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에 배를 개발 하여 요순 시대에는 벌써 쪽 배(舟)를 쓰기 시작 했다[1]. 시경에는 배로 다리를 만들었다(造舟為梁)는 문구가 있고, 희발이 새운 주(周) 나라는 배를 타고 사방을 돌아 다녔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라 한다[2]. 동물 껍질로 배를 만들기도 했다[3].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호공이 박을 옆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다는 기록과 흡사 하다. 백제 신라 왜가 모두 발해-요동만 연안에 있던 시절이다.
본래 왜인으로, 처음에 박 호[瓠]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온 까닭에 호공이라 일컬었다고 했다[4].
표주박 호[瓠; hù hú huò gū/후/구 ]라고 읽는 글자는 사음자로 열고사 (列姑射)의 고(姑) 또는 호 후(胡, 豪, 淮, 揮)자로도 기록 했다. 산해경 해내경에는 조선이란 말이 나오고 그 당시에 문명의 기반이 되는 많은 장비와 기술을 개발 했다. 번우가 배를 개발(淫梁生番禺,是始為舟)하고 아들 손자 해중 길광이 나무로 수래 (番禺生奚仲,奚仲生吉光,吉光是始以木為車)를 만들었다. 말(馬)을 언제부터 부렸는 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선사시대 부터 바퀴(車)와 쪽 배(舟)를 만들어 사용 했다[5].
쪽 배(舟)의 어원을 고려 하면 밝다든 뜻(白, 古作𦣺) 글자와 같이 중앙 아시아로 부터 왔다. 서양에서 보트(Boat)라고 하는 어원이 배(舟)와 같은 듯 하다. 말(馬)을 이용할수 없는 지역에서는 쪽배(舟)를 타고 다녔다. 삼국지 왜인전에 배로는 10일 육로로는 한달 걸린다( 水行十日,陸行一月)고 했다. 동북 아시아 추운 지역에서도 박은 배(舟, Kayak)가 가장 중요한 교통 수단이였다.
간다는 뜻의 사음에서 카약 카누(Kayak, Canoe)하는 이름이 붙은 듯 하다. 세본에는 황제의 신하 한 사람이 북과 동전 (鼓貨)을 만들었고, 북적인이 배를 만들(狄作船) 었다. 함곡관 동쪽에서는 배(舟), 서 쪽에서는 배를 선(船)이라 한다. 유목민이 먼저 배를 사용 했다. 쪽 배를 연결하여 다리를 만들었고, 큰 배(船)도 먼저 만들었다.
수상 교류의 핵심은 배의 크기와 삿대 (paddle, oar) 그리고 동력이 어떻게 변해 왔나에 달렸다. 사기 대완열전에 “民商賈用車及船,行旁國或數千里”란 문구가 있다[6]. 그 곳 사람들은 왕의 얼굴을 새겨 넣은 금화를 사용하고, 큰 배를 만들어 풍력으로 먼 길을 다니면서 무역을 했다.
묵자( 墨子: Mòzǐ: 기원전 470?~391?)에; 비가 활을, 여가 갑웃을, 해중이 수래를, 교수(巧垂作舟)가 배를 만들었다[7]. 순자가 활을 설명 하면서 <떠돌이들 (부여, 浮游)이 사는 곳에는 오만가지 재주꾼이 다 있다>는이 문구와 상통 한다. 교수란 글자를 보면 이는 돗단 배를 뜻한다. 상서에는 북해 신(若; 北海若,北海海神名[8])이 큰 강을 건너려고 사람을 시켜 배와 삿대를(若濟巨川,用汝作舟楫) 만들었다. 북해약(北海若)이 하백(河伯)과 대화한 내용이다. 하백은 치수사업을 성공 시킨 사람의 대명사다. 같은 내용이 “국어, 여씨춘추, 잠부론” 등에 실려 있다. 한서에는 황제가 배를 만들었다“昔在黃帝,作舟車以濟不通” 했고, 후한서와 삼국지에는 단군 백익이 배를 만들었다“益作舟船”고 했다. 신이경에는 “동해 창랑주에 거목이 자라 그곳 사람들이 이를 이용하여 배와 삿대를 만들었다”고 했다[9].
