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주에 나타났던 공손씨(公孫氏)의 시말-교정본:
서론:
한-중 양국 문헌에 공손(公孫)씨가 나타난다.
삼국사기에는 공손(公孫)씨가 한나라가 점령 했던 요동(漢遼東)에서 현도군(玄菟郡)에 이르는 지역에서 활동 했다. 삼국지에는 공손도전(公孫度傳)이 있다[. 三國志 公孫度傳: 公孫度字升濟,本遼東襄平人也。度父延,避吏居玄菟,任度為郡吏。時玄菟太守公孫琙,子豹,年十八歲,早死。度少時名豹,又與琙子同年,琙見而親愛之,遣就師學,為取妻。後舉有道,除尚書郎,稍遷兾州刺史,以謠言免。同郡徐榮為董卓中郎將,薦度為遼東太守。度起玄菟小吏,為遼東郡所輕。先時,屬國公孫昭守襄平令,召度子康為伍長。度到官,收昭,笞殺於襄平市。郡中名豪大姓田韶等宿遇無恩,皆以法誅,所夷滅百餘家,郡中震慄。東伐高句驪,西擊烏丸,威行海外。 ]. 현토태수가 공손도(公孫度 ? ~ 204년)와 동갑이였던 아들을 잃고 공손도를 사랑하여 장가 까지 들려 주었다. 동이전에는 아들 공손강(公孫康, ? ~ 221년) 손자 공손연 3세에 걸처 요동에 군림하여 중원세력에서 벗어나 독자적 정권을 유지 했다. 공손도는 동한 광무제 이후에 출생한 사람이다. 그가 부여왕 위구대(尉仇台)의 딸을 부인으로 택했다. 그의 아들이 공손강이고 손자가 공손연(公孫淵. 238년)이다. 부여 왕실이 공손연의 진외가(陳外家)가 였다. 공손도의 활동은 190년 (初平元年)부터라 후한말 마지막 헌제(漢獻帝,181년 ~ 234년)시절이다. 같은 시절에 고구려에는 왕위 쟁탈전이 나타났다. 발음이 같은 발기(拔奇,發岐)가 나타난다.
중원에서는 한무제(漢武帝:재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 말기부터 황실에 변란이 나타나고, 그가 점령 했던 남만주에서는 독립운동이 나타나기 시작 했다. 전한(前漢,西漢) 말기에는 외척 왕망(王莽, 기원전 45년 ~ 기원후 23년)이 신나라(新朝:기원후 8년 – 23년)를 세우고 폭정흘 했다. 한나라의 혈통을 이어 받은 광무제(光武帝; 기원전 6년 ~ 57년)가 이를 물리치고 후한(後漢)의 황제가 되었다.
이러한 혼란기에 우거왕 영역에 살던 조선의 유민(朝鮮遺民)들은 내륙으로 또는 해안으로 흐터져 항거 했다. 남만주에서 나타 났던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는 부여왕 위구대 후손은 공손씨 세력으로 기록 되었다. 그 지역에 강자로 나타난 고구려와 중원 세력은 옛적에 우거왕(右渠王, ? ~ 기원전 108년)이 다스리던 곳에서 여러 차례 싸웠다[.三國志 高句麗傳: 宮死,子伯固立。順、桓之間,復犯遼東,寇新安、居鄉,又攻西安平,於道上殺帶方令,略得樂浪太守妻子。靈帝建寧二年,玄菟太守耿臨討之,斬首虜數百級,伯固降,屬遼東。熹平中,伯固乞屬玄菟。公孫度之雄海東也,伯固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助度擊富山賊,破之。]. 유리왕(瑠璃明王, 기원전 38년 ~ 18년)은 제위 22년에 서쪽 세력에 항거 하려고 졸본에서 산을 너머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요새 위나암성(尉那巖城) 쌓았다. 선조가 살던 현도군 고구려현(高句麗縣)을 되 찾고, 아들 대무신왕(大武神王, 4년~44년)이 국력을 확장했다.제5대 모본왕(慕本王, 재위 : 48년 ~ 53년)과 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47년 ~ 165년)은 요동 요서 지역(漢北平、漁陽、上谷、太原)에 까지 진출하여 중원 세력과 화친 동맹을 맺었다[.三國史記 高句麗本紀: 二年,春,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而遼東太守蔡●祭●,以恩信待之,乃復和親]. 고구려가 <마한(馬韓)과 예맥 병사를 동원하여 현토성을 공격하니 부여왕이 아들 위구대(尉仇台)를 보내 한나라 군사를 도와 고구려가 패했다. 마한은 온조왕이 집권 27년에 벌써 정벌하여 소멸 되었는데 어찌 마한병을 동원 했나 알수 없다>는 기록이 있다[.三國史記 高句麗本紀:肅愼使來,獻紫狐●及白鷹、白馬,王宴勞以遣之。十一月,王至自扶餘。王以遂成統軍國事。十二月,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進圍玄●城。扶餘王遣子尉仇台,領兵二萬,與漢兵幷力拒戰,我軍大敗.七十年,王與馬韓、穢貊侵遼東,扶餘王遣兵救破之。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滅,今與麗王行兵者,盖滅而復興者歟.]. 통전에 진무제(晉武帝)를 방문한 마한왕(馬韓王)과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나오는 마한(馬韓)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나오는 마한과 같이, 위만에게 쫒겨난 부여의 후손이 한해의 동서연안에 흐터져 살며 해양권을 잡고 대백제를 이루었던 부족이다.
