩於權,并獻貂馬 劉放傳: 太和末,吳遣將周賀浮海詣遼東,招誘公孫淵。帝欲邀討之,朝議多以為不可。惟資決行策,果大破之,進爵左鄉侯。魏氏春秋曰:烏丸校尉田豫帥西部鮮卑泄歸尼等出塞,討軻比能、智鬱築鞬,破之,還至馬邑故城,比能帥三萬騎圍豫
明帝紀:冬十月,殄夷將軍田豫帥衆討吴將周賀於成山,殺賀。
[8].三國志 明帝紀: 太和六年九月,行幸摩陂,治許昌宮,起景福、承光殿。冬十月,殄夷將軍田豫帥衆討吴將周賀於成山,
殺賀。十一月丙寅,太白晝見。群書治要 魏志下 傳:田豫,字國讓,漁陽人也。為護烏丸校尉。魏略曰:鮮卑素利等
數來客見,多以牛馬遺豫,豫轉送官。胡乃密懷金三十斤謂豫曰:我見公貧,故前後遺公牛馬,公輒送官,今密以此上,公可以為家資,豫張袖受之,答其厚意,胡去之後,皆悉付外。於是詔褒之曰:昔魏絳開懷以納戎,今卿舉袖以受狄金,朕甚嘉焉。乃賜青縑五百匹也。 故司空徐邈,征東將軍胡質,衞尉田豫,皆服職前朝,歷事四世,出統戎馬,入贊庶政,
魏氏春秋曰:烏丸校尉田豫帥西部鮮卑泄歸尼等出塞,討軻比能、智鬱築鞬,破之,還至馬邑故城,比能帥三萬騎圍豫
[9]. 三國史記 高句麗國本紀: 東川王十年,春二月,吳王孫權,遣使者胡衛通和。王留其使,至秋七月,斬之,傳首於魏 . 十六年,王遣將,襲破遼東西安平. 美川王: 三年,秋九月,王率兵三萬,侵玄●郡,虜獲八千人,移之平壤. 十二年,秋八月,遣將襲取遼東西安平. 十四年,冬十月,侵樂浪郡,虜獲男女二千餘口. 十五年,春正月,立王子斯由為太子。秋九月,南侵帶方郡. 十六年,春二月,攻破玄●城,殺獲甚衆. 二十年,冬十二月,晉平州刺史刺使崔毖來奔
[10].三國志吳主傳:今使持節督幽州領青州牧遼東太守燕王,乆脅賊虜,隔在一方,雖乃心於國,其路靡緣。今因天命,遠遣二使, 三月,遣舒、綜還,使太常張彌、執金吾許晏、將軍賀達等將兵萬人,金寶珍貨,九錫備物,乘海授淵。
[11].三國志吳主傳:淵果斬彌等,送其首于魏,沒其兵資。權大怒,欲自征淵.吳書曰:初,張彌、許晏等俱到襄平,官屬從者四百許人。淵欲圖彌、晏,先分其人衆,置遼東諸縣,以中使秦旦、張羣、杜德、黃彊等及吏兵六十人,置玄菟郡。玄菟郡在遼東北,相去二百里,太守王贊領戶二百,兼重可三四百人。旦等皆舍於民家,仰其飲食。積四十許日,旦、彊別數日,得達句驪王宮,因宣詔於句驪王宮及其主簿,詔言有賜為遼東所攻奪。宮等大喜,即受詔,命使人隨旦還迎羣、德。其年,宮遣皁衣二十五人送旦等還,奉表稱臣,貢貂皮千枚,鶡雞皮十具。旦等見權,悲喜不能自勝。權義之,皆拜校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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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24, 2018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