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It is a tragic Love Story between Prince Ho-dong of
Goguryeo and Princess Nak-Rang. She was the daughter of King
Choe-ri. Though era of event is well documented, location is still in
dispute. The author explored the details. Prince Ho-dong did not
cross over the Yalu River The OkJeo (沃沮) territory was in the
Liaodong Peninsula.
It was a lovely April. One day, the Prince Ho-dong went out for
hunting to the Oak-Jo territory and met the King Choe-ri, who came
out for casual walk. By looking the stranger, the king realized that
the lad was not an ordinary hunter. King Choe -ri asked. The
stranger answered that he is the prince of Goguryeo. The king
introduced the prince to his lovely daughter Nakrang. They felt in
love at first glance. Both of them were very faithful to the parents.
Prince Ho-Dong relayed his father’s request to the Princess. She
carried on and disabled the alarm system. Goguryeo army destroyed
Nak-Rang Kingdom in 38 AD). King Choe-ri killed his daughter.
Prince Ho-Dong killed by himself. Thereafter Goguryeo extended
territory to the west became a strong Nation.
논란의 근거
사기에는 낙랑 옥저“沃沮 樂浪”하는 이름이 없다. 진수가 현지 노인들의
예기를 듣고 기록한 동이전에 이 두 이름이 고구려 설명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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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志 魏書三十 高句麗傳: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
接。都於丸都之下,方可二千里. 三國志 魏書三十:以沃沮城為玄菟郡。後為夷貊所侵,徙郡句麗
西北,今所謂玄菟故府是也。沃沮還屬樂浪。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廉斯鑡為辰韓右渠帥,聞
樂浪土地美.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남쪽은 예맥 조선, 동쪽에 옥저, 북쪽에 부여와 접하고 수도는 환도성다.]
진수가 진한 6 국이라 하던 지역이다. 옥저는 현토성에 속했다. 뒤에는
(고구려에게) 현토성을 빼았겨 옥저가 낭랑군에 속했다. 진한전 (辰韓傳)
에는 진한 사람들은 떠나고 남아 있던 사람들을 낙랑인(樂浪人) 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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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은 옛부터 삼한 사람들이 살던 곳(樂浪本統韓國)이란 문구도 있다.
역계경(歷谿卿)이 우거왕에게 간언 하다 실패 하여 추종자 2000 명을
거느리고 동쪽 진국으로 갔다는 곳이 한전과 진한전에 실렸다.
사기 조선 열전에 나오는 조선상 로인 최(相路人之子最)의 일파가 요동
반도에 정착하여 세운 나라가 최리(崔理)의 낭랑국이라 본다.
한낙랑(漢樂浪)은 고을 군(郡)자로 쓰던 한나라의 통치 영역이였다. 최리를
왕(樂浪王崔理)이라고 했다. 다스리던 지역은 하나의 독립된 국가였다. 여러
군소읍을 다스리던 지도자라고 볼수도 있다. 최리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대릿 사위로 맏아드릴 생각이 있었다고 본다. 두 젊은 이는 곧
깊은 사랑에 빠졌다. 고구려의 제 3 대 국왕 대무신왕(大武神王, 4 년 ~
44 년)이 제위 3 년(20 AD)에 시조사당 (東明王廟)을 세우고, 제위 20 년
(38 AD)에 최리의 낭랑국을 파멸 했다. 기록을 잃어(史失其名) 알수는
없으나 고구려와 부여는 모두 동명을 시조로 인식 했다.
시대적 배경:
한무제가 108 BC 만주 서남쪽에 있던 위만 조선의 수도를 점령 하기
전에는 동북아시아는 중원 세력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였다.
한무제가 위만 조선의고급 관리들에게 작위를 주고 온간 수단을 다해무마
하려 노력 했지만 점령한 지역에서는 계속 반항이 있었다. 일년 후에야
위만 조선 경기 지역에 현도군(玄菟郡)을 설치 했다. 피해자가 많았다.
진수는 골도(骨都)라 했다. 이를 오골성 (烏骨城), 그 일대를 지나는 여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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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志 魏書三十 辰韓傳:: 辰韓在馬韓之東,其耆老傳世,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其言
語不與馬韓同,名國為邦,弓為弧,賊為寇,行酒為行觴。相呼皆為徒,有似秦人,非但燕、齊
之名物也。名樂浪人為阿殘;東方人名我為阿,謂樂浪人本其殘餘人。始有六國,稍分為十二國
오천(烏川)이라 했다.
3 서쪽에서 온 유목민 말갈 (靺鞨; Mòhé) 이라고
부르던 오환족이 많이 학살 당했다는 증거다.
