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삼국지는 그 시대를 살았던 진수가 썼기에 사료의 가치가 높다. 그러한 필자의 판단에서 삼국지 동이편 만을 인용하여 잃었던 한국 상고사를 복원 하려고 했다. 그 후의 왕조를 기술한 진서(晉書)는 350여년이 지난 후 648년 당나라 태종 (唐太宗李世民; 598年- 649年) 때에 방현령(房玄齡; 579年-648年) 이연수(李延壽) 등 20여명의 학자가 서진(265년 ~ 316년)의 40년 역사와 동진(317년 ~ 418년)의 역사를 합하여 편찬한 중국24사의 하나다 . 진서 이후 사서(史書) 편찬이 국가 사업으로 행해지고 다음 왕조에서 전왕조(前王朝)의 역사를 쓰는 본보기가 되였다고 하지만, 진서(晉書) 편찬에 관여 했던 여러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대동강 하류에서 발굴된 유적은 백제의 문화유산이다. 최근 Face Book에; 이라는 표제의 글을 읽고 필자가 찾아 밝힌 내용을 요약하여 설명 합니다. 한국상고사를 연구하신 분들의 큰 오류는 해 왔습니다. 그러한 증거가 개화기 이전에 실학파 학자들이 남긴 기록 보입니다. 이분들이 남긴 역사에 관한 기록은 “강단 사학계에서 주장하는 실증 사학”입니다. 응용과학을 전업으로한 저는 “古朝鮮 찾기”에서 밝혔습니다. 단군조선의 건국년도가 요순시대로, 즉 동양 역사의 발생시대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문제를 풀려면 탄생 시대와 직결되는 기록들; 고 봅니다. 우리민족의 원천(源泉)을 찾아 흐르는 물길을 따라 오면서 살펴본 결과를 지난 13개월에…..
백익(伯益)의 업적-1: 중국문헌에는 백익(伯益)을 여러 글자로 기록에 남겨 정확한 면모를 엿보기 어렵게 되였다. 청나라때에 편찬된 독서잡역(讀書雜釋) 요순시절 이름자를 훈과 음이 섞여 풀이하기 어렵다고 “益為翳. 契之為卨,皋之為咎”란 예를 들어 자세히 설명 했다 . 또한 백충장군 허령비(百蟲將軍顯靈碑) 내용도 인용 했다. 촤씨춘추의 초안자로 알려진 좌구명(左丘明)의 국어(國語)에는 정어(鄭語) 편에 백이(伯夷)가 진나라의 선조로 요 임금을 도왔고, 백예(伯翳)가 순임금 옆에서 매사를 상의하여 도왔다고 했다 . 열자(列子 湯問)에 [대우는 행동으로 보여 주었고, 백익(伯益)은 지식으로 이름이 알려 졌다 (大禹行而見之, 伯益知而名之) 고]한다. 치수 사업을 성공하고 우로 부터 통치권을 위임 받아…..
의문이 많은 시법(諡法, 謚法)과 익기(謚記): 동한 말기에 편찬된 풍속통의 황패(風俗通義 皇霸 )편에는 “謚; 웃을 익, 시호 시”라고도 읽는 예기익법(禮記謚法)란 문구가 삼황(三皇)과 삼왕(三王)에 적용된 이름으로 실려 있다 . 예기(禮記)와 풍속통의에 실린 내요의 공통점은 시(謚)자가 삼황오제(三皇 五帝)때 부터 있었다. 시/익(諡, 謚)자는 다. 익법(謚法)이란 백익(益)이 살아 있던 시대의 율법이고, 시기(謚記)란 율법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뜻이다. 시( 諡)자와 식초란 뜻의 초 혜(䤈)의 어간이 되는 “㿽;xī same as奚; xī xí / hei. 何也”자는 선진시대 문헌에는 보이지 않고, 금나라 때 한도조 (金; 韓道昭)가 편집한 오음집운(五音集韻)에 작은 주발(小盆;…..
부여시조 동명왕이 백익 (伯益)의 후손: 단군왕검 백익 (伯益)에서 “동아줄 삭, 찾을 색, 구할 소색(索)자”를 징검다리로, 동명의 출생지 북리색리국 (北夷索離國)과 연결 된 과정을 살펴보았다. 강희자전에 따르면 백익 (伯益)의, 제왕 만이 자칭하던 이라는 뜻(𠍳作朕虞。𠍳,古益字。《應劭曰》𠍳,伯益也)이 있다 . 백충장군 현령비 (百蟲將軍顯靈碑)문에 백익(伯益)이 전욱 고양씨의 두쩨 아들이고, 성은 이씨(伊氏) 휘가 익(諱益), 자는 토개(字隤敳)라 했다 . 사전에는 <저 늙은이 란 뜻의 이기(伊耆)는 옛 왕자의 호(古王者號)라 했다. 백익(伯益)이 납향제(臘享祭)를 시작 했다. 납형 사(蜡 )를 삭(索) 이라고도 한다 . 납향제는 겨울이 끝나는 시절, 즉 동지후 세번쩨 XX날에 천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