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北亞 古代史 中古에 나타난 조선(朝鮮)의 위치:
동북아시아 역사를 세로 써야 한다(東北亞 古代史 新論)는 취지에서 시대 구별을 제시 했다[1]. 지금 까지는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년에 산서성 해지연안 평양 (平陽, 平壤)에 수도를 정한 고조선이 동쪽으로 옮겨와 기원전 208년에 동서로 갈라진 시기 까지의 상고(上古, Classical antiquity)시대를 다루었습니다.
앞으로는 진수가 금조선(今朝鮮)이라고 부르던 곳이 사라진 시기를 고대사 중고 (中古, Mid-Antiquity, Middle Antiquity)라고 했습니다. 몇 차례에 걸쳐 금조선이 언제 어떻게 사라젔나를 살려 보겠습다.
남만주에 나타난 조선(朝鮮)의 위치-1: 개론:
옛적에 국가 이름을 부를 때는 통상적으로 그 부족국가의 수도가 있던 지역을 뜻했다. 때때로 두 나라가 세력 다툼을 할 때는 두 나라 사이의 국경 또는 격전지를 밝혔다. 싸울 때 나타난 전쟁터는 비교적 정확히 위치를 기술 했서야 한다. 그러한 인식에서 상태에서 진수(陳壽 233-297)가 예전 (濊傳)에 금조선(今朝鮮) 이라고 이름한 곳을 찾아 낸다면 동북아사아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디딤돌이 된다.
진수가 오묘하게 기술 했던 남만주 지명들:
기원전 208년에 동서 양쪽으로 갈렸던 고조선의 만주지역을 <천자의 영역 밖이라 해외지사로 취급 했다[2] . 이를 다시 둘로 나누어 <한무제가 점령 했던 영역 밖을 동이(東夷)라 하여 夫餘로 기록 하고, 우거왕의 경기 지역은 오환 선비전으로 분리 하고, 동이의 기원을 서쪽에서 온 융족(西戎)으로 숙신(肅慎)씨가 순임금과 고조선 그리고 서주 시대 (自虞曁周)에 걸처 중원과 교류가 있었다. 서역에 관해서는 한나라 시대의 기록이 있다. 공손연 까지 3대에 그들의 세력이 요동에 있었지만, 천자의 영역 밖이라 해외지사로 인정 (委以海外之事) 했다. 공손연을 주살하고 낭랑과 대방군을 회수하니 동이가 굴복 했다. 그후 고구려가 배신하여 환도성을 점령(踐肅慎之庭) 하고 남옥저를 거처 요동 반도 동쪽에 까지 이르렀다.>고 동이전을 시작 했다. 글자가 다르게 기록한 두 부여(夫餘, 扶餘)가 동이의 기둥이라고 “부여의 어원” 에서 설명 했다. 현토군에 있던 부여성을 지나 졸본부여를 지나 갔다는 표현을 유오환골도(踰烏丸骨都)라 했다. 그가 남긴 수낭랑 대방지군(收樂浪、帶方之郡)이란 문구에서 그당시의 국경을 추리 할수 있다. 동이에게 빼았겼던 <발해만 서쪽 연안을 다시 중원 세력이 동이의 소유에서 중원 세력이 빼았었다>는 뜻이다.
남만주의 역사는 해외지사라 기록이 미흡 했다. 공손연 세력을 뿌리 뽑고 요동반도 를 지나 가면서 그 일대에 살던 노인들로 부터 들은 예기를 근거로 동이전을 썼다. 진수는 남만주 노인들의 예기를 통역을 통하여 인식 하였기에 시대와 사건에 관한 설명이 불확실 하다. 삼국유사에 북부여의 별도 (別都)라고 했던 졸본부여 (卒本扶餘) 고도(古都)를 사름자로 바꾸어 골도(骨都)라 했다[3]. 고구려 2대 유리명왕(瑠璃明王, 18 재위: 기원전 19~서기 18)의 아들 해명(解明)이 황룡국왕이 선물로 준 활을 부려뜨린 곳을 옛 도읍지 고도(古都)라한 졸본부여다[4]. 이곳을 별도 (別都)라고 했다. 옛적에 멀리 서쪽에서 자리잡고 살던 오손의 한 분파가 만주 땅 비류수 상에 자리잡은 곳(古都, 別都)을 모/무구검(毋丘儉;?- 255)이지나 갔다. 골동품(骨董品)의 어원이 밝혀 졌다.
