利簋-3: 利簋銘文은 어순이 다르다.
필자는 옛적에 산서성에 살던 사람들은 한글 어순과 같은 언어를 썼다고 논증 했다. 그러나 利簋銘文은 어순이 다르다.
[서주를 세운 부족은 함곡관 동서쪽 한수 (漢水沔水) 연안에서 들어온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었다는 증거다. 孟子 梁惠王下: 「昔者大王好色,愛厥妃。《詩》云:『古公亶甫,來朝走馬,率西水滸,至于岐下。 爰及姜女,聿來胥宇。』當是時也,內無怨女,外無曠夫。王如好色,與百姓同之,於王何有?」 added: 2024/3/02.]
함곡관 동쪽에서 옛 구주(九州)영역에 들어온 주 무왕의 아들 성왕의 지시에 따라 영백 (榮伯)이 그 지역에 살던 쟁인을 시켜 청동으로 괘를 만들었다[1]. 이를 만든 쟁인을 주 선왕 때는 산서성 지역 쟁인을 잡아다 노예로 궁정에서 금문을 색인 토록 했다. 강희 자전 예(隸)자 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2]. 주 선왕 (周宣王)과 그의 아버지 주여왕(周厲王) 때에 만든 여러 호괘(胡簋, 1978년 발굴)가 서주 경기 지역에서 발굴 되었다[3]. 이에 색인된 글체를 대전각 (大篆刻) 자라 한다. 그 글자가 예서(隸書, clerical script, also formerly chancery script)체의 시초다. 그 내용을 비교하여 서주 발생에서 멸망 까지의 역사를 복원 할수 있다.
필자는 대전각(大篆刻)자를 현행 상형글자로 풀이할 능력은 없으나 중국 사람들이 풀이한 글자를 꺼꾸로 소급하여 올라가서 글자 풀이의 진위를 밝히려고 한다. 그 대표적 오류가 단(壇)자다. 깃발을 들고 앞장섰던 사람이란 뜻 글자 “旜”자로 풀이 했다.
사료를 종합 해 보면 현행하는 상형 글자는 한자(韓字) 로 기록 함이 옳다. 그렇게 적어야 옳다는 증거가 동양 신화에 있다. 전설적인 미인 항아(姮娥)의 남편이 이름있는 궁수였다. 그녀의 남편 궁수 예(羿, 后羿, 夷羿)를 살해한 사람을 같은 동이 부족의 “한착 寒浞. 또는 韓浞”이라고 했다[4]. 동이 부락의 지도자를 한(韓, 汗, 可汗) 이라고 기록한 가장 오랫적 증거다.
그가 활로 하늘에 떠 있던 10개의 해(Sun,太陽)를 쏘아 9개를 떠러 뜨리고 하나만 남겼다는 설화는 <구주를 통일 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즉 처음으로 왕중 왕이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은유적으로 표현(metaphorical expression) 한 예기다.
맹자는 서주의 시조를 설명 했다.양위를 하고 돌아 오지 않고 맹조에서 죽었다는 순임금(卒於鳴條) 을 동이라 하고 서주 무왕의 아버지를 서이(西夷) 라고 했다[5].
서주의 선조에 관한 같은 내용이 시경 여러 편에 보인다[6]. 특히왕풍 갈류(王風葛藟)에는 서주를 세운 부족은 상나라 후기에 관리였던 고공단부 (古公亶父)가 조례를 마치고 일당을 이끌고 서쪽으로 도망을 가서 형제들을 떠나 타향에 자리 잡았다는 사연을 읊었다[7]. 넓은 강가를 따라 (江漢之滸, 河之滸, 率西水滸)서쪽으로 함곡관 을 지나서 북쪽에서 내려와 해지 연안에 자리잡고 살던 적인 (狄人) 의 심장부 (河東)에 살려 했다가 밀려 서쪽으로 빈(邠,豳)을 지나고 梁山을 지나 결국 기산 아래 (岐下)에 정착 했다[8]. 오늘의 서안시 서남쪽 이다. 서안 일대에는 지도자를 잃은 적인 부족의 잔여 부족 부풍(扶風)과 부유(蜉蝣)족이 살고 있었다. 그지역 민요가 빈풍 (豳風)과 조풍(曹風) 위풍(魏風)이다[9].
고조선부터 서주에 이르는 그 지역 역사가 시경에 있다. 풍자시 면만(綿蠻)이 한국에서 출판된 시경에는 황조(黃鳥)라 하고 풀이 또한 다르게 했다. 같은 글자로 실은 대아 면(詩經 大雅 緜)과 왕풍갈류(王風 葛藟)는 서주의 창립에서 부터 서주 마지막 평왕 (平王) 의 고란을 겪던 과정을 읊었다[10].
이괘 명문에 실린 글자는 필자가<유백자(幼伯子)나 箕子가 남긴 문구는 한글 어순이라고 예로 보였던 문구>와는 어순이 다르다. 주족은 동쪽 상나라 수도 일대에살던 부족이 넓은 황하연안을 따라서 (河水之滸)를 따라 올라온 言語가 다른 부족이였다는 확실한 증거다. 고조선의 발생지에서 원주민의 기술을 이용하여 동양 최초의 글자를 경전으로 남겼다. 예(隸)자를 비롯한 여러 글자 속에 있다. 결국 퉁구스어를 쓰던 원주민이 언어가 다른 친입자 주족을 쫓아 버렸다. 역림(焦氏易林)에는 해지 연안에 살던 사람들이 지도자를 잃고, <명조의 지도(鳴條之圖)를 갖고 북쪽으로 도망을 가서 지도자 선우가 되었다>는 문구 또한 한글 어순이다[11].
