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주의역사-2 주몽이 떠나서 도착한 곳이 현제 지도에서 확인 되였다. 그가 오이 마리 협부 (鳥伊,烏伊、摩離、陜父)등 세 친구와 같이 요하를 건너 심양-요양 일대에 정착 했다 . 그들이 도착한 곳에는 벌써 먼저온 사람들이 부여란 나라를 이루고 살았다. 주몽이 (졸본에서)부여의 통치권을 계승 했다 . 주몽의 친구는 상서에 여러 글자로 나오는 사리(四夷; 嵎夷. 鳥夷, 烏夷, 牟夷)의 사음 대자다 . 이러한 추리는 후대에 나타나는 전쟁 기록이 학인해 준다. 앞에서 거론한 요하를 하는 여러 사료가 증거다 . 이러한 기록은 는 증거다. 동북 아시아에 관해 뚜렸한 기록에 없다…..
낭랑(樂浪)에 얽힌 사연 (事緣)들-추가 어떤 연유로 낙랑이란 이름이 난하(滦河) 유역에서 나타났나? 상고사를 여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관심을 갖게되는 질문이다. 아랫글은 지난을 보충 설명한 글이다. 결론부터 예기하면; 옛적 요수(樂水)를 요수(樂水)로 바꾸어 낙랑이란 이름이 오늘의 난하(滦河) 유역에서 나타났다. 유가에는 명석한 사람(知者)과 어진 사람(仁者)을 비교 설명 할때 요산 요수(樂山 遼水)란 표현을 자주 써왔다. 공자님이 제자 옹(雍, 冉雍,字仲弓) 에게 답한 논어 (論語 雍也)에 실린 한 문구다 . 옥편에는“樂”를 흔히들 이라 훈독하는데, 이 문구에서는 로 읽는다고 했다. 그 이유를 들어본 적이 없다. 아무도 설명해 주지 못했다……
고구려의 천도(遷都):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삼국지 동이전은 남만주 수계(水界,Watershed)에 국한된 지역을 다루었다. 하여 고구려와 부여 왜에 관한 역사를 설명하면서 남만주의 역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고구려의 첫 수도가 있던 졸본부여는 오늘의 심양-요양일대 라고 밝혔다. 나당 연합군에 함락 당했던 마지막 수도 평양성(平壤城)이 어디였나를 놓고 아직도 논란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졸본(卒本)이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홀본(忽本)으로 나온다. 이곳을 흘승골성(Citadel in the Holseunggol, 訖升骨城) 이라고도 했다. 이러한 이름자들이 모두 원음을 일저리 두섞은 한자로 기록 (假借轉注, PLCs and PSMCs)하여 정확한 뜻과 음을 찾기 어렵게 되였다. 옛적에는…..
서론-1: 고구려(高句麗)의 어원과 발생지 고구려(高句麗)의 어원: 앞에서 여러차례 밝힌 바와 같이 만주에 살던 사람들의 선조는 황하문명의 발생지인 산서성 해지-분수 일대에서 옮겨 왔다는 사료를 찾았다. 문헌을 살펴 보며, 고구려는 이다. 한때 전한(前漢)의 외척 왕망(王莽; 기원전 45년- 기원후 25년)이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新: 8년 ~ 23년)나라를 세웠던 왕망(王莽) 은 높다는 뜻을 아래 하(下)자로 바꾸기도 했다 . 구려(句麗)와 같은 부족을 음이 같은 여러 글자로 기록 하기도 하고, 음과 뜻을 이리저리 돌려 여러 글자로 기록 했다 . 오늘 <려(麗)라고 읽는 글자는 옛적에는, 검을 려, 검을…..
제 1편: 옛적 한국(汗國)의 풍속: 부여전에는, 현토군에서 나타나 공손도(公孫度, ? ~ 204년) 부터 공손연이 멸망하고 관구검이 고구려 국내성을 분탕치고 돌아간 시기 까지의 역사가 위서 30편 전반에 실려 있다. 부여(夫餘)란 이름이 사기와 한서에 나타나니 늦어도 후한서 동이전에는 부여의 역사가 실려 있어야 한다. 삼국지 부여전의 역사를 되풀이 하면서, 동명왕의 설화와 관련시켜 북이삭리국 (北夷索離國) 에서 나왔다고 했다 . 이 문제는 고구려 편에서 다루기로 하고 이 편에서는 간단히 한국 풍속의 몇가지를 다루기로 한다. 고조선의 동쪽지역에 살던 사람들 한국(汗國)의 고대 풍속이 처음으로 전사사 (前四史)의 마지막이…..
