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전(高句麗傳)-본론:남만주의역사-6 공손(公孫)씨가 어떻게 양평성(襄平城)을 점령 했나? 고조선 지역의 통치 형태를 감안 하여 한마디로 표현 하면, 부여(扶餘, 夫餘)를 다리(connecting bridge)로 고구려와 백제, 왜(倭, 汗, 韓)를 혼용 했다. 뚜렸한 자치주였던 졸본주 (有小水貊。句麗作國,依大水而居)라고도 알려진 삼국사기와 삼국지에 나타난 가구 수를 감안하면 고 풀이 함이 합당 하다 : 부여의 총 인구가 8만호(戶八萬), 고구려가 3만호 (戶三萬) 예전에 2만호 (濊傳:戶二萬)였다. 한전(韓傳)에는 50여국이 있다. 큰 나라가 1만 여가 작은 나라는 수천 가구에 총인구가 10만여호 (總十餘萬戶)였다. 발해만 서쪽으로 판명된 변진전에는 큰 나라가 4- 5천가구(四五千家), 작은 나라는 6-7백 가구(六七百家), 총…..
고구려전(高句麗傳)-본론:남만주의역사-5 고조선 지역의 통치 형태: 통치형태와 체제의 운영에 관해서는 옛부터 깊히 다루어 왔지만 아직 정답을 찾지 못한 어려운 문제다. 이러한 심오한 문제는 주어진 시대와 장소 여건에 따라 그에 합당안 방안을 찾아야 한다. 당연한 명제 (命題)다. 이 어려운 문제를 주 무왕이 기자에게 물었다 . 후위성제(後魏成帝)는 이윤유서(彝倫攸敘)란 뜻이 누구나 이해 할수 있는 상식적 판단(Situation ethics, Common sense ethics)이라고 풀이 했다. 누구나 실천 해야하는 명제를 동양에서는 병법(兵法)으로 다루었다. 손자벙법 번역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서양에서는 미학 (美學, Art)의 범주로 인식 했다. 이성과 감정이 결부…..
고구려전(高句麗傳)-본론:남만주의역사-4 신라의 수도 금성(金城)을 공손도가 사용 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본기(新羅本紀第一, 二, 三)에만 금성(金城)이 나온다. 공손씨가 대륙백제를 업고 한해(북해, 발해- 요동만)연안에서 번창 할 때는 금성(金城)이란 글자가 사라졌다가, 삼한의 후예들이 옛 땅을 되찾으려는 시대부터 다시 나타난다. 금성(金城)은 옛 진시황의 선조들이 자리 잡았던 감숙성 통로에 있던 요새였다 . 오랫 동안 가한의 철옹성(金城諸韓)이였다 . 한무제가 영토를 넓힌 이후에는 방어에 좋은 지리지형에 진을 첬다는 뜻에서 금성지고 (金城之固)란 숙어가 나왔다. 공손도의 뒤를 이은 공손연은 신라(新羅)수도 금성(金城)을 본거지로 연왕 (燕王) 이라고 자칭 했다. 그를 처벌하려는 계획을 토의하면서…..
이서국(伊西國) 이씨(伊氏)의 원조가 단군 왕검 백익(伯益)의 성으로 밝혀저, “August 5, 2017”에 올렸던 글을 보충 하여 다시 올립니다. 위키백과에는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발표에 따라 여기 까지는 필자가 살펴본 내용과 일치 한다. 그러나 다음에 따라 붙은; 는 문구는 이해 할수가 없다. 일연 스님은 출처를 밝혔지만 이서국이 있던 곳을 잘못 풀이 했다. 첫쩨: 시대 판별에 혼란이 왔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제 3대 노례왕 14년(弩禮王樸弩禮尼叱今一作儒禮; 제위 24년-57년)인 38년에 이서국 사람들 (伊西國人)이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다 . 스님은 시조 박혁거세 부터 3대 노례왕까지의 내력을 했다. 건국초기라 고란(苦難)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