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은 백익의 후손-숙진(肅慎)씨을 위해. 백어(白魚),필공이 양때 같이 이끌고 참전한 장면을 그린 “麾之以肱、畢來既升”란 시귀가 무양(祈父之什 無羊)편에 실렸다. 고조선의 발생지에 들어와 그곳 사람들을 사용하여 금석문을 만들었다.篆,掾書,隷書. 이괘(利簋)에 나타난 글자는 籒文-韓穢字
단군조선이 산서성에서 나타났다는 확증. 우리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일연(一然)스님이 고려 충렬왕 7년(1281년) 남긴 삼국유사에 단군조선의 건국신화가 있다. 다행히도 출처를 위서(魏書)라고 했다(*[. 三國遺事:魏書云。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亦云白嶽。在白州地。或云在開城東。今白岳宮是開國號朝鮮。與高同時(堯時)。古記云。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數意天下。貪求人世。父知子. 三危太伯. ]) 단군신화를 기록한 사람이 살던 시대 부터 2,000년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 아사달에 수도를 정했다. 요임금과 같은 시절(與高同時)이라 했다. 스님이 읽었던 위서는 진(晉)나라에서 분리되어 나타난 전국칠웅의 하나였던 위(魏,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5년)나라의 역사서가 분명 하다. 사기 위세가(史記 魏世家)에는 필공 고의 후손(畢公高之後)이다.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하고 고를 필에 봉했다(而高封於畢) 하여 필을 성씨로 했다. 그 후에 서인이 되어 중국에 동화 되거나…..
삼위태백(三危太伯)의 삼위(三危)란 글자: 위서에 이르기(魏書云)를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몹시 바랐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 보고 가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 했다[. 三國遺事:魏書云。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亦云白嶽。在白州地。或云在開城東。今白岳宮是開國號朝鮮。與高同時。古記云。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數意天下。貪求人世。父知子意。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乃授天符印三箇。遣往理之。雄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即太伯今妙香山.]. 단군신화에 나오는 위(危)자는 사음자다. 설문해자에는 위태롭다(殆:危也).시경위풍에 나오는 올라가기 어려운 성벽“乘彼垝垣” 을 뜻한 글자라 했다. 중국 고전을 살펴 보면 후에는 단군왕검 백익을 뜻한 글자로 쓰이기도 했다[. 詩經 國風 衛風 氓:氓之蚩蚩、抱布貿絲。匪來貿絲、來即我謀。送子涉淇、至于頓丘。 匪我愆期、子無良媒。將子無怒、秋以為期 乘彼垝垣、以望復關。不見復關、泣涕漣漣.]. 한민족의 선조가 우랄 알타이산 남쪽에 있는 칸 탱그리(Khan Tengri Mountain) 일대에서 왔다는 증거다. 삼위(三危)란 글자는 상서 우서 순전(尚書 虞書 舜典)에…..
안동대장군 왜국왕(安東大將軍 倭國王)이 편지를 작성한 장소: 앞서 한해(翰海)를 언제 어느 누가 처음으로 건넜나를 살펴 보았다. 중국 기록에 신라임나 가라(新羅 任那 加羅)를 다스렸다는 안동대장군 왜국왕(安東大將軍 倭國王)이 편지를 작성한 장소를 찾아 보기로 한다. 진서(晉書)에는 공손연이 숨었다 잡혔던 옛 졸본주 양평성 일대를 동왜(東倭)라고 했다(*[.晉書 帝紀第一:魏正始元年春正月,東倭重譯納貢,焉耆、危須諸國,弱水以南,鮮卑名王,皆遣使來獻。天子歸美宰輔,又增帝封邑。初,魏明帝好脩宮室,制度靡麗,百姓苦之。帝自遼東還,役者猶萬餘人,雕玩之物動以千計。至是皆奏罷之,節用務農,天下欣賴焉.]). 남제의 심약(沈約:441~513年)이 편술한 유송(劉宋:420년 ~ 479년) 역사서(宋書 夷蠻)에는 당시 유송의 해안선에 있던 여러 부족과 국가를 설명 했다(*[. 宋書 卷九十七列傳第五十七 夷蠻:居大海中洲上,相去或三五千里,遠者二三萬里,乘舶舉帆,道里不可詳知。外國諸夷雖言里數,非定實也.]): “왜는 바닷속 섬에 산다. 외국 여러 족속은 이수를 몰라 믿기가 어럽다. 흔히 3-천리 먼곳은 2-3만리를 배를 타고(乘舶舉帆)가는 길이라 거리(里數)를 자세히…..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의 세로운 고찰-2: 의문의 안동대장군 왜국왕(安東大將軍 倭國王)이란 문구: 동북아시아 상고사에는 왜왕(倭王,倭國王)이란 글자가 여러 시대와 장소에 나타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倭國,倭人)자가 많이 나온다. 백제 본기에는 진사왕(辰斯王, 재위: 385년~392년) 때에 왜와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왜 가야제국이 모두 한해 서북쪽에서 나타난던 시절이다. 일본 구주후쿠오카 시(福岡市) 해안에서는 왜왕인(委奴國王)이 발견 되었다. 일본에서 국보로 다루는 옥새의 글자를 중국에서는 왜소 왜(倭)자로 바꾸어 “漢倭奴國王印”라 한다. 또 다른 왜왕이 다스리던 땅이 한해 동남쪽 연안(倭地溫暖,冬夏食生菜,皆徒跣) 오늘의 구주 남쪽과 유구 열도에도 있었다. 이지역 사람들이 키가 삼사척 이라 작다(人長三四尺)하여 왜(倭)자를 형용사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의 세로운 고찰. 일본(日本)이란 이름자는 수당 (隋唐)전환기에 한해의 동남쪽 섬에 있던 열도 백제를 뜻하던 왜(倭)에서 나왔다. 진수가 삼국지(鮮卑傳)에서 한(汗人, 汗國)자 동이전에는 왜(倭人,倭國)자로 기록 했다. 이를 후한서에 그대로 인용하였다. 왜자의 출원지는 발해만 서남쪽, 창해군(滄海之郡)이 나타났던 곳이다. 양자방언에 조선(朝鮮)이라한 지역의 해안이다. 임나(任那)란 글자가 그 곳을 정벌했던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타난“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 鹽*城, 倭寇大潰*, 城內” 문구에 있다. 이와 같은 사료를 근거로 “任那加羅”란 지명이 한반도 남쪽에 있었다는 일본 사람들의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을 세로이 설명 한다. 필자는 광개토대왕의 격전지가 남만주에서 중원에 이르는 지역에 국한 되어 한반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