삼국지 부여전에 나오는 부여왕 위구대(尉仇台)와 공손도가 활동하던 요동이 대륙백제의 기반이었다[.三國志 夫餘傳: 夫餘本屬玄菟。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時句麗、鮮卑彊,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尉仇台死,簡位居立。無適子,有孽子麻余。位居死,諸加共立麻余.]. 이곳에 온조왕의 형 비류(沸流)가 정착 했던 옛 대방땅(帶方故地)에 미추홀(彌鄒忽)이 있었다[.三國史記 百濟本紀第一: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故以扶餘為氏。一云:始祖沸流王,其父優台,北扶餘王解扶婁庶孫。母召西奴,卒本人延●勃之女,始歸于優台,生子二人,長曰沸流,次曰溫祚。優台死,寡居于卒本。『北史』及『隋書』皆云:「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初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東夷强國。」]. 한-중 두 나라 기록에는 미추홀에 갔던 비류(沸流)의 후손에 관한 기록이 없고, 공손씨가 나타난 시절에 음이 같은 비류왕(比流王)이 나타나 160세 이상 살았었다. 그후에는 침류왕(枕流王)이 있다. 류왕이란 흘러 내려와 왕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유와 출처를 알수는 없으나, 한국에서는 글자가 비슷한 공손강(公孫康)이 공손도(公孫度)라 하고, 법도 도(度)자를 “헤아릴 탁, 살 택”이라고도 읽는다.
공손씨(公孫氏)가 활동하던 시절에 관한 남만주의 역사에 의문이 많다. 본 고는 이를 밝히고자 한다.
부여(扶餘)에서 분가한 백제가 중원으로 진출한 교두보를 숨기려고, 신원이 불확실한 공손도를 등장 시켰다. 도참설을 이용한 어용 학자들이 옛 창해군이 있던 땅에 공손홍의 후손을 접붙였다.
본론:
예맥 숙신씨들이 단군왕검을 모시고 조선을 세웠다. 후예가 태행 산맥 일대에서 춘추시대에는 발조선(發朝鮮)을 세웠다. 전국시대에는 조선(朝鮮)이라 부르던 나라를 세운 예맥 숙신씨들이 해하(海河) 수계에서 살았다[.管子:桓公問管子曰:「吾聞海內玉幣有七筴,可得而聞乎。」管子對曰:「陰山之礝碈,一筴也。燕之紫山白金,一筴也。發朝鮮之文皮,一筴也。方言:燕之外鄙朝鮮洌水之間. 燕代朝鮮洌水之間曰盱,或謂之揚.北燕朝鮮之間謂之癆 ]. 해하 입구가 소금을 구하는 곳이었고 동시에 바다로 진출 하는 관문이었다[.三國史記 百濟本紀第一: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故以扶餘為氏。一云:始祖沸流王,其父優台,北扶餘王解扶婁庶孫。母召西奴,卒本人延●勃之女,始歸于優台,生子二人,長曰沸流,次曰溫祚。優台死,寡居于卒本。『北史』及『隋書』皆云:「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初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東夷强國。」]. 발해만을 따라 산동반도와 남만주 해안을 연결하는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 한무제 때에 무역과 관계하여 나타난 현상이 사기평준서에 실린 창해군(滄海之郡)이다[.史記列傳平津侯主父列傳: 彭吳賈滅朝鮮,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 평준이란 무역의 원리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뜻이있다. 하여 사마천은 조용히 발해만 서남쪽 해안지대에 살던 유목민들이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 (燕齊之閒靡然發動)했다고 표현 했다. 옛적 부터 예맥족은 화패 “龜貝金錢刀布之幣興”를 들어 사용 했었다[.史記 書 平準書: 彭吳賈滅朝鮮,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太史公曰:農工商交易之路通, 而龜貝金錢刀布之幣興焉。