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강지치(成康之治) 성강지치 (成康之治)란 문구는 유교 문화권에서 태평성세라고 평하는 시기의 대명사다. 이 문구는 진수의 삼국지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 남쪽 사람들이 만든 사자성어(四字成語)다. 같은 문구를 당나라 때 위징(魏徴)이 당태종의 명을 받아 편풀한 군소치요(群書治要 吳志下)에 인용 했다. 성강지치란 문구의 이념에 합당한 치세라 하여 당태종의 집권 시기를 정관지치(貞觀之治)라 했다. 이 문구에는 <무력을 쓰니 보다 권모술수로 다스림이 상책이다>는 뜻이 숨어 있다. 좋게 말하면, 무력 보다는 협상과 타협, 즉 외교정책을 잘한 시기란 뜻이다. 유가에서 통치자의 좌우명으로 다루는 성강지치란 문구는 유교의 비조 <공자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가 이루어…..
고공단부(古公亶父)의 혈통. 주나라(周族)의 시조는 산해경과 시경에도 나오는 후직 (后穫, 后稷)이라 한다. 시경에 나오는 공유 (公劉)는 후직의 증손 이고, 함곡관 동쪽 상나라 땅에서 들어온 고공단부(古公亶父, 古公亶甫)가 후직의 후손이라 한다. 공유 (公劉)란 공(公)을 죽이고 이긴 사람 (劉)이란 뜻이 있다. 백익을 죽인 제개(帝啟)의 후손이라 본다. 홍수 피해를 받던 지역에 살았다. 공손씨(公孫氏)란 살인자 공유 (公劉)의 후손 이란 뜻이다. 하여 공손씨를 황제의 후손이라 한다 . 사마천이 만들은 황제란 직책에는 백익의 업적을 많이 실려었다. 맹자는 詩가 사라진 후에 春秋가 나타났다고 했다. 시경의 내용을 보면 서주 시대의…..
주나라(周族)의 시조는 산해경과 시경에도 나오는 후직 (后穫, 后稷)이라 한다. 시경에 나오는 공유 (公劉)는 후직의 증손 이고, 함곡관 동쪽 상나라 땅에서 들어온 고공단부(古公亶父, 古公亶甫, 周公亶父)가 후직의 후손이라 한다. 죽서기년에는 상나라의 28대 군주 무을(武乙;?- 1112 BC)이 즉위하여 은에 살았다. 분이 기주로 옮겼다. 제위 3년에 은에서 하북으로 옮기고, 기읍을 주공단부에게 하사(賜) 했다. 21년에 주공단부 (周公亶父)가 죽었다. 한시외전에는 대왕단부(大王亶甫)라 했다. 단부 (亶父)란 사람은 직책과 이름 자가 일정치 않고, 처음부터 함곡관 서쪽에 있던 사람이다. 부(甫, 父)자는 <성인의 경칭으로 영어 미스터(Mr.)와 같은 뜻. 한국 현대어로 ㅁㅁ…..
록도(綠圖, 錄圖)란 두 다른 글자는 동이의 수장으로 알려진 전욱고양씨와 관계가 있다 . 단군조선을 세운 단군왕검과 깊은 관계가 있는 문구라 단군왕검 백익과의 관계는 백이량부 (柏夷亮父)란 문구로 은밀하게 남겼다. 지리지형과 풍토의 차이로 단군조선이 대흥안령을 경계로 동서로 분산 되면서 한 부족국가 였던 부여 (夫餘)가 뚜렸한 가시국가로 나타났다. 대흥안령 서남쪽 일대에서 나타난 홍산문화는 동호(東胡)로 알려진 고조선의 문화유산 이다. 고고학 분야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일면이 동양 철학의 근간이 되는 도교(道敎)다. 선비족, 글안족은 고구려 부여와 같이 고조선의 후예다. 선비족이 만든 당나라는 도교(道敎)경전을 고구려에 전해 주었다. 유가에서는…..