서론-4:부여의 종말 (終末): 산서성 해지연안에 나탄났던 단군조선의 후예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만주 땅으로 옮겨 와서 새로 정착하고 사는 사람들을 부여전에는 쫓겨온 사람들(亡人) 이라 했고, 고구려 사람들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亡人)는 의지에서 개천절을 (東盟)이라 했다 . 시경 한혁에 “그추그맥(其追其貊)을 모시정의에서는 한후의 선조들이 점차로 밀려 갔다”고 풀이 했다 . 중원 세력 북쪽에서 항거하며 밀려온 부족이다. 다른 한 줄기는 중원으로 내려가서 상나라에 깊히 관여했던 부족이 만주로 올라와 부여전에는 상나라를 뜻하는 은(殷正月祭,其國殷富)자가 나타 났다. 나라의 이름, 영역, 도착한 경로, 발생 시대, 부족이름 등등이 모두 여러가지로…..
부여(扶餘)의 어원: 전국시대 이전에도 사마천이 부여(夫餘)라고 불렀던 부족은 있었서야 한다. 이를 필자는 첫 영문본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Chapter 9. Trail of Gija Clan 箕子族” 에서 <상나라의 제23대 왕 무정(武丁, 高宗: 기원전 1250년 -기원전 1192년)이 산서성 해지 연안 부암(傅巖,不咸山)에서 노예로 성을 쌓던 사람을 찾은 즐거움이라 하여 그에게 부열(Buyuel傅說. 傅說 Fùyuè )이란 별명을 주었다. 그를 등용하여 상나라는 크게 번성했다. 부열의 후손들이 상나라 서울 근교에 살면서 높은 직책을 맡았다. 마지막 제상을 지냈던 부열의 후손이 기자(箕子) 였다. 상나라가 망하자 피난민들은 기자(箕子)를 따라서…..
부여전(夫餘傳)-1: 서론-1: 부여(夫餘)의 발생지와 영역: 사기 소진열전에 연 문공(燕文公;?-기원전 333년)이 연의 영역을 설명 했다: 고 했다. 전국책(戰國策 燕策)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 같은 저자가 화식 열전에서는 고 밝혔다 : 같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흉노열전 에는 동호 호(東胡, 胡)라 했고 좀더 세분 하여 오제본기에서는 발 산융 숙신 (山戎、 發、息慎), 발해만 서쪽 해안에는 기조선(暨朝鮮)이라 했다. 그 곳을 관자에서는 발조선(發朝鮮), 그 지도자를 북주후 (北州侯)라 했다 . 이를 상서정의에서는 중원 구주 (九州) 밖이라 하여 여주(餘州, Extra-state) 라고도 했다 . 전국시대 까지는 부여(夫餘)란 이름이…..
가야의 시말 소고(始末少考):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가야를 아래와 같은 한자로 기록 했다:伽倻國: 伽倻, 加耶, 伽耶, 駕洛, 加洛, 加羅, 伽羅, 迦羅, 임나(任那), 가량(加良), 구야(狗耶)가 있다. 그 곳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을 이다. 옛 창해군(滄海郡)이 가야의 탄생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모두 김수로왕(首露王)이 신라 초기에 나타났다. 가락국(伽落國,伽耶)은 고조선의 유민들이 남만주 해안선에 흐터저 이를 삼한이라고 부르던 동서 양한 교차기에 나타 났다 . 광개토대왕비문에 색인된 임나가라(任那加羅)가 발해만 서남쪽 해안선에 있었다고 풀이 했다 . 역사의 흐름을 감안하면; 다. 그를 뒷바침 할수 있는 사료가 삼국지 오환전과 관구검전에 실려 있다…..
왜인전(倭人傳)본론 설명-4: 한해(翰海)의 동서쪽-2: 한해의 서쪽 해안: 한해의 서쪽 통로인 중국 동해안에 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이 <동오(東吳)수장 손권이 호위 (胡衛)를 특사로 조위를 치려는 계획을 상의 하려는 목적으로 236년 봄에 만주에 있던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十年, 재위: 227년– 248년) 에게 보냈다[1]. 이 사건을 진수는 위약에서 인용 했다고 밝히 면서 고구려가 아니라 238년에 공손연 (公孫淵) 에게 <장미(張彌)와 허안(許晏)등을> 보냈다[2]. 그 내용을 종합해 보면 <공손연이 점유하고 있던 곳에 비미호(卑彌呼) 가 있었고, 그 곳이 비류수 연안으로 고구려에 속했던 땅>이라 한중 사서에 엇갈린 표현이 실렸다. 강남에 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