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동호문화(東胡文化) 춘추전국시대를 통하면서 중원에서 계속되는 전쟁을 피하여 북쪽 멀리 떠러진 낙원 (遼寧)으로 피란을 갔다. 그 낙원을 만든 사람들이 관중분지에서 중원을 거치지 않고 분수를 따라 동북쪽으로 올라와 다시 발해만 서북연안에 정착하였다. 이를 관자에는 “구진하; 拘秦夏”라 는 문구로 제 환공이 북쪽으로 “산융을 정벌”하려 올라가 만났던 사람들이다. 이를 동쪽으로 온 호 라 하여 동호라 했다. 이들이 갈석산 유역에 있던 정착민이다. 상나라 유민들 그들과 같이 고조선 땅에서 문화의 황금 시대를 이루었다. 북쪽 사람들과의 전쟁 기록은 사기흉노 열전에 요약해서 나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다른…..
사마천이 그려 놓은 갈석산(碣石山): 사마천 (司馬遷) 은 필자가 추론한 단군조선의 발생지 (陝西省韓城縣)에서 대대로 사관을 지내오던 집안의 마지막 사가다 . 그는 옛적 고조선 사람들이 쓰던 말을 어느정도 이해 했다고 본다. 사기에 나오는 어순과 사음자로 표기한 여러 모를 고려 하면 그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작성한 문장이 어느정도 실려 있다고 본다. 이 문제는 필자의 신간저서 첫장 조자법에서 다루었다. 그는 부친의 유명에 따라 그때까지 내려오던 “전설 신화 구전 등등” 중국역사에 관한 자료를 모두 모아 동양 최초의 역사서를 만들어 한 무제의 통치 영역을 온 세계의 중심이라는…..
고조선 영토-7: 전국시대의 고조선. 동호라는 글자가 실린 고전의 문맥을 보면 동(東)자는 형용사가 분면하다. 반대가 되는 서호 (西胡)란 명사도 있다. 핵심은 호(胡)자를 어떻게 풀이 하느냐 하는 문제다. 필자가 보기에는 답이 글자 안에 있다. 시경에는 호(胡)자가 많이 나타난다. 주목왕(西周 穆王, 기원전 977년- 922년)의 서역 여행을 읊은 시문에도 호(胡)자가 실려 있다. 동호(東胡)란 이름은 일주서 왕회해에 나온다 . 이 호(胡, , hú/ wu4/ ho: 古, 右:月)자는 호(鬍, 上:髟,下:胡)자를 간략한 글자다. 관운에서는 호(胡)를 “하(何), 담(儋)이다”라 했다. 담(儋)은 단(丹, 壇, 旦), 갈/할 (曷,hé/흐어), 또는 해(奚, [xī/시)라고도…..
6-2.공자(孔子, 기원전 551 – 479년)생전시대. 국어를 편찬한 좌구명의 생존 기간이다. 이 시기에 공자가 만난 노자를 도덕경을 쓴 사람이라고 잘못 알려저 있다. 고전 여러 곳에 나오는 명사 “노자는 복수”로 풀이 된다. 이 시대 기록에는 고조선과 관계되는 사료가 유교 경전을 비롯한각종 제자 백가 경전에 많이 실려 있다. 유가에서 가르치던 경전의 글자를 풀이한 내용과는 다르게 또는 유가의 귀에 거슬리는 풀이도 있다. 냉정한 입장에서 “잃어버린 한국 역사”를 되찾으려는 필자의 입장을 고려해 주시기 바란다. 춘추좌전을 다른 춘추 삼전이나 국어와 비교해 보면, 극히 은미 하여 해석하기가…..
김탁 대표님 그리고 이강산 님: 옳은 말씀입니다. 그래야 학문은 발전 합니다. 그래서 학문하는 사람은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자 하여 책을 출판하고 논문을 씁니다. 저가 짧은 한마디 한마디로 회답한 이유는, 두 영문본에 이어 이번 한글본, 그리고 “한사모 website Face Book”에 몇차래 올렸기 때문입니다. 저의 글 내용이 너무나 상상 밖이라 여러분들이 눈여겨 보시지 못한듯 합니다. 옛적에는 함곡관이 좁아 황하수가 미처 빠지지 못해, 함곡관 서쪽은 거꾸로 흐르는 역수로 수해가 심하고 택지가 넓었다. 이곳이 옛 九州다. 洪範九疇의 출처 다. 이 물목을 넗힌 사람이 절대 다수의…..
