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상고사는 동양문화의 시발점에서 찾아야 한다. 하여 “글자 속에, 시경에 감겨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경에는 “여지하 如之何”란 문구가 국풍 國風 여러편에 실렸다. 소아 소천지습 소빙( 詩經 小旻之什 小弁)에도 나온다[1]. 어찌하리, 어찌 하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몰라 망서리 마음을 표현한 문구다. 소리나는 대로 그 당시 상형글자로 기록 했지요. 흔히 말하는 가차 했습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여(如)자를 이(而)자와 같이 읽었다고 합니다. 같은 문구가 고전 여러 곳에 실렸다. 朝鮮 또는鮮于 의 선자는“析, 斯”자로도 기록 했다. 시경의 시한(斯干)은 선우 (鮮于, 單于)와 같은 지도자를 부르던 낱말이다[2]. 제자 만장이 시경…..
오백지패(五伯之霸也)의 첫 세 사람은 고조선 시대: 오늘 알려진 춘추 오패란 말의 뜻은 좌씨춘추(左傳)에 서진두예(杜預;222-285년)가 밝힌 오백지패(五伯之霸也)에서 나왔다. 첫 번쩨 사람이 하백곤오 (夏伯昆吾) 즉 우왕이다. 뒤를 이어 두 사람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다. 중원 세력을 괴롭히던 지도자라 비하 하여 불렀다. 상의 대팽(商伯大彭)과 돼지 때의 지도자란 뜻으로 부른 시위(豕韋)라고 실렸다. 첫 세 사람은 서주 창립이전 사람들이다[1]. 같은 내용을 백호통론에서는 “곤오씨, 대핑 씨, 시위씨, 제환공(齊桓公), 진문공(晉文公)” 이라 했다. 이름의 출처가 좌씨춘추라 춘추오패라고 풀이 할수도 있겠지만, 이는 “소가 우는 소리,馬/牟;móu mù mào 라고 기록 되던 부족이 살던…..
마한 땅에 가서 왕이 되었다는 기준 (箕準)이란 기록은 잘못이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 할때 고조선(古朝鮮, 東胡)의 왕이 었던 부(否)가 죽어 그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 (否死,其子準立)는 문구에서 옛 북관 말에 독음이 같은 “그, 기”글자로 비꾸어, 그 사람의 아들(其子)을 기준 (箕準)이라 기록 했다. 아들 준과 같이 도망을 못가고 만주에 남았던 일족은 모성한씨(因冒姓韓氏)를 성으로 했다. 마한 땅에가서 왕이 된 준왕 (準王)의 성씨는 유목민의 피를 이어 받은 한씨(韓氏) 로 기록 해야 마땅 하다. 흔히들 말하는 기자동래설은 사료를 잘못 풀이한 결과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이 라고 하는…..
朝鮮이란 글자의 이동 경로 끝: 결론: 필자는 <한국 고대사는 중국문헌에 찾아야 한다>는 대전제(大前提)를, 여러 단계의 소전제를 증명 하는 경로를 지나, 중국 사람들이 남긴 기록에서 찾았다. 태백산(太伯山)으로 기록된 우랄 알타이 산맥 동남부에서 출발한 유목민이 평원을 지나 내몽고 동남부에 자리 잡았다. 그들은 소금을 찾아 흐터졋다. 한 부류는 동남 쪽으로 나와 발해-요동만 해안에서 찾았고, 다른 한부족은 태행산맥 서남 쪽으로 분수를 내려와 산서성 해지에서 소금을 구했다. 이곳이 동양 문화의 발생지인 홍수로 범람하던 구주 땅이다. 치수사업에 성공한 부족이 해지 연안에 자리를 잡고 처음으로 지역을 다스리는…..
남만주에 나타난 조선(朝鮮)의 위치-5: 조선(朝鮮)이 요하 동쪽으로 나타난 사연: 지난Jan 12, 2019, 11:39 AM에 이어 Jan 15, 2019, 9:28 AM 또 다시 남만주에 나타난 “조선(朝鮮)의 위치-1”을 올렸다. 진수가 오묘하게 남만주 지명들을 기술했스니, 더이상 혼돈하지 마시라는 경고를 했다. 고전에 “요동, 패수, 낭랑, 대방, 양평 지역”이 기원전128년(元朔元年) 에 사기 평준서(平準書)에 실린 창해지군 (滄海之郡)이 나타났던 곳으로 대륙 백제의 발생지다. 이를 계속 하여 보충 수정했다. 의문이 많은 공손도가 그 곳에 나타난다. 중국 사관들은 부여(夫餘, 扶餘)에서 분가 하여 한해의 동서 연안으로 흐터져 나갔던 삼한의…..
