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증주의 역사관(歷史觀)의 맹점: 실증주의 사관에 빠진 양독(洋毒)이라 하셨는데, 저는 이를 실증사학파들의 가치관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시야를 넓게 판단하지 못한 결과라고 봅니다. 현행 되는 역사서 (Historiographies)의 논문 작성 지침은 다른 과학잡지(Scientific Journals)에서 넓리 사용하는“서구 문명에서 개발한 증명방법(Confirmation Process)에 따라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분들 논증 (증명 방법)의 핵심은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다; 1+ 1=2”하는 “사실의 학”에서는 따라야 하는 서양철학 (Western logic)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즉시각(stance, paradigm)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림 글자로 편찬한 동양고전, 특히 역사기록”은 사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관이 그의 정서와 가치관등을…..
한국항공대 교양학과 교수 우실하 교수의 재미있는 요하문명을 읽고. 누구나가 인정하는 역사학계 중진되시는 분의 글을 읽을수 있서 감사 합니다. 이를 읽고 지난달 (September 10, 2016) 이 face book지면에 올렸던 “역사 인식론”을 다시 천명코자 합니다. 저는 “古朝鮮 찾기”에서 실증사학을 자부하시는 분들에게 힘이 될수 있는 실증을 보여 드렸습니다. 이를 “상형글자에서, 시경의 여러 시문에, 전쟁기록에, 그 당시 산서성 일대에 살던 사람들이 하던 말의 어순이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어순과 같더라”고 찾아 보여 드렸습니다. 그 결과 단군왕검은 중국문헌에 나오는 우왕이고 평양이 산서성 서남쪽 해지 동북연안에…..
신비의 서왕모(西王母) 오손왕 곤모 (烏孫王昆莫) 첫 아사달에 관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서왕모 (西王母)와 곤륜(崑崙)은 가차전주한 글자가 확실 하다. 곤륜(昆侖)이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하앟케 눈이 덥힌 제일 높은 산(太伯山, 崑崙)에 내려와 신시시대가 시작 되였다. 그가 환웅천왕이다. 그 곳에서 부터 환웅천왕을 숭배하는 부족이 사방으로 퍼저 나갔다. 사기 대완열전에 나타났던 글자들을 근거로 중동과 동북아시아 문화의 교류를 살펴본다. 첫 아사달 신시 (神市)에는 서강의 제사당(西羌之宇)이 있었다. 그 건물을 지었다는 강족을 살펴 보면 동강(東羌)이란 글자가 보인다 . 강(羌)자는 “고달플 강 羗”자의 속자로 옛적에 인도할 유(羐)자라 한다.우왕이…..
신시 (神市) 환국 (桓國)시대 (1)의 첫 장 서론. 첫 아사달, 신시 (神市)는 어디였나. 환웅천왕이 다스리던 한국 (桓國)시대의 첫 수도를 한자로 신시 (神市)라 했다. 그 사람들이 쓰던 말로는 그 곳이 첫 아사달이다. 이를 어디였나를 찾아 보았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사마천은 그 당시에 있었던 전설을 포함한 여러 사료를 정리하여 중화사상을 설립하여 많이 과장하여 사기에 실었다. 사마천은 뫼산 변의 곤륜(崑崙)은 서쪽에 있다는 높은 산을 뜻했고 뫼산 변이 없는 곤륜(昆侖)이란 글자는 제사장 (道人, high Priest)을 뜻했다고 본다. 무제본기에서는 천자(한 무제)가 명당에 들어가 야외에서…..
역사 인식론: 이란 책에서 송 교수는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는 고구려와 신라가 고조선에서 나왔다는 계승의식을 갖고 있었다’면서 “반면에 이 계승의식을 중국사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저는 어찌하다 어저께 Ohmynews에 실린 옛 기사를 읽었습니다. 김종성의 서울대 송기호 교수 “고구려사 배제는 신라 중심주의” 07.12.18 09:56l최종 업데이트 07.12.18 09:56l 김종성(qqqkim2000) 저는 특히 동북아시아 상고사 연구는 “역사 인식론”과 직결되는 문제라 최대한으로 넓은 시각(철학적)에서 옛 중국문헌을 읽고 그 속에 숨겨진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복원 해야 한다고 Prologue에서 방법론을 내 놓았습니다.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기사에…..
신시 (神市) 환국 (桓國)시대 1. 신시 시대의 역사는 지금까지 알려진 사료를 근거로 추적해 올라가는 수 밖에 없다. 단군왕검이 치수사업에 성공하여 만장일치로 왕중왕이 되여 그를 대우라 하고 예맥족 출신이라 하여 대우모(大禹謨)라 했다. 참(僉, ; 咸也,皆也)자에는 “모두 다”란 뜻이 있으나 더 뚜렸하게 사람 인(人)변을 붙여 “모두의 왕”이란 뜻에서 왕검 (王儉)이라는 새 칭호가 붙었다고 본다. 그는 다른 사악 (四岳)의 지도자 (稷、契,暨,皋陶) 와 같은 제사장(壇君)이였다. 모두가 추천하고 절대 다수가 인정하자 그는 다른 제사장들에게 다시한번 사양했스나 순 (舜)임금의 결정에 따라 최초로 제사장으로서 집정권을 허락 받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