所從來久遠,自高辛氏之前尚矣,靡得而記云。故書道唐虞之際,詩述殷周之世,故先王各用於其重,珠玉為上幣,黃金為中幣,刀布為下幣]. 춘추시대 초기부터 고조선(古朝鮮)의 황금시대에 칼모양의 쇳덩어리,즉 도전(刀錢, knife money)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관자에 실렸다[.三國史記 百濟本紀第一: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故以扶餘為氏。一云:始祖沸流王,其父優台,北扶餘王解扶婁庶孫。母召西奴,卒本人延●勃之女,始歸于優台,生子二人,長曰沸流,次曰溫祚。優台死,寡居于卒本。『北史』及『隋書』皆云:「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初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東夷强國。」]. 삼국지 변진전에는 철을 <한 예 왜 그리고 낭랑 과 대방 두 군> 사람들이 사용 했다[.三國志: 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巿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 도전이 발굴된 지역이 고조선의 영역이었다. 하북성 서쪽에서 북으로는 내몽고 동북쪽으로는 남만주를 지나 한반도 북부에서도 다수가 출토되었다. 도전(刀錢 )이 발굴된 지역이 연나라의 영토라 한다. 그러나 관자에 실린 연(燕)자는 하북성 서남쪽 태행산맥 일대를 뜻했다[. 韓詩外傳 卷八: 孔子燕居,子貢攝齊而前曰:「弟子事夫子有年矣,才竭而智罷,振於學問,不能復進,請一休焉。」子曰:「賜也,欲焉休乎?」曰:「賜欲休於事君。」孔子曰:「《詩》云:『夙夜匪懈,以事一人。』].
일차 사료부터 글자 작란을 했다.
제 환공 산융을 치려고 태행산 일대에 올라 갔다. 공자연거(孔子燕居)란 문구가 그곳을 뜻했다. 전국시대 말기에야 연(燕)이라 부르는 세력이 북경일대에 이르렀다. 관자에는 제환공과의 대화에서 제나라의 동서남북 인접 국가가 나타났다. 제나라의 북쪽에 산융이 사는 연(燕)이란 지역의 주인을 자색 옷을 입은 남자가 짖는 개를(柴夫吠狗)대리고 다스렸다[.管子小匡:公曰:「外內定矣,可乎?」管子對曰:「未可,鄰國未吾親也。」公曰:「親之柰何?」管子對曰:「審吾疆埸,反「外內定矣,可乎?」管子對曰:「未可,鄰國未吾親也。」公曰:「親之柰何?」管子對曰:「審吾疆埸,反其侵地,正其封界,毋受其貨財,而美為皮幣,以極聘覜於諸侯,以安四鄰,則鄰國親我矣。」桓公曰:「甲兵大足矣,吾欲南伐,何主?」管子對曰:「以魯為主,反其侵地常潛。使海於有獘。渠彌於河陼,綱山於有牢。」桓公曰:「吾欲西伐,何主?」管子對曰:「以衛為主,反其侵地吉臺原姑與柒里,使海於有獘,渠彌於有陼,綱山於有牢。」桓公曰:「吾欲北伐,何主?」管子對曰:「以燕為主,反其侵地柴夫吠狗,使海於有獘,渠彌於有陼,綱山於有牢。」四鄰大親。既反其侵地,正其封疆,地南至於岱陰,西至於濟,北至於海,東至於紀隨,地方三百六十里.].
초씨역림에 실린 (순임금이 살다 죽었다는 해지연안) <명조(鳴條)에 살던 자가 그 곳의 지도를 들고 북쪽 흉노 땅으로 도망을 가서 선우가 되였다>는 문구가 있다. 한글 어순이다:
鳴條之圖,北奔犬胡。左衽為長,國號匈奴。主君旄頭,立尊單于.
북쪽으로 도망 가서 큰 개를 대리고 사는 사람들이 (명조 지역의 지도자) 옆에서 보좌해 주던 자(左衽)를 지도자로 만들어 나라이름을 흉노라 했다. 부족장 모두 (旄頭)가 그를 세워 존경하여 제단 우(上, on top)에 모셨다. 모두 (旄頭, all together),단우 (單于)하는 낱말이 한국어다. 기준의 아버지 즉 동호왕 비(東胡王 丕)를 죽인 흉노 추장 모둔(冒頓) 또한 “모두들의 선우”란 뜻이다 . 견융(犬戎)이란 글자가 춘추에 나오지만, 흉노(匈奴)란 이름은 가의 (賈誼, 200년- BC 168년)의 신서(新書)와 사마천의 사기, 유향(劉向; 77–6 BC)의 신서(新序), 전국책 등 전한 문헌에 처음 나온다. 건국 초기부터 서주를 괴롭히던 려산의 견융(驪山之國, 蓋狄) 이 서주를 함곡관 동쪽으로 쫓아 버렸다 .
