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韓汗)이 다스리던 바다 한해(澣海).
한해(澣海)의 어원: 한해(翰海)란 이름은 사마천이 붙인 이름이고, 한해(澣海)란 이름은 진수는 왜인전에서 사용 했다. 사기 흉노열전에서 흉노를 몰아 버리고 선고언 임한해 이환 (禪姑衍,臨翰海而還)이라 했다[1]. 고사국(姑射國) 에서 기도를 드리고 언수(衍水, 浿水)가 한해에 임하는 곳에 이르러 돌아 왔다[2]. 오늘의 만리장성 동쪽 끝 산해관에 이르러 돌아 왔다는 뜻이다. 당대의 석학이 옛적 북해 (北海)라고 부르던 즉 발해(渤海)를 한해(翰海)라 했다. 이 세 이름이 같은 바다란 증거는 문헌 여러 곳에 있다. 삼국지 선비전에서 단석괴(檀石槐)에 관해 설명 했다. 발해 서남쪽 연안에 한인( 汗人)이 사는 한국(汗國)있었다. 같은 곳에서 발생한 같은 사건을 후한서 에서는 왜인 왜국이라 했다[3]. 발해만 연안 에 있던 한국 사람 한인( 汗人)이 고기 잡던 바다가 한해(汗海, 翰海)다.
공자를 니계(尼谿)에 봉하겠다고한 앵자 춘추와 좌씨 춘추 희공 4년편에도 나타난 북해(北海)가 한해(翰海)다[4]. 맹자는 백이숙제가 피신 했던 곳, 즉 고죽국 해안을 북해라 했다[5].
공자님이 땟목을 만들어 타고 가서(設浮於海) 九夷의 땅에 살고 싶다고한 곳이다. 이곳이 기자를 따라 올라온 상나라 유민들이 정착 했던 고조선 땅이다. 하여 단군 (壇君)이 잠시 피했다가 되 돌아 왔다. 공자는 그 곳을 군자가 사는 곳 (君子居)이라 했다. 구리 땅에 가서 살고 싶어 했다는 문구의 출처는 공자님이 산동성 북부에 있던 제나라를 방문 했던 때에 나타난 일화다. 제 경공 (齊景公:기원전 547년 ~ 기원전 490년)이 제상 안자(晏子,晏嬰, ? ~ 기원전 500년)에게 공자님의 소원을 들어 주어 니계 (尼谿)에 봉하겠다고 했다[6]. 조선열전에 니계상 참 (尼谿相參) 이라는 문구가 있다 . 조선 땅은 공자님이 그리던 니계를 소유하고 있었다. 니계는 요동(遼東) 이라고 하던 천진-당산 일대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서쪽 해안선을 따라 의무려산 서쪽에 도읍을 정했다. 그 도읍지가 왕검성이다. 어해(於海)는 해하(海河) 연안 천진 일대, 즉 니계를 뜻했다.
발해만 서쪽 해안선을 따라 육로 또는 뱃길로 남만주에 이르 렀다. 이 길을 따라 남만주에 살던 위만 (衞滿)이 내려와 그를 연나라 사람(燕人)이라고 했다[7]. 이 통로를 따라 남만주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정착한 곳을 창해군(蒼海郡, 滄海之郡) 이라 했다. 산동성 북쪽 해안에서 요동만을 가로 질러 남만주에 이르는 해상 통로가 개발 되기 전에는 발해만 서쪽 해안이 남만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 였다. 이 길을 우거왕이 막았다고 트집을 잡아 한무제가 왕검성으로 친입 했다[8]. 한나라 군사는 이 길을 따라 갈수 밖에 없었다.
공자님 이전에 관자가 남긴 管子에는 산서성 북부 일대에 있던 발조선 (發朝鮮)을 북주, 여주(餘州, extra state), 북주후 지도자를 북주후모(北州侯莫)라고 했다. 그 일대에 성수(聖水)가 흘렀다. 이 여울을 예수(濊水), 호타하 쌍건하 (桑乾河) 등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수경주에는 이 지역을 발해(勃海) 라고 했다. 서주의 제후국 진(晉)의 영역이었다. 이지역을 노예 예자 예성(隷省)이라고도 했다. 명나라 때에는 더 동쪽으로 진출하여 하북성을 직예성(直隷省)이라고 했다.
소진이 연문후와 나눈 대화에는 연의 남쪽에 호타하(呼沱)와 역수(易水)가 진시황과 경계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호타하란 이름을 숨겼다[9].
진개가 기원전 300년경에 동호 땅(고조선 영토)를 점령하기 이전에는 조선의 영역이 북경 일대에 까지 이르렀다. 하여 연의 동쪽에 조선이 있고 그 동쪽에 요동(燕東有朝鮮、遼東)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루번(北有林胡、樓煩)이 있었다. 루번은 부유와 같은 부여(扶餘)족이고, 임호는 고구려의 전신이다.