조선호(朝鮮胡)와 조선 해중(朝鮮海中): 남만주와 중원과의 교류가 활발해 지면서 나타난 현상이 창해군이다. 통상권을 놓고 겨루던 한무제는 섭하(涉何)를 사신으로 조선에 보냈다. 그가 전송 나온 조선의 비왕을 국경선 浿水가에서 살해 하고 급히 도망처서 국경선에 설치 했던 요새로 들어 갔다. 한무제는 그를 진급시켜 요동 도위(遼東都尉)로 임명 했다[1]. 원봉중(元封:前110年-前105年)에 길상이 나타 났다. 조선을 격파하고 낭랑과 현토군을 세우니 朝鮮이 바닷속에 있서 월지상(越之象)이라 하고, 북방 내륙에 살던 사람들을 조선호(朝鮮胡) 지역에 살았다[2].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 오고, 북쪽 으로도 흐터저 나갔다는 뜻이다. 그 전부터 고조선 사람들은…..
남만주에 나타난 조선(朝鮮)의 위치-3:서안평 (遼東西安平)일대의 영토 분쟁: 몇달 전에 올린 “창해군에 얽힌 비밀”에서 대륙 백제의 존제를 숨기려고 발생지에 나타났던 滄海郡 부터 조작 했다고 주장 했다. 그 곳에 공손씨가 나타났다. 공손도(公孫度, ? ~ 204년) 를 요동 양평인(遼東襄平人)이라고 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지명이다. 그 때 부여는 고조선의 서쪽 세력 선비와 동쪽 세력 고구려의 틈바구니에 있었다. 공손도가 부여왕 위구대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妻以宗女)드렸다[1]. 동탁은 공손도를 요동 태수로 임명 했다. 그 직책을 공손연이 이어 받아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2]. 고구려의 왕위 쟁탈전 발기…..
남만주에 나타난 조선(朝鮮)의 위치-2: 유목민의 지도자 “毋丘儉”을 어떻게 읽나: 관구검이라고 읽는 사람은 북쪽 유목민이였다. 유목민을 “소가 우는 소리, 馬/牟;móu mù mào”라고 기록 하여 毛詩는 유목민이 부르던 노래가 근본을 이룬다고 “古朝鮮 찾기”에서 밝혔다. 의문이 많은 글자 “毋”는 유목민을 뜻한 또 다른 사음자다[1]. 공자는 하북 평원에 살았다. 시경과 공자가 남긴 문구에는 유목민이 쓰던 사음자가 남아 있다고 추리 된다. 논어 학이편(論語 學而)에는 “毋, 無”자가 여러 곳에 많이 나온다. 학이편에 나오는“無友不如己者”란 문구를 논어 자하편에는「毋友不如己者」라고 글자를 바꾸어 기록 했다[2]. 논어주소에서도「無友不如已者」라 했다. 종전의 풀이에…..
東北亞 古代史 中古에 나타난 조선(朝鮮)의 위치: 동북아시아 역사를 세로 써야 한다(東北亞 古代史 新論)는 취지에서 시대 구별을 제시 했다[1]. 지금 까지는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년에 산서성 해지연안 평양 (平陽, 平壤)에 수도를 정한 고조선이 동쪽으로 옮겨와 기원전 208년에 동서로 갈라진 시기 까지의 상고(上古, Classical antiquity)시대를 다루었습니다. 앞으로는 진수가 금조선(今朝鮮)이라고 부르던 곳이 사라진 시기를 고대사 중고 (中古, Mid-Antiquity, Middle Antiquity)라고 했습니다. 몇 차례에 걸쳐 금조선이 언제 어떻게 사라젔나를 살려 보겠습다. 남만주에 나타난 조선(朝鮮)의 위치-1: 개론: 옛적에 국가 이름을 부를 때는 통상적으로…..
朝鮮이란 글자의 이동 경로-9: 고조선 세력을 막으려고 장성을 쌓다. 전국시대 말기에는 북쪽에 있던 “秦,趙,燕”세 나라가 고조선 세력을 막으려고 성을 쌓았서요. 황하문명 발생지 일대에 살던 서쪽에서 온 유목민들이 지역에 따라 여러 부족으로 살았습니다. 고조선의 여러 부족을 지역에 따라 서안 동북쪽에는 백적 (白狄), 진의 북쪽에는 임호(晉北有林胡)、연의 북쪽(燕北)에는 동호와 산융 (有東胡, 山戎) 이라고 했서요. 자세한 내용이 진문공이 천자(晉文公實召天子) 를 불렀다는 시기를 설명한 흉노열전에 나옵니다[1]. 동호가 소유하고 있던 구대지 (歐代地)를 조나라가 빼았었습니다[2]. 이 지역에 있던 구탈 (Ou tuo 甌脱, 歐代地)의 소유권을 놓고 동쪽 동호(東胡)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