관구검이라고 읽는 글자는 “소가 우는 소리, 馬/牟;móu mù mào”라고 기록 되여 오던 유목민을 뜻한 또 다른 사음자다. 어용학자 반고(班固: 32년-92년)가 시경에 있다고 한 “毋封靡於爾邦” 문구를 현 시경에는 “無封靡于爾邦”라 했다. 반고 또한 유목민의 최고지도자를 천자(天子土地)라고 했다[5].
왕충의 논형(論衡 吉驗)에는 동명(東明)에게 명하여 당도에 가서 부여의 왕이 되라 (命當都王夫餘)고 했다[6]. 서쪽에서 온 유목민을 다스리던 정신적 지도자 (壇君, 禮君)가 졸본부여 일대에 살았었다는 표현을 오환고도(烏丸古都)라 했다.
진수의 활동 시기를 고려해 보면 <그가 글을 쓰던 당시란 뜻>의 금조선 (今朝鮮) 은 약265년 부터297년 까지 30년 이내다. 이 시대에 진수가 오묘하게 기술 했던 남만주 지명이 진서(晉書)를 비롯하여 후세사람들이 남긴 기록에 나온다:
진서에 조선(朝鮮)은 요동만 서쪽 남만주 땅에 한무제 때에 나타난 낭랑군에 있던 여섯개 현의 하나로 진의 장성이 시작 되는 곳“秦築長城之所起”에 접해 있었다[7]. 요동이라 한 곳은 오늘의 요하 서쪽 현투군에서 갈석산 서남쪽 일대에 나타났던 나라 이름(遼東國)을 뜻했다[8]. 낭랑군 북쪽 현토군 삼현 3,200호 중에 고구려 현이 있었다[9]. 낭랑군 남쪽에 공손도가 설치 했던 대방군(帶方郡公孫度置) 7현에는 4,900호가 있었다[10]. 한서에 나타난 가구 수에 비하면 십분의 일도 안된다. 발해만 연안이 전란에 황패 되여 공손도가 낭랑군 남쪽을 잘라 산동반도 서북부 지역을 겸하여 대방군을 만들었다. 이 대방 땅에 비류가 자리 잡은 대륙 백제의 첫 수도미추홀(彌鄒忽)이 있었다.
진시황 때에 요동군이라 하던 곳에 양평 동이 교위가 살았다(襄平東夷校尉所居). 그 곳에 (고구려가 손권과 교류 하던 항구 도시) 안평구(安平口)가 있다[11]. 의문의 양평과 서안평은 발해만 서남쪽에 있었다. 그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조위가 치열한 전투를 했다[12]. 난하 입구를 안평구, 그 서쪽을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서안평(西安平) 이라고 했다.
한무제가 점령한 왕험성은 남만주 조양이다. 전란중에 조선 사람들이 그 가까이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 鮮卑山, 黑山, 富山負山)에 숨어 난을 피한 부여(夫餘)의 한 갈래를 선비라고 했다. 후한시대에는 강력한 반항운동이 일어나 남만주 해안 일대는 중원 해안선을 따라 동오와 교류가 있었다. 그러나 위진 시대에도 중원의 세력이 요하를 건너 통치 했다는 기록은 찾지 못했다.
원나라 때에 편찬된 요사에는 동경 요양이 옛적 조선 땅(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 이라 하고, 같은 나라 역사를 남쪽 사람이 쓴 글안국지에는 발해만 서쪽 북경 일대 (東有朝鲜、遼東)를 조선이라 했다[13]. 금사(金史)에는 <졸본부여 비류수상을 올로홀필렬(兀魯忽必剌) 또는 오륵호필라(烏勒呼必喇)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다>고 했다[14]. 고조선 사람들이 필라(必喇)란 어음과 비슷한 발음을 사음한 글자가 피양(平陽)이다. 그 곳 강 입구(大戰梁口,梁音渴)에서 무구검과 치열한 전쟁이 있었다. 현제 갈/걸/할(渴kě hé jié kài; 曷:何也)이라고 읽는 글자는 햇님의 후손, 즉 烏孫들이 사는 마을을 지나는 여울이란 뜻 글자다[15].
금사에는 조선 또는 낭랑(樂浪) 이란 이름이 없고 발해만 서남쪽 연안을 요동이라 했다[16]. 송사(宋史) 북제서(北齊書) 신-구오대사에도 조선(朝鮮)이 없다. 남제서(南齊書)에 백제왕 모대가 그와 접했던 후위와 싸운 보고 서찰에 낭랑-조선 태수 란 이름이 나온다[17].