제 환공의 고조선 친입.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선왕 중흥이란 20여년 간이 지난 후에는 옛 고조선 땅에 살던 려민 (黎民,九黎,句麗)들이 강성 하여 서주는 동쪽으로 쫓겨 와 춘추 전국시대로 너머가게 되였고, 다시 이들이 제후국 진(晉) 땅을 한조위(韓、趙、魏) 세 가문이 나누어 삼가분진 (三家分晉) 현상이 나타나 전국시대 (戰國時代)로 이어졌다 . 당시의 상황이 사기흉노열전 2에 잘 나와 있다. 산융의 습격을 받자 동주 양왕이 처음 동주 창립을 도와준 정으로 도망을 갔다. 후에 (정이 섭섭히 대하여) 정을 칠 욕심으로 융적 여자를 왕후로 받아드려 융적과 같이 정을…..
요수(遼水) 요동(遼東) 양평(襄平) 고죽현(孤竹縣) 앞으로 “한나라의 군현(漢之郡縣)하에 있던 지역”을 설명하기에 앞서 지난 November 20, 2016. 에 올렸던 글을 보충하여 다시 올립니다. 사기에 나타난 요동 (遼東)과 양평(襄平)이 원조다. 사마천이 사관으로서 의 임기 : 한서에 따르면, 사마천은 한무제 첫해(建元)부터 원봉(元封)간에 태사공으로 근무 했다고 한다. 원봉(元封,기원전 110-105년) 끝 까지라 하더라도 조선을 멸망한후 3년안에 퇴임 되였다. 어느 누가 조선 열전에 손을 대지 않았다면, 이는 그가 보고 느낀 초후의 전쟁목격담이다. 기원전 664년에 제 환공이 이끄는 중원세력이 처음으로 고조선 땅으로 친입해 왔다 . 이를 중국에서는 제…..
기원전 868년-기원전 770년. 공화를 시작한 이유는 원주민의 폭동으로 서주 제 10대 여왕(周 厲王)이 매부가 살던 분수 상류로 도망을 가서 주왕실을 보필하던 “두 대신이 정사를 꾸려갔다” 하여 만든 말이다. 주나라는 기원전 770년 “견융 또는 여융”이라 부르던 원주민의 침입을 받았다. 주유왕은 여산 기슭에서 살해되고, 주 왕실은 도읍을 동쪽의 낙읍 (낙양)으로 옮겨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이를 주의 동천이다. 이때 부터 춘추전국 시대가 시작 된다. 이러한 혼란기를 수습하려고 태사(太史) 주(籒)와 같은 유능한 토착민을 등용하여 서주의 질서를 잡은 시기라 하여 선왕중흥이라 했다. 각종 대전(大篆)자 금문과…..
기원전 1046년-기원전 868년 중국사람들이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 Xia Shang Zhou Duan Dai Gong Cheng)라는 야심적인 국책에 따라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전설의 역사화 고정에 포함되는 기간이다. 중화민족의 기원의 확립을 확립하려는 첫 단추 구멍(First button hole of the coat)이 단군조선의 건립이다. 한국 사학가들은 이점을 깊히 다루어야 마땅하다. 이 시대에 해당되는 사료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찾아 볼수 있다. 첫쩨: 상형글자의 발생과 변천 과정에서. 두쩨: 그들이 부르던 노래(詩經, 韓詩, 毛詩)에서. 셋쪠: 전쟁 기록에서. 넷쩨: 중국역사 기록 특히 “尙書, 逸周書,穆天子傳, 竹書紀年,春秋左傳”에서. 다섯쩨: 먼 훗날에 편찬된 유교경전과 각종…..
첨성대, 참성단, 환구단(圜丘壇) 참성단은사적 제136호로, 첨성대은 국보로지정되었 지만 무엇을 위해 만들었나 하는 질문에 뚜렷한 답을 못찾았다. 필자는 앞에서 “강화도 (江華島)의 이름을 마니섬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다. 한국 사료에 휼/혈구(穴口)라고 풀이한 이름을 고려도경에서는 합굴 (蛤窟) 이라 했다. 해구(海口)가 아니라 해?(海?) 다음 글자는 모르겠다는 뜻이다 . 한국 기록에는 혈(穴)자가 해(海)자로 바뀌여 기록 되였다. 휼/혈?(穴口)이 곧 합굴 (蛤窟)이란 뜻이다. 합(蛤, há gé hā è )자는 부여의 시조 해모수 와 같은 혈통을 의미 했다 . 현대 북경어로 쉐 (穴xué)자는 사음자 아니면 훈역한 글자다 .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