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차사료의 풀이에 모순-3: 삼국지에서.
서진(西晉, 265년-317년)의 진수(陳壽; 233년-297년)가 편수한 삼국지 또한 동진(東晉)의 배송지(裴松之372년- 451년)가 주를 달아 어디가 일차 사료인가를 구별 하기 어렵다. 더더군다나 그가 살 당시에도 <옛 경전에 실린 백여 만자 (百餘萬言)를 바꾸어 어마어마한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하는 학풍이 춘추필법에 힘입어 핵심이 되는 많은 글자를 은밀하게 기록 했다. 그러나 진수는 출처를 많이 밝혀 비교해 볼수있는 사료를 제공 했다. 그의 진술이라고 인식되는 일차사료를 몇몇 살펴 보기로 한다.
서문(序文)을 다른 사람이 썼다고 볼수는 없다. 동이전 서문에 선비(鮮卑, 朝鮮의 卑賤한 평민이란 뜻)의 영역이 동쪽으로는 요수(遼水)에 까지 이르렀다[1]. 그가 이름한 요수(遼水)는 전한 시대 문헌에 나오는요수(遼水)를 뜻했다. 여씨춘추와 유향의 설원(說苑)에는 북경-천진 일대를 지나는 해하(海河)를 동관 한기에서도 요수(遼水)라고 했다. 그 일대 요동에 고조조(遼東高廟災)가 있었다 [2]. 진수가 요수(遼水)를 요하(遼河)로 둔갑 시켜 사마천이 연의 장성이 양평(襄平)에 이른다고 했던 장성이 요하를 건너 요양에 이르렀다는 상식 밖의 풀이를 한다. 그러나 삼국지에는 여러 사료을 인용하여 요동(遼東)이란 지역은 난하 서쪽 옛 요동을 뜻하여 요동 (遼東)이란 곳을 두 곳에 있는 듯 혼잡하게 설명 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타나는 양평(襄平)은;<진시황과 여태후 본기에 나타난 요동 (遼東) 양평(襄平), 즉 당산 일대를 뜻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중국 사료에 따라?) 이 두 지명을 확실히 분별하지 못했다.
진수는 현지 노인들의 예기를 많이 인용 했다. 예전에 기노(耆老) 란 출처를 밝히고 “자위여구려동종 自謂與句麗同種”란 문구를 남겼다. 여(與)자는 산해경에 나타난 부여를 뜻한 부여지국(胡不與之國)의 략자다. 고구려의 근간이 되는 예맥족은 부여(不與之國) 고구려와 같은 혈통 호(胡, 東胡)란 뜻이다. 앞서 부여 (夫餘, 扶餘) 의 어원을 설명 했다. 부여 (蜉蝣, 浮游作矢, 扶柳)족이 해지연안에서 연산 산맥을 따라 만주로 올라 왔다. 그러한 역사의 흐름을 인식 하지 못하고는 동이전 여러 곳에 나오는 같을 여(與)자 또는 같지 않다고 풀이 되는 불여(不與) 라는 문구를 옳바로 풀이 할수가 없다.그 예문을 동이전에서 찾아 지난 번(Sep 22, 2018 10:17am)에 “한해 따라 二萬里-5: 한해 연안에 살던 사람들의 의사소통”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삼국지 동이전에 실린 사람들은 모두 같은 언어를 썼다. 그러나 지도자 백익 (伯益, 伯夷)을 잃는 고조선 사람들을 <떠돌이 방랑객 이란 뜻>에서 여러 글자로 표현 했다. 그 들이 흐터저 옛 고조선 영역에 넓리 흐터저 살았다. 호부여지국 (胡不與之國)을 간략히 불/부여(不與) 또는 여(與)자로 기록 하여 번역에 혼란을 겪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있다:
