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랑(樂浪)에 잠긴 사연 (事緣)들-5: 삼국정립 초기에는 낙랑(樂浪)이란 글자가 여러 곳에 실려 있다. 그러나 그 위치가 어디였나를 뚜렸하게 판가름할수 없게 되여 있다. 삼국사기 여러 곳에 나타 나는 낙랑(樂浪)이 어느 지역을 뜻했는지, 또 서로 어떠한 관계가 있었나 하는 문제는 차후에 다시 살펴 보기로 한다. 낙랑(樂浪)이란 글자를 살펴 보면 그 앞에 한(漢) 또는 자(自)하는 글자가 보이고 뒤에는 태수(太守)라는 직책을 붙었다. 이는 모두 한나라가 통치하던 지역에 있던 한낙랑(漢樂浪)이란 뜻이 분명하다. 한낙랑(漢樂浪)이 아니였던 낙랑의 대표적인 예가 호동(好童, ? ~ 32년)왕자가 낙랑공주(樂浪公主) 를 만났던 곳이다. 중국기록에는…..
삼한(三韓)의 후예가 통치한 해안선이 한해(翰海): 중원의 내륙 지방은 대흥안령 서쪽에 살던 고조선의 후손들이 통치 했고, 대흥안령 동쪽에 살고 있넌 삼한의 후예들이 해안선을 따라 배길로 교역을 했다. 이를 한해(翰海)라 했다. 삼한의 후예들이 바다를 통치 했다. 뱃길을 처음 시작한 곳을 숙신씨의 고향이라 했고 그들이 새운 나라를 산해경에서는 해국(蓋國)이라 했고, 다른 사서에는 맥국(貊國)이라 했다. 왜(倭) 북쪽에 있다고 했다. 한서에는 조선이 바다 한가운데 있다고 했다 . 천진시 일대에서 발해 서북쪽 해안을 따라 조양에 이르는 지역이 삼한 (三韓)의 출발 점이고 한무제 친입으로 이들이 흐터져 중국…..
: 오호십육국시대: 북쪽에서 황금시대를 이루었던 고조선은 대흥안령을 경계로 동쪽과 서쪽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 상이 달라지게 되였고, 전국시대 말기에는 중원과의 교류에도 뚜렷함 차이가 나타나 서쪽에 살던 부족의 무력이 우세 하게 되였다.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한 이후에 잔여 무기를 획득한 서쪽 새력은 모둔선우(冒頓單于)의 지도 아래 대흥안령을 너머 동쪽에 있던 동호왕을 살해 했다 . 옛 동호왕이 다스리던 지역의 풍부한 자연 지원을 이용하여 다시 자라나던 위만조선의 세력은 한무제의 야욕에 또다시 비참한 희생을 당했다. 중원 세력의 친입로 청구 낙랑구로 기록되던 발해만 서안 일대가 5-세기에 걸처 고조선…..
청구(靑丘)땅을 한반도로 인식: 고구려 땅에 속해 있던 지역이라 고구려 초기 역사 기록에 실려 있어야 할터인데 삼국사기에는 당태종이 고구려를 친입할때 “XX를 청구도행군 대총관 (為靑丘道行軍大摠管)으로, xx는 요동도행군 총관(遼東道行軍大摠)으로 하고 수군은 (산동성 발해만 북쪽 해안에 있던) 래주(萊州)에서 떠나”하는 문구가 있지만, 고구려의 수도가 오늘의 평양이라고 인식했던 터라 청구란 지명이 어디를 뜻하는지를 몰랐다고 본다 . 삼국유사에는 청구(靑丘)란 글자가 고구려 멸망 이후에 처음으로 나타나 한반도 남단을 의미 했다. 이로 보아 고려시대부터 청구가 우리나라를 부르는 호칭라고 인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청구영언(靑丘永言)을 비롯하여 청구(靑丘)란 이름이…..
삼한 (三韓)의 다양한 글자들: 진수가 사용했던 “꼬까리 모양의 모(牟)자를 그린 상형 글자 변(弁)자를 그러한 모자를 쓰던 사람이 법관이였다 하여 법변자 변한(卞韓)으로 바꾸어 썼다. 변한이 다른 글자(示/卞/ 弁韓)로도 적혀 있다. 모 라는 소리 글자(牟)를 소우는 소리의 상형 글자다. 소우는 소리에 비슷한 글자의 하나가 말 마(馬)자다 . 변한이 마한으로 둔갑 했다. 삼한이란 뜻글자 자체에 의견이 분분하니 그 영역 또한 여러가지로 설명해 왔다. 그러다 보니 삼한의 후예가 되는 “신라, 백제, 가야연맹, 왜인”들이 살던 영역이 어디였다고 확실히 단정할수 없게 되였다. 어떤 글자가 의심스러워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