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武丁, 1250-1192BC)이 공사장에서 노예로 일하던자를 맞아드려 상나라의 중흥을 이루었다.[1] 불암성 노역장에서 얻은 즐거움 또는 조언자라 하여 부열(傅說)이란 이름을 주었다. 부열(傅說)이 와전 되여 부여(扶餘)란 이름이 중원에 나타났다. 그가 중원에 자리잡은 扶餘의 후손이고, 그 가문의 마지막 지도자가 기자(箕子)라고 필자는 풀이 했다. 부열 (傅說)을 경사로 임명(卿士傅說)하여 견학양로(視學養老)라 했다. 얻은 후 융재태묘(肜祭太廟)에 유치래(有雉來)라 했다.[2] 유가에서는 꿩이 왔다고 풀이 했다.[3] 잘못이다. 은유법 표현이다. 글자를 보면 활(雉:矢,隹)을 잘 쓰는 오환 부족이 찾아 왔다는 뜻이다. 사건 당시 고종이 조을에게 문의 했다. 조을이 답하기를 원방군자 태유지자 (遠方君子殆有至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