좌구명(左丘明, 기원전 556년 ~ 기원전 451년)은 국어제어(國語 齊語)에 관자가 인용한 같은 사건을 설명했다. 환공이 고조선 사람들이 살던 곳에 올라가서 관중분지에 살던 사람들의 후손을 만났다. 이를 (卑耳之貉,拘秦夏)라 했다. 국어에는 <고조선 사람들이 사는 계곡이란 뜻의 비이지계(卑耳之貉)를 사음대자 하고, 진나라란 글자를 빼어 피이지계구하(辟耳之谿拘夏)라 했다[.國語 齊語: 桓公曰:「吾欲北伐,何主?」管子對曰:「以燕為主。反其侵地柴夫、吠狗,使海于有蔽,渠弭于有渚,環山于有牢。」四鄰大親.逾太行與辟耳之谿拘夏,西服流沙、西吳。管子: 踰太行與卑耳之貉,拘秦夏,西服流沙西虞而秦戎始從]. 태평어람에는 하북지역 산이름(太平御覽 河北諸山) 설명에 신선이 산다는 곳을 글자를 바꾸어 자부선인(紫府仙人)이 사는 곳이라 했다. 갈홍은 이를 좀더 동북쪽으로 옮겨 포박자(抱朴子)에 자부선생(紫府先生)이라 하여;옛날에 황제(黃帝)가 동쪽의 청구(靑丘) 땅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는 자부선인을 만나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았다고 했다[. 太平御覽 河北諸山:《仙經》云:「此山名為紫府,仙人居之。」其九臺之山,冬夏常冰雪,不可居,即文殊師利常鎮毒龍之所. 抱朴子 內篇 地真:昔黃帝東到青丘,過風山,見紫府先生,受三皇內文,以劾召萬神,南到圓隴陰建木,觀百靈之所登,採若乾之華,飲丹巒之水.]. 자색 옷을 입은 사람(柴夫)이 집지키는 개 폐(吠狗, large barking dog)를 대리고 사는 곳이라 글자를 바꾸어 자부(紫府)란 높은 산으로 신선이 사는 곳이라 했다.
이 지역은 제후국 진(晋)나라의 영역이다. 춘추오패의 두번쩨로 알려진 <진 문공(晋文公, 재위: 기원전 636년-기원전 628년) 이 천자(天子)를 불렀다 하셨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하고 자공이 공자님께 물었다. 공자가어에 실린 일화다[. 孔子家語 曲禮子貢問:子貢問於孔子曰:「晉文公實召天子,而使諸侯朝焉。夫子作《春秋》,云天王狩于河陽。何也?」孔子曰:「以臣召君,不可以訓。亦書其率諸侯事天子而已。」
]. 후세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은패 하려고 이리저리 글자를 바꾸어 실었다. 이 지역 산융의 지도자를 자부폐구(柴夫吠狗)라 했다. 그가 햇님의 후손이라고 추앙하던 고조선의 지도자 였다.
진수는 남만주 연안에 살던 현지인의 예기를 듣고(今使譯所) 천진 항에서 뱃길로 요동만 북쪽 해안을 따라 한반도 서남쪽 해안을 거처 구주에 이르는 활발 했던 해양 항로를 왜인전에 자새하게 실었다. 남만주에서 천진 당산일대로 갔던 <위만이 되 돌아와서 왕이 되었다(復來王之)는 등등> 여러 기록을 고려 하면 발해 요동만 서쪽이 통상교류의 관문이었다.