이를 만든 사람의 출처는 상나라 무정(武丁, 기원전 1250년 ~ 기원전 1192년)이 <부여의 선조라고 풀이한 부열을 발견한 불암성 공사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기술한 설명 (說命上)편에 실렸다[10].
진시황이 양자강을 건너던 배가 120리를 표류 했다는 기록도 있다. 한무제 때에는 누선(樓船)이 등장 했다. 아직 풍력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지는 못한듯 하다.
한나라 누선 또한 열구(列口)에 정착 했다. 앞서 인용한 산해경 해내경에 <남방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키가크고 피부가 검은 사람이 있다>한 문구는 위진 시대에 동남아로 부터 배를 타고 중국에 들어온 인도 사람 불승(佛僧)을 묘사 했다.
삼국연의에 극적인 장면이 赤璧대첩이다. 삼국시대에는 특히 남쪽에서 배를 이용한 교류가 왕성해 젔다. 손권이 큰 배를 만들어 이름을 장안 (孫權裝大船,
名之曰長安)이라고 붙였다. 그러나 아직 바닷가에는 정지를 못하고 강 하구에 정착 했다[11]. 그러나 그가 고구려와 협력하려고 보냈던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에 도착 하지 못하고 죽었다. <동오(東吳)수장 손권이 호위 (胡衛)를 특사로 조위를 치려는 계획을 상의 하려는 목적으로 236년 봄에 만주에 있던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十年, 재위: 227년- 248년) 에게 보냈다 . 이 사건을 진수는 위약에서 인용 했다고 밝히 면서 고구려가 아니라 238년에 공손연 (公孫淵) 에게 <장미(張彌)와 허안(許晏) 등을> 보냈다. 이름을 보면, 도착한 사람들은 고조선의 후예들이다. 그러나 진수는 한해의 서쪽 통로인 중국 동해안에 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다. 은미하게 대만을 표현한 문구가 사실을 보였다. 진시황이 양자강 하구에서 200여리를 표류하다 간신히 살아나 회계에서 하신이 된 대우(祭大禹)에게 제사를 바치고 북으로 올라와 산동 반도 낭아에서 산동성 서시(徐市)등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듣고 봉래산에 가서 선약(仙藥)을 구해 오라고 젊은 남녀를 바다로 내 보냈다[12]. 그들은 한해를 건너지 못하고 해안선을 따라 갔다. 수천명이 대만에 정착 하여 東夷가 사는 섬 이주(夷洲) 라고 했고 그 가까이 단군이 지도자란 뜻에서 단주(亶洲)에 도착 했다. 이 두 섬 사람들이 양자강 하구에 있는 회계(會稽)와 무역을 했다니 대마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단주가 있었다. 그를 정벌한 사람이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 위온(衞溫)이다[13]. 한해의 서쪽 해안은 삼한의 후예들이 이렇게 개척 했다.
삼국지 왜인전에는 일본 구주 지역(倭)으로 가는 길을 계산해 보면 회계에서 동쪽 으로 부는 바람을 타고 동쪽 으로 가면 (東冶之東)그 곳에 이른다>고 했다. 야 (冶) 자는 바람을 이르키는 풀무질을 뜻한다. 치우가 무쇠 (鐵)를 유출하는 곳이 아홉 곳에 있었다하여 치우조구야 (蚩尤造九冶)란 문구가 시자(尸子)에 있다[14].
회계에서 배를 타고 직접 가지는 못했지만 나침판과 풍력이 항해에 이용 되었다고 본다. 양서(梁書)에도 회계에서 직접 갔다는 기록이 없고 삼국지 왜인전에 실린 경로를 인용하여 왜의 위치를 밝혔다. 그 기술을 삼한의 후예가 먼저 개발 하여 중국의 동쪽 바다를 한해(名瀚海)라 했다[15]. 뒤에 나타난 북제(北齊;550-577년), 즉 비류의 후손이 세운 대륙백제가 중국 동해안 복건성 해안에서 떠나 제주도를 지나 구주에 이르는 해상로를 개발 했다. 대륙백제가 분산 되였지만 복건성 해안에는 백제 유민이 살던 곳이 있어 탐라도에 표류한 수나라 전한을 백제 해안을 통해 인양해 갔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친입하려는 계획을 세울 때에 백제가 항로를 안내해 주겠다고 자원 했지만, (근신히 중원을 통일한 수문제는) 백제가 딴 마음이 있지나 않아 하여 거절 했다. 어느 정도 자치 세력을 유지한 대륙백제의 잔유 새력이 수나라 때에도 중원에 있었다.