천진시를 가로 질러 발해만으로 들어가는 해하(海河) 수계의 남쪽이 전국시대에 중원 세력과의 경계였다. 이 일대에 예맥(濊貊)족이 살던 지역이라 맥국(貊國)이라 했다. 산해경에는 개/해국 (蓋國在鉅燕南,倭北。倭屬燕)이라고 했다. 이 문구는 <한서에 조선이 바다 안에 있다(朝鮮在海中), 후한서에는 왜가 한의 동남 바다 안에 있다(倭在韓東南大海中), 삼국지에는 모성 한씨(因冒姓韓氏) 준왕이 바다 안에 있다(準王海中)는 뜻>과 일치 한다. 하여 그들이 관장 하던 바다를 한해(韓/翰海) 라고 했다. 점차로 삼한의 후예들이 배를 타고 멀리 진출 했다. 삼국지에는 <물수 변으로 바꾸어 적어 대한해협을 한해(澣海)라> 했다. 대마도에서 대한 해협을 지나 철리를 가면 작은 섬이 있다. 대마도 보다 작지만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려 큰나라 (一大國)라고 했다. 이끼섬(壱岐島, 一大國)이 해상 교류의 심장부가 되어 여인숙이 삼천호(有三千許家)가 있었다고 했다.
송 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 갔던 서긍은 한해(翰海)를 개/해양(葢洋 葢:
《正字通》同蓋) 이라고 했다.
청나라 때 고염무(顧炎武:1613년-1682년)는 통전의 내용을 인용하여; 「三韓之地在海島之上,朝鮮之東南」라고 했다:
<삼한(三韓) 땅은 바다에 있는 여러 섬들이다. 조선반도의 동남쪽이다.>
삼한 땅은 일본열도 서남 해안에서 유구에 이르는 여러섬이 포함 되였다는 뜻이다.
당태종이 남만주지역에서 고구려와 싸우고 남긴 글 극고구려백암성소 (克高麗白巖城詔)에 고구려 사람들을 삼한사 (三韓士)라 부르고 백암성 일대를 변진지야 (弁辰之野)라 했다.
삼한의 후예들이 살던 땅은 발해만 서쪽 일대에서 유구열도에 이르렀다.
문헌에서 찾아 정리한 삼한 땅이다. 그 지역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적은 마땅히 삼한의 후예들이 남겼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처 이를 살펴 보기로 한다.
끝.
September 19, 2018
[1].史記 列傳匈奴列傳: 漢驃騎將軍之出代二千餘里,與左賢王接戰,漢兵得胡首虜凡七萬餘級,左賢王將皆遁走。
驃騎封於狼居胥山,禪姑衍,臨翰海而還.
[2]. 海内北經:蓋國在鉅燕南,倭北。倭屬燕. 朝鮮在列陽東,海北山南。姑射國在海中,屬列姑射,西南,山環之
[3]. 三國志 魏書三十 鮮卑傳:聞汗人善捕魚,於是檀石槐東擊汗國,得千餘家,徙置烏侯秦水上,使捕魚以助糧。至于今,
烏侯秦水上有汗人數百戶
[4].北海之別有翰海..翰海之南有渤鞮海則北海即渤海也. 강희자전: 瀚:《廣韻》《集韻》《韻會》《正韻》𠀤侯旰切,
音翰。北海名。《史記》作翰海。《霍驃騎傳》登臨翰海。春秋左傳 僖公四年: 齊侯以諸侯之師侵蔡,蔡潰,遂伐楚。
楚子使與師言曰:君處北海,寡人處南海,唯是風馬牛不相及也。不虞君之涉吾地也,何故
[5]. 孟子 盡心上: 孟子曰:「伯夷辟紂,居北海之濱,聞文王作興,曰:『盍歸乎來!吾聞西伯善養老者。』
史期 滑稽列傳: 武帝時,徵北海太守詣行在所。有文學卒史王先生者,自請與太守俱,「吾有益於君」,君許之
晏子春秋 外篇下:晏子對曰:「有。足游浮雲,背凌蒼天,尾偃天閒,躍啄北海,頸尾咳於天地乎!然而漻漻不知六翮之所在。」漢書 五行志: 宣帝本始四年四月壬寅,地震河南以東四十九郡,北海琅邪壞祖宗廟城郭,殺六千餘人
[6].史記 世家 孔子世家: 景公說,將欲以尼谿田封孔子。晏嬰進曰:「夫儒者滑稽而不可軌法;倨傲自順,不可以為下
墨子閒詁 非儒下: 景公說,欲封之以尼谿,《史記·孔子世家》同,《晏子春秋·外篇》作「爾稽」
[7].史記 朝鮮列傳: 朝鮮王滿者,故燕人也. 三國志 濊傳: 陳勝等起,天下叛秦,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
燕人衞滿,魋結夷服,復來王之。漢武帝伐滅朝鮮,分其地為四郡。
[8].史記 朝鮮列傳:遼東太守即約滿為外臣,保塞外蠻夷,無使盜邊;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勿得禁止
傳子至孫右渠,所誘漢亡人滋多,又未嘗入見;真番旁眾國欲上書見天子,又擁閼不通。
[9].史記 蘇秦列傳: 去游燕,歲餘而後得見。說燕文侯曰:「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雲中、九原,
南有♀、易水,地方二千餘里 .戰國策 燕一:蘇秦將為從,北說燕文侯曰:「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
西有云中、九原,南有呼沱、易水。地方二千餘里.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