요동 발해만 서남쪽에 나타난 창해군(滄海郡. 기원전 128년- 기원전 126년)은 2-3년 후에 저절로 사라졌다. 한무제 초기의 제상 공손홍(公孫弘, 기원전 199년 ~ 기원전 121년)이 은퇴하고 그 지역을 봉지로 받았다. 사기 건원이후 작위를 받은 사람 명단(建元以來侯者年表)에는 평준후 공손홍의 작위를 아들 경(侯慶)이 물려 받았다가 경미한 죄를 저서 우거왕의 수도가 함락된 다음 해인 기원전107년(元封四年)에 제거 되었다[. 三國志 公孫度傳: 公孫度字升濟,本遼東襄平人也。度父延,避吏居玄菟,任度為郡吏。時玄菟太守公孫琙,子豹,年十八歲,早死。度少時名豹,又與琙子同年,琙見而親愛之,遣就師學,為取妻。後舉有道,除尚書郎,稍遷兾州刺史,以謠言免。同郡徐榮為董卓中郎將,薦度為遼東太守。度起玄菟小吏,為遼東郡所輕。先時,屬國公孫昭守襄平令,召度子康為伍長。度到官,收昭,笞殺於襄平市。郡中名豪大姓田韶等宿遇無恩,皆以法誅,所夷滅百餘家,郡中震慄。東伐高句驪,西擊烏丸,威行海外。 ]. 한서에는 공손도가 성을 쌓는 노역장에 끌려가서 일했다(坐論為城旦)고 했다. 한서 고혜고후 문공신열표(漢書 高惠高后文功臣表)에는; 선조는 밝히지 않고 기원후 2년(元始二年)에 “후경이 꺼려서(侯慶忌) 오만한 현손(敖玄孫紹封)이 천호(千戶)밖에 안되는 적은 봉지의 작위를 이어 받았다[.漢書 高惠高后文功臣表:元始二年,侯慶忌以敖玄孫紹封,千戶, 順、桓之間,復犯遼東,寇新安、居鄉,又攻西安平,於道上殺帶方令,略得樂浪太守妻子。靈帝建寧二年,玄菟太守耿臨討之,斬首虜數百級,伯固降,屬遼東。熹平中,伯固乞屬玄菟。公孫度之雄海東也,伯固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助度擊富山賊,破之。]. 평주목 요동 태수 공손도(平州牧 遼東太守公孫度)를 양산태수(山陽太守)라고 했다. 축성장은 현토성을 뜻했다. 양평-현토와 관계가 깊은 공손도(公孫度)를 공손홍의 후손이라한 사기와 한서 기록은 한무제에서 기원후 2년이 끝이다. 전한 후기에 나타난 사건을 부여전에 넣어 공손도의 활동 시기을 모호하게 한말(漢末公孫度雄張海東)이라 했다.
전한기(前漢紀)에는 <공손홍의 아들을 랑으로 했다(以弘子為郎)는 기록이 있으나, 공손도라는 이름은 없고, 요동의 오환이 반란을 이르켜 범명의 친구(范明友) 도요장군(度遼將軍)을 시켜 이들을 격파하고 왕 셋의 수급을 획득 했다>는 기록이 있다. 후한의 관찬(官撰) 역사서인 동관한기(東觀漢記)에도 <공손도(公孫度)란 이름이 없고, 공손신(公孫臣)이란 문구>가 있다[. 前漢紀: 以弘子為郎。冬。遼東烏丸反。天子拜范明友為度遼將軍擊之。斬首六千餘級。獲三王首.《書·禹貢》五百里要服,三百里夷。又嵎夷,東表之地,在今登州。《書·堯典》宅嵎夷。又馮夷,河伯也。
《莊子·大宗師》馮夷,得之,以遊大川。《郭璞·江賦》冰夷倚浪。]. 부여와 고구려의 시조로 알려진 동명왕의 외조부를 하백 (河伯), 풍이(馮夷), 빙이(冰夷)라 한다[.東觀漢記:先是時伯玉同母兄公孫臣為醫,伯升請呼難,伯升殺之。。至孝文,賈誼、公孫臣以為秦水德,漢當為土德。至孝武,倪寬、司馬遷猶從土德。自上即位,案圖讖,推五運,漢為火德。]. 그와 음이 같은 풍이의 이름이 공손(馮異,字公孫)이라 했다[.東觀漢記 馮異:光武引見馮異,誦於公卿曰:「是我起兵時主簿,為吾披荊棘定關中者也。」上賜馮異璽書曰:「聞吏士精銳,水火不避,購賞之賜,必不令將軍負丹青,失斷金也。」 ]. 후한서(後漢書.後漢, 25년~220년)에도 광무제(後漢光武帝 劉秀: 25년 ~ 57년) 당시에 정서대장군풍이(征西大將軍馮異)가 활동하다 34년에 죽었다[.後漢書 光武帝紀下: 夏,征西大將軍馮異破公孫述將趙匡於天水,斬之。征西大將軍馮異薨]. 동명왕의 혈통을 이어 받은 부여 왕족을 공손(公孫)이라 했다. 그 한사람이 공손도를 키운 현토태수 공손역(玄菟太守公孫琙)이다. 공손도의 친 아버지가 공손연(度父延)이라 하지만 삼국지 이외의 어디에서도 공손연(公孫延)을 찾을수 없다. 삼국지에 공손도를 결혼 까지 시켜 주었다는 현토태수 공손역(玄菟太守公孫琙)이 부여전에 나오는 부여왕 위구대(夫餘王尉仇台)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도참설을 주장 했던 사람들이 후한초기에 (국경 또는 강)을 넘었다는 뜻이 있는 도(渡,度)자를 붙여, 공손도(公孫度)란 이름을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공손도(公孫度)를 공손탁이라고도 읽는다. 흔히 법도 도(度)라고 읽는 글자를 <다음(Daum)사전에는 헤아릴 탁, 살 택>이라고도 풀이 했다. 강희자전과 한전(漢典)을 비롯한 여러 중국 옥편에는 없는 풀이다. 살 택이란 풀이는 죽일 살(煞, 殺)자가 아니면 살쾡이(삵)를 뜻했다. 공손도의 어릴적 이름 표(豹,leopard, panther. Leopard cat)자와 같은 뜻이 있는 글자다.
