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 따라 二萬里-7: 한해 동쪽을 통한 교류-1: 서론 한해 서쪽 해안을 따라 이루어진 상황은 삼국지 오주전과 공손도전에, 한해의 동쪽 연안을 따라 진출해가는 상황은 동이전에 실었다. 왜인전에는 대방군에서 여왕국 까지는 12,000리 (自郡至女王國萬二千餘里) 다。끝에는 믿기 어려운 문구 마저 실렸다; 뱃길로 일년을 가야 이르는 곳에(船行一年可至) 유라국과 흑치국이 있다[1]. 그러나 그곳에 나타난 나라 이름자(有侏, 有裸의 有자는 high의 사음자) 에는 남만주 연안에 살던 사람들이 세웠다는 뜻이 있다. 고조선의 후예 한예(韓濊)들이 상당히 큰 배를 타고 풍력, 또는 해류(海流)를 이용하여 바다 멀리에 있는 섬나라와 교류를…..
연나라 장수 진개(秦开)란 풀이는 잘못: 공자님이 19세에 송나라의 견궁씨(幵官氏)를 부인으로 맞아 들였다[1]. 평평 할 견(幵)자는 <오랑캐 이름,산 이름>이란 뜻이 있고, 개(开, 開)자와 같은 뜻이다. 사위 공야장(公冶萇, 公冶長)은 오환족이였다. 춘추전국시대에는 하북평원 전역이 기마민족의 활동 무대 였다는 뜻이 공자가어에 숨어 있다. 땅을 빼았긴 사람들의 선조가 강족(羌,幵)이다. 춘추시대 초기에는 오환족이 살던 마을과 제 환공(齊 桓公,재위: 기원전 685년 ~ 기원전 643년)이 살던 사이에 제후국 연(燕)이 있었다[2]. 이 때는 이미 주왕실이 서쪽에서 원주민에게 쫒겨 제후국 연(燕)과 같이 함곡관을 나와 하남성에 정착 했다. 좌씨춘추의 원본이…..
이서국(伊西國)과 미추이사금(味鄒 泥師今) 지난해 9월(Sep 06, 2017 12:29pm)에는 고구려전(高句麗傳)-본론:남만주의역사-3 에서 이서국(伊西國)을 다루었다. 이서국(伊西國)은 만리장성 동남쪽 끝, 발해만 서쪽에 있었다. 이를 신라가 정벌 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염사치 사건 발생시기>와 같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공손연 패망 이후가 된다. 이때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군사 (珥竹葉)가 나탄 천우 신조가 있었다. 미추이사금(味鄒 泥師今, 재위: 261년-284년) 의 음덕으로 죽엽군이 나타났다고 하여 미추왕 능을 죽현능(竹現陵)이라 불렀다>고 한다. 미추 이사금은 김씨로는 처음으로 왕이된 김알지 (金閼智)의 후손이다. 그는 노례이사금 다음 왕 4대 탈해이사금 (脫解尼師今, 재위: 57년~80년) 시대에 처음…..
낙랑군과 낙랑국: 이 두 이름은 사마천이 처음으로 만주 땅을 기록한 조선 열전에는 없습니다. 낙랑이란 낱말은 <발해만 서쪽 산꼴짜기를 흐르는 물소리, 또는 그 곳에 살던 어느 노파(여자 무당)의 잔소리와 같이 되풀이(多語, revolving sound) 하는 어음을 한자로 적은 글자>입니다. 𧧛𧧛,多語也。从言冄聲。樂浪有𧧛邯縣。 日行暆暆也。从日施聲。樂浪有東暆縣. 讀若酏. 出樂浪鏤方,東入海。一曰出浿水縣 鰅:魚名。皮有文,出樂浪東暆。神爵四年(BC54),初捕收輸考工 그 일대에 있던 국경선 패수(浿水)를 너머 친입한 한무제가 만든 한나라 (西漢)의 행정구역, 낙랑군입니다. 그 곳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이 요동만을 건너 요동반도 서해안 일대에 정착 했습니다. 이곳을 진국(辰國), 진한(辰韓者,古之辰國也) 이라 했습니다. 여러 가한(可汗,韓)들이 다스리던 곳이라 여러 한국(諸韓國)이라고…..
삼국유사 기이편 웅녀자(熊女者)의 뜻 . 사기 5제본기에 나온 유웅(有熊)이란 글자에서 왔다. 황제로부터 순임금과 우왕에 이르기 까지는 모두 성이 같고 국호는 다르다 (黃帝至舜、禹,皆同姓而異其國號). 황제가 유웅(黃帝為有熊)이고, 우왕은 하후란 별도의 성이 있다. 성은 사씨 (帝禹為夏后而別氏,姓姒氏)다[1]. 죽서기년에는 황제 즉위 원년에 관복제도를 실천하고 유웅에서 살았다[2]. 군서치요에는 황제의 성씨가 공손 (公孫)이고, 나라이름이 유웅국(有熊國), 이름은 헌원(軒轅)이라고 했다. 천진-당산 일대에 군림했던 성씨다. 왜 우왕을 융우(戎禹)가 성씨가 둘 인가는 앞서 설명한 다제다능한 동이부락의 수령 (東夷部落的首領) 백익 (伯益) 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사건을 합리화 시킨 문구다. 성이 같다는…..
