箕子가 갔던 조선은 산서성에 있었다: 기원전 1046년에 목야전에 패한 [상나라의 제상 기자가 조선에 갔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있다. 당시 과연 [箕子가 어떻게 한반도 조선땅에 왔나]하는 의문이 생긴다. 의문을 풀어줄수 있는 사료가 사마천의 사기에 실려 있다. 그 징검다리 하나가 한국에는 잘 알려 지지 않은 상용(商容)이란 사람이다. 태사령 사마담(司馬談: c. 165 BC – 110 BC)은 태산에서 거행된 무제의 봉선 의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기다가 병이 나서 죽었다. 죽을 때 아들 사마천에게 생전부터 편찬하던 역사서의 편찬을 완료해 줄 것을 부탁한다 ……
군무예덕(君無穢德)이 망국의 원인: 유향의 신서(新序 雜事四)에 실린 내용이 왕충의 논형변허(論衡變虛)에도 실렸다. 그들이 인용한 시경문구 “夏后及商用亂之故,民卒流亡”는 현존하는 시경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나라와 상나라의 말기에 고난(苦難)을 격던 이유는 지도자가 군무예덕(君無穢德)라 했다 . 예덕이란 더러운 덕이라 풀이 할수 없다. 예맥족의 지도자와 같은 현명한 군주가 배풀었던 덕치를 뜻했다. 상용(商用)은 기자 이전에 제신의 수상이었다.
삼국유사에 나타난 고조선의 천도: 금미달 (今彌達)은 어디였나. 오제본기와 상서에 나타난 우리양곡(嵎夷 暘谷)이 첫 아사달 (阿斯達)이다. 그 곳에서 분수를 따라 내려와 치수사업을 성공하고 통치권을 인수 받아 왕중왕이 된 동이 수령 백익이 해지연안, 즉 오늘의 운성시에 수도 평양성(平壤城)에서 朝鮮을 선포 했다 . 이를 고조선 즉 왕검 조선(古朝鮮王儉朝鮮)이라 했다 불만을 품은 융우의 추종자들이 단군왕검 백익을 살해 했다. 지도자를 잃고 북쪽으로 다시 올라가 분수 유역, 오늘의 임분시(臨汾市)에 있던 첫 수도 아사달에 수도를 정했다. 백익을 죽였던 사건이 산해경등 여러 기록에 은밀하게 남아 있다. 최씨역림에도 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