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재단 바른역사정립위원회에서 작성한 은 오히려 진정서의 힘을 약화 시킨다. 폭을 넓혀 하자는 제의가 더 바람직 하다고 본다. 그분이 제시한 오류란 소제는 마땅히 다른 사학가들의 의견도 들어 보아야 하는 그분의 주장이다. 다음은 그러한 소제에 관한 필자의 사견 (私見) 이다. 진정서의 핵심은 동북아시아 역사가 중국사서에 잘못 기록된 이유를 밝혀주어야 한다. 필자는 이문제를 로 동북아시아 역사가 중국사서에 잘못 기록되였다는 예를 밝혀나가고 있다. 1. 한사군 (漢四郡): 한무제 (漢武帝) 시대에 고조선의 서쪽 영토 일부가 중국의 한사군(漢四郡) 지역으로 편입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때의 한사군은 오늘의 한반도…..
삼국지 위서 30 (三國志 魏書三十)를 논한다. 東夷傳-1: 개요 오환(烏桓, 烏丸)과 부여(夫餘, 扶餘) 고구려(高句麗)란 이름은 삼국시대 이전 부터 있었다. 이 세편은 진수의 역사관을 다른 사가들과 비교해 볼수 있는 좋은 사료다. 오환(烏桓, 烏丸)에 관한 설명을 끝마첬다. 부여(夫餘, 扶餘)에 관해서는 뒤에 다루기로 한다. 고구려편에는 만주 땅에서 중원 세력을 쫓아 버리고 고조선의 전통을 이어 받아 기마유목민족 (騎馬遊牧民國家, The Eurasian Steppe)이 였던 우리 민족의 조상이 동북아시아에서는 제일 동쪽에 있던 강국으로 등장한 예기가 실려 있다. 필자가 선정한 고조선(古朝鮮)찾기의 끝장이 된다. 기자가 조선 땅에 갔다하니 그 글자가…..
오환, 선비와 동이의 관계: 중국사서 동이전에는 그들 특유의 “삼천갑자 동방석, 백발 삼천척”이라 한 표현과 같은 과장이 많이 보인다. 제후국 연의 동쪽에 있던 세력을 동호(東胡)라 했고, 진시황 본기에는 “기/지 조선 (暨朝鮮)이라 했다. 진시황이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하고 북쪽에 있던 정치세력을 맊으려고 장성을 쌓았다 . 기원전208년에 모두 선우가 동호왕 (東胡王)을 살해한 이후에는 예맥조선(穢貉朝鮮)이라 했다. 한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설치 했던 4 군사 병영이 선비(鮮卑) 오환족의 영역으로, 동쪽 경계는 요택(遼澤) 이라 했다 . 오늘의 요하(遼河)를 넘지 못했다. 한서의 지리지에는 한무제가 정벌한 이후의 만주지역에 관한설명…..
진수는 기원전 208년에 흉노 묵돌선우(冒頓單于)의 급습으로 동호왕이 죽을 당시 오환산(烏丸山) 과 선비산(鮮卑山)에 숨어 생존하여 오환(烏丸)과 선비(鮮卑)라는 부족 이름이 생겼다고 했다 . 오환산(烏丸山) 과 선비산(鮮卑山)이 오늘의 지도에는 어디였는가를 찾아 본다.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흉노가 동호왕을 살해 하기전에 오환(烏桓, 烏丸)이 제후국 연(燕)의 북쪽에 부여(夫餘)와 같이있었다 . 그 일대에는 동호(東胡)영역에 옛부터 소유권을 놓고 동호와 흉노가 싸우던 구탈(Ou tuo甌脱, 歐代地)이 있었다. 이곳이 옛적에 헐거생활을 하던 유적 (Ancient Cliff dwellings古崖居遺趾)이다 . 오늘 북경 서북쪽 만리장성에서 가장 인기있는 팔달링(八達嶺) 가까이에 있다. 오환 선비 두 산 이름은…..