록도(綠圖)란 글자는 동이의 수장으로 알려진 전욱고양씨(顓頊氏)와 관계가 있다. 그의 후손이 대흥안령 서남쪽 일대에서 나타난 홍산문화의 근간을 이루었다. 진서(晉書)에 실린 전욱수학어록도(顓頊受學於綠圖)란 문구가 한서의 저자 동한의 반고(班固; 32년-92년)가 집필한 백호통론(白虎通德論)에는 제전욱사록도 (帝顓頊師綠圖)란 글자가 있다. 출처를 전왈 (傳曰)이라 했다 . 유향의 신서(新序) 에는 전욱학호록도 (顓頊學乎綠圖)라 했고, 신선(新書)에는 강안에 들어가 녹도를 취(取綠圖)했다. 회남자(淮南子)와 묵자에는 황하에서 녹도가 나왔다(河出綠圖)고 풀이 했다. 록자 앞에 붙은 “於, 乎” 자는 형용사고, “造, 師, 取, 出, 奉”는 동사다. 형용사는 위(於high)란 어음이고, 호(乎hū hú;胡, 𣬣, 鬍)자는 삼족오를 타고 내려온 오손(烏孫,…..
서주 무왕의 도강 작전 앞서 “한해 따라 二萬里-4: 양자강 하구 회계(會稽)산의 유래”에서 해상 교류의 진전 과정을 살펴 보았다. 동북아시아에서 선사 시대 부터 중앙 아시아에서 동쪽으로 옮겨온 사람들이 “동물 껍질, 통나무, 갈대 등등” 주위에 있던 천연 자원을 자료를 배를 만들어 물을 건넜다. 고전을 살펴 보면 배(舟, 船舶)를 만들었다는 여러 사람 이름이 나온다 : < 이아 爾雅에는 천자 天子라 했고, 세본에는 황제 黃帝의 신하 공고화적 (共鼓貨狄)이 통나무를 파서 배를 만들었다. 산해경에는 양산 주위에서 도자기를 만들던 사람이 번우 (滛梁生番禺)를 나은 시기에 배를 사용…..
작은 배(Boat; not ship)는 함곡관 (函谷關)을 경계로 동쪽에서는 “주 舟”, 서쪽에서는 “선 船”이라 했다. 각종 고전에 같은 사건을 설명 하면서 배를 두 글자 “舟, 船” 로 섞어 표기 했다 . 융 우(戎禹)가 백익 후직과 같이 명을 받들어 (禹乃遂與益、后稷奉帝命) 치수 사업을 할 때에 벌써 작은 배를 사용 했다 . 사기 대완열전에 장건(張騫, ? ~ 기원전 114년)의 서역 견문기에 <그 곳 사람들은 왕의 얼굴이 새겨진 은화를 사용하고 수래와 선박(船)으로 수천리 거리에 있는 나라와 교류>를 한다 . 멀리 가려면 풍력을 이용한 배를 사용한것…..
지난 주에는 서주 무왕의 목야전에 동참했던 백어(白魚)를 좀벌래(蟫; 蠹鱼, 衣鱼)라고 논증 했다[1]. 그가 깃발을 들고 선두 지휘 했던 단공(旜公, 壇公)이다. 단공(旜公, 壇公)이란 글자는 사서에 없다. 사기에는 그를 필공(畢公)이라 했다[2]. 필(畢; bì / *bit)은 햇빛을 뜻한 글자다. 필공고(畢公髙)의 후손이 산서성(晉)에 살았다. 그 후손이 해,고, 위(解, 髙,魏,衛)씨다. 무왕이 출전에 앞서 친구 필공의 정원에서 필승을 기원하는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단공이 고조선의 수도 평양에서 무왕과 같이 가까이 지네던 시절을 읇은 시문이 시경 시간(詩經 小雅 祈父之什 斯干)이다. 같은 소아편에 실린 무양(無羊)은 단공이 지휘 하던 군사가 승전하여 돌아 오는 장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