신당서에는 요수(遼水) 즉 요동 북쪽 땅을 모두 조선 삼한 땅 (盡朝鮮三韓之地) 이라 했다. 보장왕을 요동 도독으로 조선군왕(朝鮮郡王)에 봉하고, 요하 동쪽에는 걸걸중상을 진국공(乞乞仲象為震國公)으로 봉하여 고구려 사람들의 반항이 안정 되었다[18]. 공손연이 주살 당한 이후 3-4세기에는 발해-요동만 서쪽 땅을 선조의 땅이라고 인식한 선비족 모용씨(慕容皝)와 고구려가 치열하게 싸웠다[19].
고려사에는 왕건이조선 숙신 변한이 있던 만주 땅(朝鮮肅愼卞韓之地)에서 왕이 되고 큰 아들은 송악의 수장으로 삼으려 했다[20]. 고려사와 고려사 절요에는 이자겸 과 같은 권신들에게 조선국공(朝鮮國公) 이란 칭호를 주었다[21]. 조선국공이란 칭호는 신라왕을 낭랑국공(樂浪國公)이라 했듯 당대의 최고 관직을 칭한 이름이였다.
그러나 <요동, 낭랑, 양평, 대방이라 이름한 곳의 위치를 잘못 인식하여> 후대의 중국문헌에는 조선(朝鮮)의 위치가 남만주 요하( 遼河) 동서 두 곳에 나타난다.
언제 조선(朝鮮)이 요하를 건넜나 하는 문제의 답을 찾을수 없게 되었지만,
한-중 두나라 역사 기록에는 조선이란 이름이 만주에 국한 했었다.
끝
January 12, 2019
[1].三國志魏書三十東夷傳: 自虞曁周,西戎有白環之獻,東夷有肅慎之貢.略如漢氏故事。皆曠世而至, 其遐遠也如此。而公孫淵仍父祖三世有遼東,天子為其絕域,委以海外之事,遂隔斷東夷,不得通於諸夏. 景初中,大興師旅,誅淵,又潛軍浮海,收樂浪、帶方之郡,而後海表謐然,東夷屈服。其後高句麗背叛,又遣偏師致討,窮追極遠,踰烏丸、骨都,過沃沮,踐肅慎之庭,東臨大海。
[2]. 晉書:樂浪郡漢置。統縣六: 朝鮮周封箕子地.屯有渾彌遂城秦築長城之所起。鏤方
[3].三國遺事 :國號高句麗。因以高為氏本姓解也。今自言是天帝子。承日光而生。故自以高為氏.卒為扶餘之王即東明帝為卒本扶餘王之謂也。此卒本扶餘。亦是北扶餘。之別都。故云扶餘王也
[4].三國史記:王太子解明在古都,有力而好勇。黃龍國王聞之,遣使以强弓為.贈解明在於別都,以好勇聞,其於得罪也,
[5].白虎通德論 誅伐: 王者受命而起,諸侯有臣弒君而立,當誅君身死,子不得繼者,以其逆,無所天也。《詩》云:
「毋封靡於爾邦,惟王其崇之。」此言追誅大罪也。或盜天子土地,自立為諸侯,絕之而已.詩經 清廟之什 烈文: 無封靡于爾邦、維王其崇之.
[6].論衡 吉驗:王疑以為天子。東明善射,王恐奪其國也,欲殺之。東明走,南至掩淲水,以弓擊水,魚鱉浮為橋,東明得渡。魚鱉解散,追兵不得渡。因都王夫餘,故北夷有夫餘國焉。東明之母初妊時,見氣從天下。及生,棄之,豬馬以氣吁之而生之。長大,王欲殺之,以弓擊水,魚鱉為橋。天命不當死,故有豬馬之救;命當都王夫餘,故有魚鱉為橋之助也.
[7]. 晉書:樂浪郡漢置。統縣六: 朝鮮周封箕子地.屯有渾彌遂城秦築長城之所起。鏤方
[8]. 晉書:遼東國秦立為郡。漢光武以遼東等屬青州,後還幽州。襄平東夷校尉所居。汶居就樂就安市西安平新昌, 力城.
漢書 地理志:東北曰幽州:其山曰醫無閭. 史記 天官書:尾、箕,幽州。牽牛、婺女,楊州。虛、危,青州。
[9]. 晉書: 玄菟郡漢置。統縣三,戶三千二百.高句麗望平高顯. 康熙字典 :又高句驪,遼東國名,漢爲縣.