일차사료의 풀이에 모순-3: 삼국지에서. 서진(西晉, 265년-317년)의 진수(陳壽; 233년-297년)가 편수한 삼국지 또한 동진(東晉)의 배송지(裴松之372년- 451년)가 주를 달아 어디가 일차 사료인가를 구별 하기 어렵다. 더더군다나 그가 살 당시에도 <옛 경전에 실린 백여 만자 (百餘萬言)를 바꾸어 어마어마한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하는 학풍이 춘추필법에 힘입어 핵심이 되는 많은 글자를 은밀하게 기록 했다. 그러나 진수는 출처를 많이 밝혀 비교해 볼수있는 사료를 제공 했다. 그의 진술이라고 인식되는 일차사료를 몇몇 살펴 보기로 한다. 서문(序文)을 다른 사람이 썼다고 볼수는 없다. 동이전 서문에 선비(鮮卑, 朝鮮의 卑賤한 평민이란 뜻)의 영역이 동쪽으로는…..
학술 토론을 하기에 앞서 우리민족의 첫 국가 이름 부터 확실히 밝혀야 마땅하다. 흔히들 부르는 단군조선이란 이름은 일차 사료에는 없다. 일연스님이 인용한 <위서 (魏書云)에는 (후에 나타난 위만조선 보다 옛적에 있었던 조선이라 하여) 고조선 즉 왕검조선 이다> 라고 밝혔다: 그 나라를 세운 사람들은 시경 <시간 (斯干)이 다스리던 부족과 같은 혈통을 한 사람들이 세운 옛 조선이 왕검조선이다. 신비스럽게 잉태하여 태어난 아들이 단군왕검>이라고 했다. 意在斯焉古朝鮮王儉朝鮮. 雄乃假化而婚之。孕生子。號曰壇君王儉. 단군왕검(壇君王儉)은 제사장 왕검이란 뜻의 복합명사다. 왕검을 잃은 뒤에는 (이름을 알수가 없는) 제사장(壇君, 禮君, 慰禮)이 조선을 다스렸다…..
중국의 전사사(前四史)중에 사기와 삼국지가 일차 사료다. 사마천의 사기는 발표된 당시부터 어용학자들의 시비거리로 가필 수정이 많이 되었다. 다행이 사마천은 “凡百三十篇,五十二萬六千五百字,為太史公書” “余述歷黃帝以來至太初而訖,百三十篇” 황제로부터 태초 까지 (太初; 前104年—前101年) 130편이라고 밝혔다.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년? – 기원전 86년)의 사기 여러 곳에 저소손 (褚少孫)이 가필 했다(褚先生曰)는 증거가 나타나고 창해군 지역에 나타난 공손도의 혈통이 신흥유학파의 실천자 평준후 공손홍(公孫弘)이라는 인식을 남긴열전 (平津侯主父列傳) 에는 한서의 저자 반고(班固; 기원 후 32–92)가 이르기를 하는 문구가 있고, 사마천 이후 사람인 유향(劉向; 기원전 77년 ~ 기원전 6년) 의 이름도 실려 있다. 한무제는 진시황과 같이…..
일차사료의 풀이에 모순-1. 잘못 풀이 한 원인은 크게 3가지 좀더 구체적으로는 6가지 였다. 당대의 석학이 춘추필법으로 작성하여 일차 사료가 혼미 하다: 사음을 훈역으로 풀이: 어순을 잘못 풀이: 五胡十六國이란 고조선(東胡, 胡)의 후손이 15개 나라를 만들어 다투던 시절이란 뜻이다. 이 시대를 漢族으로 알려진 수문제가 통일 했다. 수나라 때 부터 북쪽 언어(胡)를 이해 하려는 음운사전을 만들고 그때 부터 옛 글자 풀이를 달리 했다. 남족이 만든 사전에 따라 북쪽 언어(胡)를 잘못 풀이 하여 인용: 띄어쓰기의 인식이 결여: 이를 이해 하려면 육서(六書)라고 하는…..
마땅한 반론 입니다. 저가 증거를 재시 하면 받아 주겠습니까? 아니 증거를 보아야 답을 하지….. 이렇게 시비는 합리적으로 시작 되어갑니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어느 한 쪽도 양보 하려 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을 고수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기란 극히 어려운 문제 입니다. 하여 2년전(Oct 10, 2016 6:05pm)에 “발조선(發朝鮮)의 선조가 홍산-하가점하층 문화를 이루 었다.”라는 표제 로 짧은 글을 올렸습니다. 다음주에는 홍산문화레 관한 토의가 있다고 하니 다시 올려 드립니다. 발조선(發朝鮮)의 선조가 홍산-하가점하층 문화를 이루 었다. 저가 역사 인식론에서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