사마천의 史記를 깊히 살펴 보면, 이지역에 살았던 사마천은 두 다른 언어를 자유로이 구사 했다.
이렇게 흐터저 있는 사료를 종합해 보면 <홍산문화의 본거지에서 분수를 따라 내려 왔던 부족이 다시 분수를 따라 동북쪽으로 올라 갔다>는 추론이 나온다
[1].竹書紀年 成王: 肅慎氏來朝,王使榮伯錫肅慎氏命.
[2].隸:《唐韻》音麗。《說文》附著也。註》隸,閱也。又《廣韻》僕隸。《集韻》賤稱也。《左傳·隱五年》皁隸之事。《註》士臣皁,皁臣輿,輿臣隸。《晉語》其猶隸農也。《註》隸,今之徒也。又官名。《周禮·夏官》隸僕掌五寢之掃除糞洒之事。又《後漢·律曆志》隸首作數。《註》博物記曰:隸首,黃帝之臣。一說隸首,善算者也。又《正字通》姓也。漢隸延之。又隸書。《晉書·衞恆傳》秦旣用篆,奏事繁多,篆字難成,卽令隸人佐書,曰隸字,漢因行之。隸書者,篆之捷也。○按隸書,諸說不一。或云秦後旴陽變小篆爲隸書。或言程邈獄中所造。韻會辨之頗當,蓋古之隸,卽今之眞書行書也。周興嗣千字文,杜藁鍾隸。唐六典云:校書郞正字,所掌字體有五,一古文,二大篆,皆不用。三小篆,印璽旗旛用之。四八分,石經𥓓刻用之。五隸書,典籍表奏公私文疏用之。據此,益可信隸卽今之楷書。《正字通》云:東魏大覺寺𥓓題曰:隸書,今楷字也。亦其一証。 《說文》本作𨾀。《廣韻》俗作𥛬。
《韻會》《正韻》作𨽾,非
[3].簋又称胡簋,中国禁止出国(境)展览文物,西周厉王时期青铜器,1978年5月陕西扶风(今宝鸡市扶风县)齐村出土。簋通高59厘米,口径43厘米,腹深23厘米,重60公斤。内有铭文12行124字。是存世商周青铜簋中最大的一件,堪称“簋王”。
[4]. https://www.itsfun.com.tw/韓浞/wiki-22404301-8562999 : 韓浞(亦作寒浞),是曾經統治中國60年的遠古帝王,
夏代伯明氏之子,今山東濰坊東北人。曾殺羿代夏稱王,統一中國而立為帝。他是現存所有先秦古籍中記載最早的韓
[5]. 孟子 離婁下:孟子曰:「舜生於諸馮,遷於負夏,卒於鳴條,東夷之人也。文王生於岐周,卒於畢郢,西夷之人也。地之相去也, 千有餘里;世之相後也,千有餘歲。得志行乎中國,若合符節。先聖後聖,其揆一也。」
[6]. 詩經 文王之什 緜:古公亶父、來朝走馬。率西水滸、至于岐下。爰及姜女、聿來胥宇. 詩經 國風 周南 漢廣: 漢之廣矣、 不可泳思。江之永矣、不可方思. 詩經 大雅 江漢: 江漢浮浮、武夫滔滔.江漢之滸、王命召虎、式辟四方、徹我疆土
[7]. 詩經 王風 葛藟:緜緜葛藟、在河之滸. 終遠兄弟、謂他人父。謂他人父、亦莫我顧. 毛詩正義: 綿綿葛藟,在河之滸。 興也。綿綿,長不絕之貌。水崖曰滸。箋云:葛也藟也,生於河之崖,得其潤澤○傳「水崖曰滸」。○正義曰:《釋水》云:「滸,水崖。」李巡曰:「滸,水邊地,名崖也。
[8]. 孟子 梁惠王下:孟子對曰:「昔者大王居邠,狄人侵之。事之以皮幣,不得免焉;事之以犬馬,不得免焉;事之以珠玉, 不得免焉。乃屬其耆老而告之曰:『狄人之所欲者,吾土地也。吾聞之也:君子不以其所以養人者害人。二三子何患乎無君?我將去之。』去邠,踰梁山,邑于岐山之下居焉。邠人曰:『仁人也,不可失也。』從之者如歸市。或曰:『世守也,非身之所能為也。效死勿去。』君請擇於斯二者。」
[9]. 邠:《廣韻》府巾切《集韻》悲巾切《韻會》補巾切。《說文》周太王國,在右扶風美陽縣,亦作豳。互詳豕部豳字註。 又《廣韻》州名,今屬陝西西安府。又與彬同。文貌。《揚子·太𤣥經》斐如邠如,虎豹文如.
[10]. 詩經 大雅 文王之什 緜: 古公亶父、來朝走馬。率西水滸、至于岐下。爰及姜女、聿來胥宇
詩經 國風 王風 葛藟: 緜緜葛藟、在河之滸。終遠兄弟、謂他人父。謂他人父、亦莫我顧. 詩序〉:「葛藟,王族刺平王也。
[11]. 焦氏易林 屯之: 鳴條之圖,北奔犬胡。左衽為長,國號匈奴。主君旄頭,立尊單于.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