이렇게 대백제 세력이 방대한 영역을 뱃기로 다니면서 교류를 했다. 이를 삼국유사에는 백제왕의 성 부씨(扶氏)를 혹자는 여주 사람(餘州者)이라고 한다[16]. 백제에는 신인(神人)이 일산(日山) 오산 (吳山) 부산 (浮山) 이라는 세 산(三山)에 있었는데, 전성기에는 산위를 날아 다님이 아침 저녁으로 그치지 않았다. 백제는 동서 두곳에 수도가 있었다. 대륙 백제와 반도 백제, 열도 백제간의 활발했던 교류를 기록한 문구다. 이들이 관장하던 바다를 고려도경에는 햇님의 후손이 관장하는 바다라 하여 개/해양(葢洋, 海洋)이라고 기록 했다[17].
태평광기에는 당나라 때 산동성 사람; 설의료 (薛宜僚)가 책증사(冊贈使)로 선출 되여 배를 타고 신라로 가다 풍랑을 만나 청주와 등주 사이(산동성 북쪽 해변)에서 1 년을 보내다가 결국 청주로 돌아왔다[18].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 사람들이 옛부터 바다에 연하여 배를 다스리는 솜씨가 우수하다고 했다.
당나라 때 구양수가 편찬 한 예문류취 (藝文類聚)에는 배(舟)의 변천 과정을 설명 했다. 모든 기록에는 고조선 사람들, 즉 북적(狄作舟)이 배를 만들었다. 고조선의 후예, 삼한사람들이 태평양 서쪽 연안을 관장 했다. 그를 누비던 대 백제(大百濟)가 몰락 하고, 뒤를 이는 왜가 해상권을 잡아 왜구라 했다(지도 참조). 그 후에 중국 남쪽에서 나타난 남송에서 신주(神舟)라는 큰 배를 만들었고, 1421년에는 명 나라에서 동남아 인도양을 거처 아프리카 서쪽에 이르렀다. 이 해상로가 지중해 연안에 알려져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널 계획을 구상 했다.
끝
September 18, 2018
[1]. 《說文》舟也。《世本》共鼓貨狄作船,黃帝臣。《揚子·方言》舟,自關而西謂之船。舟:舟船。
《墨子》云:工倕作舟。《吕氏春秋》云:虞姁作舟丗本曰共鼓貨狄作舟二人並黃帝臣又姓左傳晉大夫舟之僑.
[2].舟:舟船。《墨子》云:工倕作舟。《吕氏春秋》云:虞姁作舟丗本曰共鼓貨狄作舟二人並黃帝臣又姓左傳晉大夫舟之僑.
又與周通。《周禮》作舟以行水。《註》故書舟作周。鄭司農云:周當爲舟。《詩·大雅》何以舟之。《朱註》之遙反。
[3].《正字通》皮船,明少保戚繼光濟水法,用生牛馬皮,竹木緣之如箱形,火乾,再用竿繫助之,以浮水。一皮船可乗一人,兩皮船合縫,可乗三人。又《韻會》衣領曰船。《正字通》俗以船爲襟穿.