후한서에는 홀로 실행하여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모아 열전을 만들었다. 그에 실린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다음과 같이 기록 했다[. 後漢書 獨行列傳: 三府並辟,皆不就。遭黃巾、董卓之亂,乃避地遼東,夷人尊奉之。太守公孫度接以昆弟之禮,
訪酬政事。欲以為長史,烈乃為商賈自穢,得免。曹操聞烈高名,遣徵不至。建安二十四年,終於遼東,年七十八。]:
“황건적의 난(黃巾賊- 亂;184년)과 동탁의 난(189-192년)에 요동땅으로 피해가니, 그곳에 살던 지역 지도자가 모셔서 태수 공손도와는 형동생의 예로 대했다. 그 답례로 (그들의)정사에 참여 했다. 관원의 수장이 되고 싶었다. 당시 후한의 실권을 잡고 있던 조조 (曹操, 155-220년)가 요동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공손도를 징계하지 못했다. 건안 24년 즉 219년 78세로 요동에서 죽었다”.
부여전에 공손도가 활동 했던 한말(漢末)은 서한이 아니라 후한 말이 분명하다. 그가184년 경 부터 219년 까지는 현토땅에 있었다.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많은 활동을 했다[. 後漢書: 十二年,曹操征遼西,擊烏桓。尚、熙與烏桓逆操軍,戰敗走,乃與親兵數千人奔公孫康於遼東. 遼東太守公孫康殺袁尚、烏延等皆走遼東,遼東太守公孫康並斬送之。其餘眾萬餘落,悉徙居中國云。]. 요동땅을 셋으로 만들고, 낭랑 땅 남쪽을 잘라 대방군을 만들었다는 사람이 공손도라고 하고 어떤 기록에서는 공손강이라 한다. 유령 인물 공손도를 부여왕 위구대의 외손 공손강이라 했다. 한때 연왕이라고 자처 했던 공손연(公孫淵, ? ~ 238년)의 진외가(陳外家)가 부여 왕실이다. 공손도전(公孫度傳)의 내용은 공손연의 업적을 주로 실어 공손연전(公孫淵傳)이라 한다. 즉 공손도전은 부여왕실의 외손의 활동상을 기록 했다.
자치통감에는 조위의 시중 유화(侍中劉曄)가 공손연의 천거를 반대 했다[.資治通鑑:曹操表公孫度為武威將軍,封永寧鄉侯。度曰:「我王遼東,何永寧也!」藏印綬於武庫。是歲,度卒,子康嗣位,以永寧鄉侯封其弟恭。公孫康卒,子晃、淵等皆幼,官屬立其弟恭。恭劣弱,不能治國,淵既長,脅奪恭位,上書言狀。侍中劉曄曰:「公孫氏漢時所用,遂世官相承,水則由海,陸則阻山,外連胡夷,絕遠難制。而世權日久,今若不誅,後必生患。若懷貳阻兵,然後致誅,於事為難。不如因其新立,有黨有仇,先其不意,以兵臨之,開設賞募,可不勞師而定也。」帝不從,拜淵揚烈將軍、遼東太守。]. 공손씨가 한나라 때부터 남만주에서 현지인과 작당하여 모반 했다는 지정학적 이유를 들었다. 공손씨의 <혈통부터, 이름자, 통치영역>등이 의문에 싸여 있다.
이렇게 중국문헌을 살펴 보면 후한 말기에 남만주에서 급성장을 했던 공손도(公孫度)를 “한무제 당시 승상 이였던 평준후 공손홍 (公孫弘為丞相,平津侯)의 후손”이라고 접붙였다. 사기와 한서에 공손홍(公孫弘:前200年-前121年)의 후손으로 실린 공손도(公孫度)란 이름자를 거의 같은 시대에 세 사람이 사용 했다. 이는 방대한 분량의 사료를 깊히 살펴 보아도 그 실마리를 바로 잡기가 어렵게 기록을 남겼다. 그때 까지의 교류 통상로를 고려 하면서 시각을 넓혀 살펴 보아야 추리가 된다.