고조선의 유민들이 육지로 또는 해안을 따라 분산 되었다. 이를 한서에는
“朝鮮이 바다로 지나 갔다. 북방 호의 영역”에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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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 땅에 살던 사람들이 요하 동쪽에도 살고 있었다. 고구려 시조
추모왕 또한 요하를 건너 심양-요양 일대에 있던 졸본 부여에 정착 하여
동부여왕의 사위가 되여 왕위를 이어 받고 국호를 고구려라 했다.
5 그
지역에 “비류국 (沸流國), 송양국 (松壤國), 말갈(靺鞨; Mòhé, 모허) 행인
(荇人)국 등 여러 부족 국가가 있었다.
활을 잘 쏘았다는 동명(東明)이 부여와 고구려의 시조로 나타난다.
광개토대왕 비문도 시조의 북부여 천제의 아들(北夫餘天帝之子)이라 했다.
일연 스님은 부여와 고구려 시조에 관한 기록의 출처를 중원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북부여 고기(北扶餘古記) 와 단군기 (壇君記) 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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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종합해 보면 동명(東明)이란 도교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단군왕검
백익을 죽인 계(帝啟)가 사는 곳을 금궁(啟金宮),옥보구소 장인거지
(玉寶九霄丈人居之),즉 죽어서 하늘 나라로 간 사람의 장인이 사는 곳이
하고, 동명군 (東明君)이 사는 곳을 자미궁 (紫微宮)이라 했다. 신이경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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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志 東夷傳:其後高句麗背叛,又遣偏師致討,窮追極遠,踰烏丸、骨都,過沃沮,踐肅慎之
庭,東臨大海.史記 匈奴列傳:置左右賢王,左右大將,左右大都尉,左右大當戶,左右骨都侯.
三國史記 高句麗本紀第九:乘高句麗●懼,倂力拔烏骨城,度鴨●水,直取平壤.。達賈出奇掩
擊,拔檀盧城,殺酋長,遷六百餘家於扶餘南烏川,降部落六七所。王大悅,拜封達賈為安國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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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書: 其後漢兵擊拔朝鮮,以為樂浪、玄菟郡。朝鮮在海中,越之象也;居北方,胡之域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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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志 韓傳:見周衰,燕自尊為王,欲東略地,朝鮮侯亦自稱為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
大夫禮諫之,乃止。使禮西說燕,燕止之,不攻。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
會。否死,其子準立。二十餘年而陳、項起,天下亂,燕、齊、趙民愁苦,稍稍亡往準,準乃置
之於西方。朝鮮與燕界於浿水。燕人衞滿,魋結夷服,復來王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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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遺事: 北扶餘古記云。前漢書宣帝神爵三年。天帝降於訖升骨城.名柳花。與諸弟出遊。時
有一男子。自言天帝子解慕漱。名柳花。與諸弟出遊。時有一男子。自言天帝子解慕漱。誘我於
熊神山下鴨綠邊室中知之而往不返壇君記云。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有產子名曰夫婁。今按此
記。則解慕漱私河伯之女而後產朱蒙。壇君記云產子名曰夫婁。夫婁與朱蒙異母兄弟也
동방외에 동명산이 있고 그 위에 화려하게 차려 놓은 궁을 천지장남지궁
(天地長男之宮)이라 했다.
7 역사에 나오는 동명(東明)이란 이름자는
단군왕검 백익의 후손을 뜻한 글자다. 비문에 모하백 여랑 (母河伯女郞)
이란 문구가 치수 사업을 주관 했던 단군왕검 백익의 후손을 뜻한다.
추모왕이 요하를 건너기 전에 사귀었던 부여국 예씨(禮氏)의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8 그가 고구려 2 대 유리왕(瑠璃王, 기원전 38 년 ~
기원후 18 년) 이다. 졸본에 와서 부여국 공주와 결혼 하여 태어난 아들
둘이 고향을 떠났다. 형 비루는 전국시대 말기 수도가 있었던 발해만
서남쪽 해안 창해군이 있던 곳에 정착 했다. 삼국 사기와 광개토 대왕
비문에 나오는 襄平이다. 이를 대방고지 (帶方故地) 즉 옛대방 땅이라 했다.
한국에서는 인천이라 한다. 잘못이다.
동생 온조는 요하 동쪽에서 더 해안으로 내려와 오늘의 海城시 일대에
정착 했다. 이를 하남위례성 (河南慰禮城)이라 한다. 이를 한반도 평양 또는
서울 이라 한다. 잘못이다. 오늘의 해성시 일대에 처음 도읍을 정했다. 먼저
그곳에 살던 말갈(靺鞨)족의 위협을 받아 얼마 후에 대동강 하류, 강서고분
이 나타난 지역에 수도를 정했다. 남만주에서 위만에게 쫒겨온 준이 마한
땅에 가서 왕이 되었던 곳이다. 온조 또한 준이 지나온 경로를 밟았다. 요동
반도에 있던 첫 수도가 위협을 받아 해상로를 따라 한반도로 내려 왔다.