[4].三國史記 -> 新羅本紀第一:辰人謂瓠為朴,以初大卵如瓠,故以朴為姓。居西干,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瓠公者,未詳其族姓。本倭人,初以瓠繫腰,渡海而來,故稱瓠公。
[5]. 山海經 海內經 帝俊生禺號,禺號生淫梁,淫梁生番禺,是始為舟。番禺生奚仲,奚仲生吉光,吉光是始以木為車。
史記·夏本紀:“陸行乘車,水行乘船,泥行乘橇,山行乘檋”
[6].史記 大宛列傳:安息在大月氏西可數千里。其俗土著,耕田,田稻麥,蒲陶酒。城邑如大宛。其屬小大數百城,地方數千里,最為大國。臨媯水,有市,民商賈用車及船,行旁國或數千里。以銀為錢,錢如其王面,王死輒更錢,效王面焉。畫革旁行以為書記。其西則條枝,北有奄蔡、黎軒。
[7]. 莊子 內篇 應帝王: 南海之帝為儵,北海之帝為忽,中央之帝為渾沌. 광개토왕 비문:沸流谷忽本西城山上. 新唐書: 使拜祚榮為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以所統為忽汗州,領忽汗州都督。自是始去靺鞨號,專稱渤海. 忽汗城. 일본의 어원.
[8]. 莊子 外篇 秋水: 河伯曰:「然則吾大天地而小毫末可乎?」北海若曰:「否。夫物,量無窮,時無止,分無常,
終始無故。河伯曰:「然則我何為乎?何不為乎?吾辭受趣舍,吾終奈何?」北海若曰:「以道觀之,何貴何賤,
是謂反衍,無拘而志,與道大蹇。北海若曰:「井蛙不可以語於海者,拘於虛也
[9].神異經: 東海滄浪洲生強木焉,洲人多用作舟楫.
[10].尚書 商書 說命上: 高宗夢得說,使百工營求諸野,得諸傅巖,作《說命》三篇. 命之曰:「朝夕納誨,以輔台德。若金,用汝作礪;若濟巨川,用汝作舟楫;若歲大旱,用汝作霖雨
[11].舶. 廣韻 陌·白》舶:海中大船: 樊口之北有灣,昔孫權裝大船,名之曰長安,亦曰大舶
吳中梅雨旣過,淸風彌旬,謂之舶趠風。蘇軾有舶趠風詩。
[12].三國志 吳主傳: 遣將軍衞溫、諸葛直將甲士萬人浮海求夷洲及亶洲。亶洲在海中,
長老傳言秦始皇帝遣方士徐福將童男童女數千人入海,求蓬萊神山及仙藥,止此洲不還
[13]. 史記 秦始皇本紀: 齊人徐市等上書,言海中有三神山,名曰蓬萊、方丈、瀛洲,僊人居之。請得齋戒,與童男女求之。
於是遣徐市發童男女數千人,入海求僊人。過丹陽,至錢唐。臨浙江,水波惡,乃西百二十里從狹中渡。上會稽,祭大禹,望于南海,而立石刻頌秦德. 還過吳,從江乘渡。并海上,北至瑯邪。方士徐市等入海求神藥,數歲不得,費多,恐譴,
乃詐曰:「蓬萊藥可得,然常為大鮫魚所苦,故不得至.
[14].冶:《正韻》鎔也,銷也,鑄也。《韻會》爐鑄謂之冶。引尸子,蚩尤造九冶。又鑄匠曰冶。《尸子》云:蚩尤造九冶又妖冶亦姓左傳衞大夫冶厪.
[15].三國志 魏書三十 倭人傳: 諸國文身各異,或左或右,或大或小,尊卑有差。計其道里,當在會稽、東冶之東。
其風俗不淫,男子皆露紒,以木緜招頭。其衣橫幅,但結束相連,略無縫.
[16]. 三國遺事: 百濟王姓扶氏。故稱之。或稱餘州者。統和十五年丁酉五月日餘州功德大寺繡帳。又昔者河南置林州刺史
[17].宣和奉使高麗圖經:海水味劇鹹苦不可口凡舟船將過洋必設水櫃廣蓄甘泉以備食飲葢洋中不甚憂風而以水之有無為生死.
山島林壑舟楫器物盡作金色人人起舞㺯影酌酒吹笛心目欣快不知前有海洋之隔也苦苫.
[18]. 太平廣記 薛宜僚:薛宜僚,會昌中為左庶子,充新羅冊贈使,由青州泛海。船頻阻惡風雨,至登州。
州原作舟,據明鈔本改。却漂。廻泊青州。郵傳一年.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