부여왕실의 외손 공손강(公孫康)의 활동상이 공손연전(公孫淵傳)이다:
부여 왕실의 후손이 천진- 당산 일대 미추홀에 정착 했던 비류(沸流)다. 그의 후손을 중국역사로 흡수하려는 모략이, 사기 창해지군(滄海之郡)을 보충 수정하여 산양이란 애매한 지역 태수공손도(山陽太守,公孫度)를 그 곳에 접 붙였다. 어떻게 죽은 사마천이 공손홍(公孫弘)의 손자(?) 공손도가 봉하졌다 죄인으로 현토성 토목공사(城旦)장에 끌려 갔다는 기록을 할수 있겠나? 어디에 숨었던 공손도의 아버지로 공손연(度父延)이 나타났나[. 史記 表 建元以來侯者年表: 元封四年,侯慶坐為山陽太守有罪,國除 .后為山陽太守,坐法失侯.
元狩二年,弘病,竟以丞相終。子度嗣為平津侯。度為山陽太守十餘歲,坐法失侯
漢書 表 外戚恩澤侯表: 會上亦興文學,進拔幽隱,公孫弘自海瀕而登宰相,於是寵以列侯之爵.
弘子度嗣侯,為山陽太守十餘歲,詔徵鉅野令史成詣公車,度留不遣,坐論為城旦.]. 어떻게 사기에 실리지 않은 동이 예맥군 남려(東夷薉君南閭等)가 28만 가구를 끌고 발해만 서남 해안에 내려와 창해군이 생겼던 곳에 정착 했겠나. 남려(南閭)란 글자는 인명이 아니라 <의무려산(醫巫閭山)일대에 살던 예맥족의 어느 지도자가 많은 사람들(東夷薉君南閭,東夷穢貊君南閭)을 이끌고 (국경을 너머)천진-당산 일대에 내려 왔다는 사실>을 묘사한 글자다.
남려(南閭)란 글자는 해유관(解隃冠),즉 제사장(壇君,鮮于,禮君, Shaman)이 쓰던 려(醫巫閭)라고 알려진 관을 쓰고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이란 뜻이다[. 逸周書王會解:,解隃冠,發人。麃麃者.北唐以閭,閭似隃冠]. 남려란 글자가 남북조 시대에는 중원 해안에 흐터져 나타났다[. 顏氏家訓 :談說製文,援引古昔,必須眼學,勿信耳受。江南閭里閒,士大夫或不學問,羞為鄙朴,道聽塗說,強事飾辭.江南閭里間有畫書賦,乃陶隱居弟子杜道士所為;藝文類聚:《晉夏侯湛夜聽笳賦》曰:越鳥戀乎南枝,胡馬懷夫朔風,惟人情之有思,乃否滯而發中,南閭兮拊掌,北閻兮鳴笳.강희자전:《註》閭里,中門也。《後漢·班固傳》閭閻且千。《註》字林曰:閭里,門也。又門名]. 대륙백제의 혈통을 밝힌 북사(北史)에는 의무려산 (醫巫閭山)에 뿌리를 두었다는 뜻이 잠긴 려달 려해(閭達, 閭諧)란 이름이 나온다.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겨 고구려의 기반을 닦은 2대 유리왕(瑠璃明王, 재위 : 기원전 19년 – 기원후 18년)의 이름이다[. 北史 卷九十四列傳第八十二: 高麗百濟新羅勿吉奚契丹室韋豆莫婁地豆干烏洛侯流求倭蓋天地之所覆載至大,日月之所照臨至廣. 與朱蒙至紇升骨城,遂居焉。號曰高句麗,因以高為氏。其在夫餘妻懷孕,朱蒙逃後,生子始閭諧。及長,知朱蒙為國王,即與母亡歸之。名曰閭達,委之國事.三國史記 高句麗本紀第一: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王見沸流水中,有菜葉逐流下,知有人在上流者。因以獵往尋,至沸流國。二十二年,冬十月,王遷都於&國內國內城,築尉那巖城。十二月,王田于質山陰,五日不返。大輔陜父諫曰:「王新移都邑,民不安堵].
