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네 말을 믿겠느냐.
한국 상고사를 연구하면 근본적으로 “사료의 결여(缺如)와 어떻게 그 기록을 믿겠느냐”하는 문제에 접하게 된다. 의학에서는 법의학을 병리학의 한 분야로 가르친다. 근래에 새로 창설된 법과학(法科學 Forensic science)에서 법의학을 범죄 수사 방법의 필수로 인용 되고 있다. 어느누가 법을 어기고 (범인이) 숨겨 놓은 사실을 찾는 현대 응용과학의 한 부류다. 한국상고사가 그렇다. 찾는자 (역사학자)는 중국사관이 숨겨 놓은 우리의 역사를 찾아서 다른 사람 (삼한의 후예들)에게 알려 주어야 하고(전달, 소통, communication) 그 소식을 받은 사람(삼한의 후예들)은 전해 받은 소식이 사실이라고 인식해야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한 역사 문제를 현역 한국 강단 사학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현역 교수가 “발해 역사를 쏘련과도 운운..” 하기에 September 10, 2016에는 “역사 인시론”이란 짧은 글을 올렸다. 미국의 모든 정보기관 수장들이 “쏘련이 이번 대통령 선거에 관여 했다”고 보고를 해도 당선자 트럼프는 그렇다고 인식하지 않았다. 한국의 재야 사학계는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다. 우선 사실을 찾는 일이 제야 사학가로거 필자가 택한 기본 임무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옛부터 “소가 우는 소리, 馬/牟;móu mù mào”라고 기록 되여 오던 유목민들”이 부르던 노래, 즉 시경 (詩經, 毛詩, 韓詩)에 실린 “글자와 문맥을 놓고 진위”를 다루는 학문의 한 분야로 나타났다. 언어가 다른 한족이 풀이 하려니 논란이 많을수 밖에 없었다. 이를 고훈 (古訓, 故訓)이란 글자를 써서 표현 해왔고, 이를 또닷 풀 해자를 써서 해고 (解故, 解誥, 解詁)라 하던 훈고학 (訓誥學)이 나타났다. 이는 전적으로 중국 사람들의 관활로 취급해 왔다. 필자는 삼한의 후예가 주동이 되여 한자 문화권에만 특이하게 나타난 문서의 진위를 밝히는 “서지학 (書誌學) 혹은 고증학(考證學)이라고 하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여 한학을 하시는 분들에게 듣기 거북한 일침을 던지기도 했다.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Legitimate를 Illegitimate” 로 바꾸어다는 예기가 있고, 한국에서는 옛적에 남이장군이 읊은 시문에서 “平 을 得”으로 바꾸어 장군을 죽였다. 글자를 바꾸어 놓으면 “진위를 밝히기가 어렵다”는 증거다.
옛 단군조선 땅의 실상을 직접 그려놓은 사료가 사기조선 열전과 진수(陳壽 233-297년)의 “삼국지(三國志)위서 30권에 실린 동이열전”이다. 사기의 존제가 새상에 알려진 이래, 여러사람이 그 내용을 다르게 풀이하고, 원본이 고쳐 기도 했다. 한무제가 친입한 이후 고조선 땅에는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 되여 고조선 영역에 있던 사료가 손실 될수 밖에 없었다. 오늘에 와서는 중원 세력이 지니고 있던 기록에 의존 할수 밖에 없이 되였다. 삼국시대 까지의 역사 기록은 전사사 (前四史)에 실려 있어야 하지만 제일 중요한 사료가 진수의 삼국지다.
삼국 시대(三國時代)는 후한 (後漢, 25년-220년) 이 멸망한 해부터, 또는 184년에 발생한 황건적의 난(黄巾之亂)으로 몰락하기 시작한 때 부터 “위, 촉, 오”세 나라가 다투다가 서진 (西晉, 265년-317년)이 중국을 통일한 265년 까지를 뜻한 말이다. 그러나 진수가 쓴 삼국지는 20년전에 고구려에 관한 기록은 245년으로 끝냈다. 하여 관구검 군사가 패망하여 돌아 가는 장면을 숨겼다 . 백제와 신라 가야연맹등 남만주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에 존제 했던 왕국들은 은미하게 기록 되여 진실을 알아 내기 어렵게 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 열도에서 살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왜인은 독자적인 편을 만들어 실었다. 관구검(毌丘儉 ? ~ 255년)의 종말은 물론 하고 관구검을 따라 출전 했다 되돌아간 수하 장군 “현토 태수왕기 (王頎)가 왜에 다녀 왔다; 왜 여왕 비미호(卑彌呼)가 구로국남왕 비미궁호소 (卑彌弓呼素)와 불화하여 13살된 비미호의 종녀를 왕으로 앉였다”는 기록이 247년조에 있다 . 현토태수왕기(王頎) 가 만났던 왜왕이 있던 곳은 남만주 해안 가까이 요양 일대에 있던 백제였다고 본다. 후에 편찬된 북사와 수서에는 공손도와 인척관계를 맺어 동이의 강국이 되였다는 백제는 한전(三國志 韓傳)에 백제(伯濟) 라고 기록 되여있다 .
진수가 동이전 끝에 전사(前史)에 실려 있다고한 뜻은 사기, 한서, 후한서를 뜻했다 . 그러나 현제 인용하고 있는 후한서(後漢書)는 남북조 시대 남송의
범엽(范曄, 398년 -445년)이 편찬했다. 시대적으로는 기원 후25년 부터 220년 까지의 역사를 제편찬 하면서 를 많이 인용 했다. 그가 인용 했다는 후한서는 모두 소멸 되여, 기원전 106년부터 후한 말 까지를 확인할수 있는 확실한 사료를 잃었다. 삼국지에는 본문보다 많은 분량이 다른 사료를 인용했다. 그 인용된 사료에는 “魏書-150회, 魏略- 180회. 魏氏春秋-56회. 漢晉春秋-70회”가 섞여 있다. 위약(魏略)이외의 사료는 모두 진수가 사망한 후에 편찬된 서적이다.
후한서는 남송시대 남족이 북쪽사람들의 말을 사음하여 기록한 “진수의 삼국지 내용을 잘못 풀이한 예”가 여러 곳에 보인다. 진수가 “부여(夫餘, 有胡不與之國 )와 삼한이 말이 같다 비슷하다”고 적은 부여(不與)를 다를 이(異)로 풀이 하여 “변진한이 왜와 가까이 살고 있지만 말과 풍속이 다르다”고 기록 했다 .
선진시대의 상형문자 속에는 값진 사료가 많이 숨어 있다. 선진시대의 “기록, 시경, 해자”등이 필자의 연구자료로 인용 되였지만, 후한-삼국시대 이후의 역사를 옳바로 풀이할수 있는 사료가 불확실 하다.
어떻게 네 말을 믿겠느냐?
네 옳습니다. 저가 여기까지 또 앞으로도 계속 하여 올려 드리는 내용은 입니다. 수사의 진전에 따라 계속 바뀔수도 있습니다. 여러 분들이, 를 이룩 하셔야 합니다. 역사서는 종교에서 쓰는 경전이 아닙니다. 과학의 발전에 따라 사학가들도 새로운 연구 방법을 개발 또는 도입하여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그 길이 한국상고사를 찾아가는 옳바른 길이라 봅니다.
끝
January 19,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