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古朝鮮과 夏 商의 영역: 한예문자(韓穢文字)의 출현:
산해내경과 초씨역림에 나오는 “朝鮮”은 모두 상나라 말기 까지 산서성에 있었다. 시경에는 “하 상은 주”를 뜻하는 글자가 보이지만 고조선을 뜻한 글자는 없다. 은미하게 기록 되어 찾지 못했다고 본다.
사마천은 옛적에 치수사업을 하던 곳 하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를 설명한 자서전에 역사의 시작을 상명삼왕지도(上明三王之道)라 하고, 상서(尙書)의 뜻을 선왕지사(書記先王之事)라 했다 . 웃사람의 어록이란 뜻이다. 시경 상송에 성탕이란 문구가 있고 상이 상(曰商是常)이라 했다 .
같은 뜻을 여러 “尙, 上, 商, 常, 恒”글자로 적었다. 항상 (always) 이라고 읽는 두 글자(常, 恒)에 상나라의 발생지가 남아 있다. 오환족이 숨어 살았다는 항산 (常山, 恒山)일대에서 나타났다. 산서성 중부에 있던 대나라 땅에 있어 대종산(岱宗山)이라 했다. 그 한 부족이 남아 고죽국이 되었고, 다른 한 부족은 태행산 동쪽으로 나와 반경(盤庚)이 5번 쩨로 옮겼다는 마지막 수도가 은(殷) 이다. 기원 전 1046년에 목야전(牧野之戰) 에 패한 상(商)나라는 하북평원에서 수도를 여러번 옮겼다. 성탕(成湯)이 수도를 정한 이후 반경(盤庚)이 5번 쩨로 옮겼다는 마지막 수도가 은(殷) 이다 . 설문에 탕(湯)자는 뜨거운 물(熱水也)이라 했다. 상서에 나온 양곡(暘谷)을 바꾸어 적었다. 탕(湯, 蕩, 糖)을 당(唐) 또는 상(音商)으로도 읽었다.
곽태산(霍太山) 서북쪽을 지나 분수(汾水)에 이어지는 진홍색 강 (絳: jiàng/ gong3/ gàng)자]에 많은 사연이 잠겼다 . 시대와 장소에 따라 강(江, 姜, 降) 공(工也. 𠀤古巷切,音降) 홍(鴻, 洪)등 여러 음으로 읽었다 . 뜻 또한 다양 하다. 그 곳이 진의 수도 였다. 평양 강읍현(絳,晉所都也, 今平陽絳邑縣)이라 했다. 수경주에 나오는 강수(降水)다 . 어디에선가 내려 온 사람들이 사는 곳을 지나는 여울이란 뜻이다. 큰 붉은 색(大赤也) 이다. 붉을 적(赤)자를 음과 뜻을 뒤섞어 흉노땅 원주민을 북적 (北狄), 백적 (白狄), 백작(白翟), 개/해적(蓋狄), 적인(狄人) 이라는 등 여러 이름으로 기록 했다.이들이 흰옷을 숭상하던 백의민족의 선조다. 이 살던 지역을 흐르던 분수로 이어지는 강수(洪:洚水也. 音絳)를 수경주에는 강수(江水) 라 했다. 시경과 상서에서 부터 글자를 바꾸어 그 일대에 살던 사람들 강한(絳韓)을 강한(江漢)이라 했다 . 상서에 강한 조종우해(江漢朝宗于海) 라 했다. 분수 연안에 살던 지도자, 즉 백익(伯益)이 해지연안에 이르러 제사장(祭司長)이 되여 종묘를 보살폈다는 뜻이다.
한인(韓人)이 살던 곳이라 한원(韓原)이라 했다. 사마천의 선조들이 살던 곳이다. 그들이 지도자를 잃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 하여 관저(關雎)가 실린 시경 주남(周南)편에는 한이 넓리 흐터져 산다는 뜻의 한광(漢廣)과 종사(宗嗣) 를 비하한 글자(螽斯)로 적은 시문이 있다 . 시경에서 탕왕의 업적을 기린 탕지습(詩經 蕩之什江漢)에는 상나라의 역사가 실렸다. 막강 했던 탕의 후손 강한탕탕(江漢湯湯)이 전락 하여 떠돌이 로 변하여 강한 부부 (江漢浮浮)이라 했다. 그 후로 부터 지정된 장소에서 가개를 차린 사람을 가라 하고 떠돌이 장삿꾼을 상 (行曰商,處曰賈)이라 했다.
상나라는 古朝鮮과 같은 지역, 즉 아사달이 있던 산서성 중부에서 나타나 동남 쪽으로 내려와 은허에서 번창 하다 목야전에서 끝났다. 목야란 목축을 하던 넓은 초원(large open area of grassland. Prairie) 이란 뜻이다.