고조선 발생지에서 찾은 삼족오(三足烏): 오환(烏丸, 烏桓)이란 말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라 오손(烏孫)이라고도 부르던 부족의 한 분파다. 그들을 “호, 휴, 시, 해, 지애, 기”하는 여러 글자로 기술 했다. 산서성 해지 연안에 정착하여 단군조선을 새웠다. 이곳에서 그들은 삼족오(三足烏)를 찾았다. 시경에서는 했다. 산해경에는 해지연안 구주(九州, 九疇)늪지에 살던 학 (두루미, Blue Heron, 황새)를 삼족오라 부른듯 하다. . 산해경에 실린 내용을 이리저리 맟추어 필자가 만든 풀이다 . 한국에서는 장닭을 상여(喪輿) 위에 올려 놓았다. 삼족오가 장닭으로 변한 듯하다. 시경에는 이곳을 소제로한 시문이 많이 실려 있다……
고조선 사람들을 동호(東胡)라 했고 그들은 삼족오를 신성시 했다. 삼국지에는 오환과 선비가 모두 동호의 후예라고 했다. 옛적에 조선 (古朝鮮)땅에 그들의 후손이 새운 나라가 글안(契丹)이라고 부르던 대요(大遼,Khitan Empire) 제국이다 . 동호(東胡)의 동자는 형용사다. 서쪽에 살았던 호(胡)가 동쪽에 와서 살던 사람들을 뜻한다. 시대적 측면에서 보면에는 모두 동서 하는 형용사 없이 호(胡)라고 했다 . 후한 시대에 편찬된 에 서호(西胡)란 말이 처음 나온다. 후에는 모든 사서들이 서호 (西胡)란 이름을 사용 했다 . 진 태강 (晋太康间, 280 -289년)에 발굴된 급총주서 (汲冢周書, 逸周書)에는 서호(西胡)는 없고, 동호 (東胡)란…..
삼국지 위서 30 (三國志 魏書三十)를 논한다 삼국지 위서(魏書, 魏志) 30은 중원 북쪽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의 후예를 다루었다. 앞에서는 이를 멀리서 관찰 하여하는 제하에 고조선의 후예를 다루었다. 기마유목민족 (騎馬遊牧民國家, The Eurasian Steppe)이 였던 우리 민족의 조상이 동북아시아에 이르러서는 지리지형과 문물 교류의 차이로 대흥안령을 경계로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기마유목민족의 특성을 유지하였고, 해안지대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교류의 수단이 배로 바뀌어 한해의 총치권을 잡게 되였다. 먼 훗날 한반도에 정착하여서는 를 정했다. 서쪽 사촌 기마유목 민족의 역사는 서양 사학계에서도 다루어 졌다. 그러나 삼한의 후예들에 관한 역사는…..
요동태수 공손연의 지시로 233년 9월 달에 조위장수 전예(田豫)가 밀사로 온 오나라 장군 주가(周賀)를 죽였다 . 바로 다음 달 10월에는 사신을 오나라에 보내 아뢰기를 “요동태수 공손연이 손권의 번신이라 한다” 면서 중원사람들이 보물로 취급하던 남만주 지역의 특산물을 바쳤다. 오왕 손권이 크게 기뻐하여 공손연에게 작위를 더해 주고, 다음 해에는 공손연을 청주목 요동태수연왕 (青州牧遼東太守燕王)이란 칭호를 인정 했다 . 공손연이 받은 칭호에는 그의 영향력이 산동성 북쪽 해안(靑州)에서 발해만 서쪽 해안을 따라 남만주 요동만에 이르는 지역이라는 뜻이 숨어 있다. 이 지역이 대륙백제가 성장하던 시기의 영역이다. 이…..
공손도(公孫度)의 최후: 진수는 공손도(公孫度)가 자라온 과정을 은미하게 기술 하고, 그가 글을 쓸 당시에 사라진 공손도의 최후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다. 필자가 가공인물이라고 보는 공손강은 출생과 사망에 관한 아무런 기록이 없다. 공손도와 간웅 조조는 같은 시대 사람이다. 삼국지 무제기에는 공손도 (公孫度)란 이름이 없고 공손강으로 나타난다. 건안 18년에는 공손양(公孫陽)을 생포하여 돌아 왔다 . 공손도(公孫度)의 최후를 공손양(公孫陽)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남쪽에서 잡혔다고 연막을 친듯하다. 건안 18년(建安十八年, 213년)에는 백낭산(白狼山)에 숨었던 원소(袁紹, 153년-207년)의 두 아들 원상(袁尙,? ~ 207년 11월) 원희(袁熙, ? ~ 207년 11월) 형제가 공손강 영역으로…..
중국기록에서 찾아본 공손도의 혈통: 대방의 어원에서: 앞에서 산해관 북쪽에 있던 가라국 (加羅國)왕 하지(荷知)가 한무제 원년 (建元元年)인 기원전 479년에 사절단을 보내 선물을 바쳤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이지역을 광개토대왕 비문 2면에; “왜를 뒤 쫓아 임나가라 (任那加羅) 종발성(從拔城) 에까지 이르니 성은 즉각 항복하여 신라인으로 지키게 하였다”한 곳이다. 대륙백제와 가야연맹, 왜의 출생지가 발해만 서쪽 연안에 있던 낙랑 대방 일대에서 나타 났다는 증거다. 백제왕 우구대가 그 곳 태수 공손도의 딸을 부인 으로 맞아 (공손도와 같이) 동이의 강국을 이루었다 . 이곳에 살던 여러 한(可汗, 汗, 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