추모왕과 온조왕의 첫 수도가 말갈족과 인접해 있었다. 옥저 (沃沮)에서
신라 박혁거세에게 사신을 보냈다. 신라 또한 말갈, 낭랑, 왜와 인접해
있었다. 모두 남만주 요하 동쪽에 정착 했었다는 증거다.
호동의 가계: 호동 왕자는 고구려 3 대 무휼 대무신왕(無恤 大武神王;? –
44 년)의 셋째 아들이다. 대무신왕의 두쩨 부인이 호동 왕자의 어머니다.
그녀는 부여왕 대소의 동생 (扶餘王帶素弟) 이 갈사수 연안 (曷思水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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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太平御覽 :《上清經》曰:啟金宮,玉寶九霄丈人居之.紫微宮,東明君居之.神異經: 東方外有東
明山,有宮焉,左右有闕而立,其高百尺,畫以五色,青石為墻 高三仞,門有銀榜,以青石碧
鏤,題曰「天地長男之宮」。https://zh.m.wikipedia.org/上清經是中國道教重要經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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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史記 朱蒙元子,母禮氏。初,朱蒙在扶餘, 娶禮氏女有娠.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정착하여 새운 갈사국왕의 손녀다. 할아버지가 2 대 유리 명왕, 할머니가
부여왕의 딸 예씨 부인이다. 유리명왕(瑠璃明王)은 기원전 17 년에 골천
(鶻川)에 별궁 (別宮)을 지었다. 골천이란 우거왕이 살해 당한 골도(骨都),
즉 수도를 지나는 여울이란 뜻이다.이를 왕검성(王儉城)으로 풀이 한다.
사마천의 조선열전에는 왕검성(王儉城)이란 글자가 없다. 왕험성
(王險城) 또는 왕험 이라 했다. 잘못이다. 왕검(王儉)이란 글자는 사마씨의
진 (司馬晉)나라가 망한 이후 안씨 가훈에 처음 나타난다.
겨울 10 월에 송양왕의 딸 송씨(王后 宋氏)가 죽자 유리명왕은 다시 두
여인을 후처로 삼았다. 하나는 화희(禾姬)인데 골천인 (鶻川人)의 딸이고,
또 하나는 치희(稚姬)인데 한나라(漢) 사람의 딸이다. 골천인 (鶻川人)이란
골도(骨都)가 있던 위만조선 경기지역 출생이란 뜻이다. 두 여자가 다투며
화목하지 않았으므로 대왕은 양곡(凉谷)에 동·서 2 궁을 지어 각각 살게
하였다. 그 후에 대왕이 기산(箕山; 醫巫閭山)으로 사냥을 나가 7 일 동안
돌아오지 않자 두 여자가 서로 다투었다. 치희(稚姬)가 도망쳐 돌아갔다.
대왕은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꾀꼬리(黃鳥)를 보고 감탄하여 읊은 시문이
황조가(黃鳥歌)다. 중원의 난을 피해 중국 사람들이 남만주에 올라 왔다.
황룡국이 옛 위만조선의 수도 였던 곳에 있었다. 황룡국 왕이 선물로
고구려에 준 활을 태자 도절(都切)이 “이 따위가 활이냐”며 활을 꺽어
버렸다. 이에 부친의 꾸지람을 참지 못해 뛰어가 창끝에 몸을 던져 자살
했다. 작은 형 해명(解明) 또한 죽어, 서기 4 년에 유리왕의 셋쩨 아들이
태자로 책봉 되어 제 3 대 대무신왕 (大武神王,재위 18 년 ~ 44 년)이다.
동부여 와의 전쟁에서 대소왕을 죽이고 동부여를 복속시켰다. 광개토 대왕
비문에, 인견 황룡래 불영왕(因遣黃龍來不迎王)이라 색인 돼 있다. 황룡국
에서 보낸 사신이 광개토대왕을 살해 했다는 뜻이다.
중원 역사에서는 전후한 시기에 등장한 왕망(王莽, 기원전 45 년 ~
기원후 23 년)이 고구려가 요서를 약탈해서 꾀임수로 고구려 장군 후도
(句麗侯騊)를 잡았다. 그는 호동 왕자의 형 또는 삼촌벌 되는 고구려 왕자
였다.