상 나라 이름: 목야전(牧野之戰)을 기념한 이괘명문(利簋銘文)에는 무왕정상초 (珷征商隹)라 했다 . 사기에는 은본기(殷本紀)라하고 시조 은계(殷契)가 우를 도와 치수 사업에 공을 세워(佐禹治水有功) 상에 봉해져 자씨를 성을 받았다고 (封于商,賜姓子氏)했다. 도당대우지제 (契興於唐虞, 大禹, 之際)란 문구 특히[사이(between) 제, 즈음(around about) 제, 가 (margin) 제(際)라고 읽는 글자] 속에 지역과 시대가 숨어 있다. 논어 태백(論語 泰伯)편에는 같은 표현 “唐虞之際,於斯為盛”을 공자가 했다고 한다. 左:제(際:阝,祭)자는 복합 상형글자로 제단을 차려 놓고 천지 일월성 진에게 제사를 올리던 장소를 뜻했다. 후에는 두 마을의 경계란 뜻으로 씌였다 . 시경에는 [商之孫子, 殷之未, 殷士]란 문구가 있고, 서주의
어시위성(於斯為盛)의 [어는 전치사 시(斯:解, 亥 )는 빛,日月星 삼신)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성했다]는 뜻이다 . 중국 하북 평원 일대에 흐터져 살던 소우는 형상을 그려 모(牟, 馬, 毛,慕)라고 읽던 글자로 기록한 유목민이다
동이수령 백익이 시수(親迎斯須)을 부인으로 받아드려 장인 장모가 즐거워 (姑翁悅喜)했다. 병이 심하여 고칠수가 없서 명종시흘(命終斯訖)하는 문구, 시수가 떠러저서 마른 나무로 바뀌었다 (斯須落去,更為枯樹)는 등등 초씨역림(焦氏易林)에 그 뜻이 있다 . 시경에는 사간(斯干)을 이롯하여 여러 시문에 많이 나온다. 삼국유사에는 (意在斯焉古朝鮮)라 했다.
시조 고공단보(古公亶父), 중시조 계력(季歷, 王季) , 그리고 문왕(文王)이 황하를 따라 함곡관을 너머 옛 구주 땅에 정착 했다]는 기록이 문왕지습 (詩經文王之什 緜)에 실렸다. 시문에 나오는 강녀(姜女) 주강(周姜)이 국풍 주남 관저(關雎)에 나오는 요요숙녀(窈窕淑女)다 . 분수로 이어지는 강수(降水, 絳) 연안에 살던 사람을 강씨(江氏)라 했다.
요요숙녀(窈窕淑女)의 집안이 원주민으로 서주 문명의 기반을 닦았다.
백익을 살해하고 지도권을 빼았아 나타난 하(夏)의 영역에 들어온 다른 부족이 주(西周) 나라를 세우고 그 곳에 남아 있던 고조선 원주민(共工, 息慎, 玄都氏)을 이용하여 문화를 발전 시켰다 . 죽서기년 순임금조 (竹書紀年 帝舜有虞氏)에 실렸다. 고조선 부여국(夫餘國)의 원주민들이 분수 연안에 살았다 그 곳 궁정 앞(汾陽有萬歲宮)을 지나는 여울을 종예자와 음이 같은 예(濊; huì huò wèi: 회,왜,휴)라고 읽었다.
원주민 한예(韓 穢)들이 노예가 되여 산서성을 종예 (隸)자로 기록 했다. 그들이 옥돌과 금속물에 만들어 놓은 글자 (金石文)가 현제 사용 되는 상형글자의 원조다.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이 원조가 아니다. 한자(漢字)란 표기는 잘못이다. 한예문자(韓穢文字)라고 부름이 마땅하다.
사마천은 요순시대의 기록(余每讀虞書)을 모두 읽었다 . 믿었던 신하가 불량하여 (股肱不良) 만사가 흐트러젔다. 주 성왕때에 이르러 복구되었다고 했다. 최초의 중국역사서 편찬 상황이 한서 사마천전(漢書 司馬遷傳)에 있다 . 도당씨 이전에 글자가 있었다(唐虞以前雖有遺文)고 했다. 옛 부터 써오던 글자를 이문(文者,古之遺文), 즉 요순 임금 당시 (帝舜有虞氏)의 글자를 이문이라 했다. 순임금을 동이라 했스니 이문은 동이(東夷)의 글자다. 산서성에 살던 濊貊族이 초기에 쓰던 隸書字를 이문이라 했다.
함곡관 동쪽에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부족이 옛 고조선 사람들이 살던 서쪽으로 쫒겨와 섬서성 서안시 일대 기산 밑에 자리를 잡고 원주민의 기술을 이용하여 짧은 기간에 서주의 문화를 이룩했다. 한시외전 (韓詩外傳)에 자하와 공자가 시경주남 관저(關雎)를 논한 내용이 당시 고조선 부여(不由, 蜉蝣.浮游,胡不與之國)의 문화였다
끝. 다음에 계속.
October 19, 2019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