《前漢·地理志》 元菟郡高句驪. 廣韻:句:《說文》曲也,又髙句驪遼東國名又句龍社神名亦姓史記有句疆
[11].三國志 吳主傳: 權義之,皆拜校尉。間一年,遣使者謝宏、中書陳恂拜宮為單于,加賜衣物珍寶。恂等到安平口,
先遣校尉陳奉前見宮,而宮受魏幽州刺史諷旨,令以吳使自效。奉聞之,倒還。宮遣主簿笮咨、帶固等出安平,與宏相見。
[12].三國志 高句麗傳: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接。都於丸都之下,方可二千里, 戶三萬.句麗作國,依大水而居,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麗別種依小水作國,因名之為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宮死,子伯固立。順桓之間,復犯遼東,寇新安、居鄉,又攻西安平,於道上殺帶方令,略得樂浪太守妻子。
[13]. 晉書: 玄菟郡漢置。統縣三,戶三千二百.高句麗望平高顯. 康熙字典 :又高句驪,遼東國名,漢爲縣.
《前漢·地理志》 元菟郡高句驪. 廣韻:句:《說文》曲也,又髙句驪遼東國名又句龍社神名亦姓史記有句疆
[14].金史:辽阳倚。东梁河、国名兀鲁忽必剌,俗名太子河. 梁水,古水名。
汉称大梁水,唐曰梁水,辽又称东梁河,女真语曰兀鲁忽必剌(一作乌勒呼必喇),即今辽河支流太子河.
[15]. 晉書: 玄菟郡漢置。統縣三,戶三千二百.高句麗望平高顯. 康熙字典 :又高句驪,遼東國名,漢爲縣.
《前漢·地理志》 元菟郡高句驪. 廣韻:句:《說文》曲也,又髙句驪遼東國名又句龍社神名亦姓史記有句疆
[16].金史: 「遼東、北京路米粟素饶,宜航海以达山东。昨以按视东京近海之地. 罢辽东渤海. 三國志 毌丘儉: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進軍沸流水上,大戰梁口,梁音渴。宮軍破走。儉遂束馬縣車,以登丸都,屠句驪所都,斬獲首虜以千數。句驪沛者名得來,數諫宮,臣松之案東夷傳:沛者,句驪國之官名。
[17].南齊書:牟大又表曰:「臣所遣行建威將軍、廣陽太守、兼長史臣高達,行建威將軍、朝鮮太守、兼司馬臣楊茂,行宣威將軍、兼參軍臣會邁等三人. 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行建武將軍.朝鮮太守臣張塞.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眾襲擊虜軍,大破之
[18].新唐書: 為遼水之陽,盡朝鮮三韓之地. 儀鳳二年,授藏遼東都督,封朝鮮郡王,還遼東以安餘民,先編僑內州者皆原遣,徙安東都護府於新城
[19].通典: 至位宮五葉孫釗,晉康帝建元初,慕容皝音晃率兵伐之,大敗,單馬奔走。皝乘勝追至丸都,焚其宮室,掠男女
五萬餘口以歸。釗後為百濟所殺。其後慕容寶以句麗王安為平州牧,封遼東、帶方二國王。安始置長史、司馬、參軍官,後略有遼東郡。至孫高璉,東晉安帝義熙中,遣長史高翼獻赭白馬,以璉為營州諸軍事、高麗王、樂浪郡公。宋元嘉中,又獻馬八百匹。自東晉、宋至於齊、梁、後魏、後周,其主皆受南北兩朝封爵,分遣貢使。初後魏時,置諸國使邸,齊使第一,高麗次之。南齊武帝永明中,高麗使至,服窮蔥,冠折風。中書郎王融戲之曰:「服之不衷,身之災也。頭上定是何物?」答曰:「此即古弁之遺像也。」.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長城起於此山。
[20].契丹国志:南京本幽州地,乃古冀州之域。舜以冀州南北广远,分置幽州,以其地在北方。幽,阴也。东有朝鲜、辽东,北有楼烦、白檀,西有云中、九原,南有滹沱、易水.南齊書:牟大又表曰:「臣所遣行建威將軍、廣陽太守、兼長史臣高達,行建威將軍、 朝鮮太守、兼司馬臣楊茂,行宣威將軍、兼參軍臣會邁等三人.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行建武將軍. 朝鮮太守臣張塞.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眾襲擊虜軍,大破之
[21]. 高麗史 世家卷第一 世祖說之曰: “大王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莫如先城松岳以吾長子為其主。”
“奏加資謙中書令封朝鮮國公又請依王太子禮數立府置寮屬遂令中外進 獻方物時又追封資謙祖考”
高麗史節要:李貝言宮亮鄙翼命功臣領門下尚書都省事判吏兵部西京留守事朝鮮國公食邑八千戶食實封四千戶府號崇促宮罔懿親封其妻崔氏為辰韓國大夫人子之.宋慕欲尊妹家之長以慰先后之節死朝鮮國公忠誠夾輔功業既崇遣使策命公及夫人兼.司憲府大司憲一故官制一癸亥王豈孝思觀以誅禍昌告于載縠曰朝鮮尹李國分緇煉至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