9 이 시절에 김일제의 후손이 후한을 세운 광무제 (光武帝; 25 년 ~
57 년)를 피해서 천진항 일대로 올라 와서 신라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신원이 불확실한 공손도(公孫度, ? ~ 204 년) 가 나타나 부여왕 위구대의
대릿 사위로 발해만 연안 양평현(襄平) 에서 웅거 했다. 그의 손자 공손연이
동오 손권과 계획 하다 양평성에서 죽었다.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할 당시
백제 고이왕은 장군 진충(眞忠, 真忠) 으로 하여금 낭랑을 습격 하도록 하락
했다. 장군 진충(真忠) 이신라를 섭정 하는 등, 그당시 역사는 혼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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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왕(東川王: 227 년 ~ 248 년)이 공손연 토벌 작전에 참여 했다. 이를
제위 19 년에 신라 북쪽 땅에 친입 했다고 기록 했다. 그후 제위 21 년에
조위의 장군 관구 검(毌丘儉, 무구검 ? ~ 255 년) 이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점령 하고 왕을 추격하여 왕은 옥저 땅으로 피해 살아 났다. 관구검 군사는
한나라 낭랑으로 돌아 가고 고구려도 귀국하여 신라에 특별 사례를 했다.
이 때에 환도성이 소실되어 평양으로 천도 했다. 이를 삼국사기 에는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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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나타난 평양과 왕검(平壤 王儉)의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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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志 高句麗傳: 王莽初發高句麗兵以伐胡,彊迫遣之,皆亡出塞為寇盜。遼西大尹田譚追擊
之,為所殺。州郡縣歸咎於句麗侯騊,嚴尤奏言:「貊人犯法,罪不起於騊,且宜安慰。今猥被
之大罪,恐其遂反。」莽不聽,詔尤擊之。尤誘期句麗侯騊至而斬之,傳送其首詣長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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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二: 拜真忠為一伐飡,以叅國政。秋七月,霜雹殺穀。太白犯月。八月,
狐鳴金城及始祖廟庭。三國史記 百濟本紀第二: 遣兵侵新羅。拜眞忠為左將,委以內外兵馬事. 魏
幽州刺史毌丘儉,與樂浪大守太守劉茂,伐高句麗,王乘虛,遣左將眞忠,襲取樂浪邊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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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史記 高句麗國本紀第五: 東川王 十九年春三月,東海人獻美女,王納之後宮。冬十月,
出師侵新羅北邊。二十一年春二月,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平壤
者本仙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儉.二十二年春二月,新羅遣使結和。秋九月,王薨。葬於柴
原,號曰東川王。國人懷其恩德,莫不哀傷。近臣欲自殺以殉者衆,嗣王以為非禮,禁之。至葬
日,至墓自死者甚多。國人伐柴,以覆其屍,遂名其地曰柴原。
동천왕은 만주 땅에 전해 오던 북부여기(北扶餘古記), 단군기 (壇君記)
동명기(東明記), 신라고기 (新羅古記), 백제고기 (百濟古記) 등, 중원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 각종 고기를 알고 있었다.
국권을 되 찾은 동천왕은 졸본부여에 돌아와 추모왕이 수도로 정했던
곳을, 옛 적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의 수도에 붙였던 명칭을 따서, 평양이라
했다. 이를 삼국사기에는 옛부터 “선인 왕검이 살던 곳” 으로 풀이 했다.
국권을 되찾은 왕이 죽어 모두들 서러워 했다.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무를 꺾어 시신을 덮어 동천왕의 묘지가 있는 곳을 시원(柴原)이라 했다.
유리명왕의 아들이 제 4 대 민중왕(閔中王: 44 년 ~ 48 년)이다. 민중왕은
사냥을 나갔다가 민중원(閔中原)에 이르러 석굴을 발견하고 이곳에 자신을
장사 지낼 것을 명하였다. 민주원이 본계수동 (本溪水洞, 名隧穴)이다.
그곳에 수신 (木隧於神,totem pole)을 차려 놓고 치루던 개천절을 동맹
(東盟) 이라 했다. 삼한의 후예들이 나라를 설립한 삼국 초기 역사에
나타난 지명과 부족명을 보면 모두 남만주 요하 동서에서 세력을 다투었다.
결론: 한국판 오미오와 줄리앹 사랑의 예기는 고구려 건국 초기 제 3 대
대무신왕(大武神王:4-44 년 )이 영토를 확장 하려고 사랑에 빠진 호동
왕자를 이용 한 집권자의 야욕에 희생된 자녀들의 애석한 사랑 예기다.
동천왕이 처음으로, [단군 백익이 왕중왕 이란 뜻의 왕검이란 칭호를
받고 수도 이름으로 정한 평양을], 고구려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정착
했던 졸본 부여 비류수상, 즉 요양을 평양이라 했다. 그 곳이 진수가 말한
그 당시 조선(今朝鮮)이라한 곳이다. 그에 관한 기록을 깊히 살펴 보면,
최리의 낭랑국은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반도에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잘못 인식 하여 한나라 낭랑군 평양설이 나타났다.
끝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One Response to 호동 왕자와 낙랑공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