“其人形似夫餘,言語不與夫餘,句麗同”. “準王海中,不與朝鮮相往來。其後絕滅”.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言語不與韓同,皆髠頭如鮮卑”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地與之。有城柵。其言語不與馬韓同,名國為邦,弓為弧,賊為寇”. “至王莽末,並與匈奴為寇. 鮮卑亦東胡之餘也,
別保鮮卑山因號焉。其言語習俗與烏丸同,是後或反或降,或與匈奴、烏丸相攻擊”
위에 인용한 문구의 불여(不與)는 선비산(鮮卑山) 즉 의무려산 서쪽에 있던 부여(扶餘)족을 뜻했다. 그들이 선비씨((鮮卑氏)와 같은 고조선 사람 (東胡)이다. 이들이 한해를 따라 강화도(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를 지나 제주도와 멀리 유구에 까지 이르렀다. 함경도 방언에 아바이(父, father) 이란 뜻이 글안의 태조(遼 太祖, 재위: 907년- 926년) 이름이라고 알려진 야율 아보기(耶律 阿保機, Abaoji of Liao)다. 북한에서는 한 때 “위대한 수령님 아바이 동무”라 했다. >
발해만 서쪽 연안을 따라 남만주 사람들이 창해군이 생겼던 지역과 옛적부터 계속하여 교류를 했다는 사실을 선학들은 까마득히 몰랐다[3]. 하여 남만주에 살던 위만이 되돌아와 왕이 되였다는 뜻의 복래왕지(復來王之) 하는 문구는 아무도 다루지 않고 위만(衛滿, 魏滿)이 연(燕)나라 사람이라 인식하고 있다.
삼국지 선비전에서 단석괴(檀石槐)에 관해 설명 했다. 발해 서남쪽 연안에 한인( 汗人)이 사는 한국(汗國)있었다. 같은 곳에서 발생한 같은 사건을 후한서 에서는 “倭人 倭國”이라 했다. 대륙 백제, 가야, 왜가 옛 창해군이 있던 지역에서 나타났다. 발해를 창해라고 했다. 발해만 연안에 있던 한국 사람 한인( 汗人)들이 고기 잡던 바다가 한해(汗海, 翰海)다.
지금 까지 필자가 올린 어러편의 글에서 일차 사료를 잘못들 풀이 했다는 실예를 들었습니다. 고조선의 후예들이 다스리던 바다라 한해라 했고, 그곳에서 대륙백제, 왜, 가야 연맹체가 나타나서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유구열도로 진출한 근거를 밝혔습니다. 이렇게 면 싯점에서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신비의 여왕 비미호 (히미코,卑彌呼)가 왜 여왕이 아니라 백제의 여자 제사장 (假倭王, 慰禮, 禮君) 으로 밝혀 젔다. 또한 그녀가 처음으로 조위에 사신을 보내면서 포로 몇명 함께 보내 습니다. 그 포로는 동왜(東倭, 卒本扶餘)에 숨어 있던 공손연(公孫淵)의 잔여당이라고 풀이 했다. 이로 인하여 동왜 사람들이 서진 초기에 고위 관리로 임명 되어 대륙에 백제의 기반을 닦았다.
끝
October 10, 2018
[1].三國志: 後鮮卑大人軻比能復制御群狄,盡收匈奴故地,自雲中、五原以東抵遼水,皆為鮮卑庭。數犯塞寇邊,幽、
并苦之。田豫有馬城之圍,畢軌有陘北之敗. 會霖雨三十餘日,遼水暴長,運船自遼口徑至城下.
[2].前漢紀 朝鮮本秦時屬遼東。漢興以為其遠難守。故遼水為塞。盧綰之反也。燕人衛滿亡命。聚黨千餘人在遼。
居秦故地. 遼東高廟災。夏四月壬子。高園便殿災。上素服五日。其後太中大夫董仲舒居家。推其意以高廟不當居遼東
[3]. 三國志 濊傳: 陳勝等起,天下叛秦,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燕人衞滿,魋結夷服,復來王之. 十三州志曰:浿水縣在樂浪東北,鏤方縣在郡東。蓋出其縣南逕鏤方也。昔燕人衛滿自浿水西至朝鮮。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