의무려산 가까이에 있던 부여에서 온 그가 동서 두 곳에 궁을 설치 하고 제임 3년에는 기산에서 사냥(王田於箕山)을 하고 돌아 와 보니 한족 여인이 도망 갔다. 서러워 황조가(黃鳥歌)를 읊었고, 11년에는 서쪽 고향 의무려산 가까이에 있던 선비(鮮卑險固之國)의 요새를 빼았았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第一:王聞之,策馬追之,雉姬怒不還。王嘗息樹下,見黃鳥飛集,乃感而歌曰:「翩翩黃鳥,雌雄相依,念我之獨,誰其與歸?」.王謂群臣曰:「鮮卑恃險,不我和親,利則出抄,不利則入守,為國之患。若有人能折此者,我將重賞之。」扶芬奴進曰:「鮮卑險固之國,人勇而愚,難以力鬪,易以謀屈。」]. 일주서 왕회해 (逸周書 王會解)에는 고조선과 북당에서 온 사신들이 모두 사슴뿔 형상의 관을 쓰고 왔다. 그러한 해유관(解隃冠, 北唐以閭,閭似隃冠)을 서주 왕실에 선물로 바첬다. 면류관의 원형이다. 이러한 관을 머리위에 쓴(이고閭 앉은) 제사장이 살던 곳이라 선비산이라고 했다. 의무려산(醫巫閭山)ㅡ 즉 선비산을 남만주의 진산 이라고 했다. 백제의 선조 부여는 의무려산 일대에서 나타난 선비족과 가까이 있었다. 선비족 모용외(慕容廆, 269년-333년)가 공손도와 같은 수법을 썼다. 부여왕을 살해 하고 부여의 공주를 부인으로 했다. 모용이란 성씨는 부여왕이 쓰던 면류관에 붙인 보석이 흔들려서 나는 소리의 사음자라고 했다.
한무제가 점령한 왕험성은 남만주 조양이다. 전란중에 조선 사람들이 그 가까이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 鮮卑山, 黑山, 富山負山)에 숨어 난을 피한 부여(夫餘), 즉 고조선의 한 갈래를 선비라고 했다. 선비(鮮卑)란, 朝鮮의 비천(卑賤)한 평민이란 뜻이다. 그들의 지도자를 선우(鮮于,單于, 鮮虞)라 한다. 후한시대에는 강력한 반항운동이 일어나 남만주 해안 일대는 한해의 동서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와 일본 열도, 중원의 동오와도 교류가 있었다.
한국어에 학자를 선비라 하고 한림원(翰林院)이란 낱말이 있다. 고조선의 후예들이 상형문자(漢字, 韓字)를 잘 사용했고 해안(翰海)을 석권 했다는 뜻이 낱말 속에 살아 있다.
구당서(舊唐書)에는 <고구려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군왕(遼東都督,封朝鮮王)에 백제 부여융을 웅진도독 대방왕(封帶方郡王)에 봉했다. 요동군에 무려현 (遼東在無慮縣), 낙랑군에 조선현 (樂浪在朝鮮縣), 현토군에 고구려현 (玄菟在高句驪縣)이 있었다. 요수의 동쪽(遼水之東)이 조선 땅(朝鮮之地) 이다>. 요수는 여씨춘추에 나오는 요수로 해하 동쪽인 천진-당산 일대가 모두 조선 땅이란 뜻이다. 각종 중국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구려와 백제가 의무려산 일대에 있던 부여에서 분가 하여 대륙백제는 발해만 서남쪽에서 출발 했다. 그러나 시조와 도읍지로 아려진 흘승골성(紇升骨城)의 현 위치가 확실치 못하다. 중원 세력에 반항하던 시절에 일차 사료를 구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 했다고 본다. 진수는 이러한 혼잡한 일차 사료를 중원 세력에 유리하게 기록 했다고 본다.
삼국사기에 <고기를 인용하여 주몽이 부여에서 난을 피해서 졸본에 갔다. 즉 흘승골성(紇升骨城)이다. 한편 한서지리지를 인용하여 요동군에 무려(無慮)현이 있다. 즉 주례에 나오는 북진 의무려산이다. 현토군에 세 현이 있다. 그 하나가 고구려현>이다[. 三國史記 雜志第六:按『通典』云:「朱蒙以漢建昭二年,自北扶餘東南行,渡普述水,至紇升骨城居焉。號曰句麗,以高為氏。」古記云:「朱蒙自扶餘逃難,至卒本。」則紇升骨城、卒本,似一處也。『漢書志』云:「遼東郡距洛陽三千六百里,屬縣有無慮,則『周禮』北鎭醫巫閭山也,大遼於其下置醫州。玄●郡,距洛陽東北四千里,所屬三縣,高句麗是其一焉。」]. 백제 본기에는 비류의 선조 동명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해 내려 왔다고 했다[. 三國史記 雜志第六:按『通典』云:「朱蒙以漢建昭二年,自北扶餘東南行,渡普述水,至紇升骨城居焉。號曰句麗,以高為氏。」古記云:「朱蒙自扶餘逃難,至卒本。」則紇升骨城、卒本,似一處也。『漢書志』云:「遼東郡距洛陽三千六百里,屬縣有無慮,則『周禮』北鎭醫巫閭山也,大遼於其下置醫州。玄●郡,距洛陽東北四千里,所屬三縣,高句麗是其一焉。」]. 삼국유사 또한 고전기(古典記, 一云)에 의하면 동명왕의 셋쩨 아들 온조라 했다. 동명왕의 큰 아들은 졸본부여에, 두쩨 아들 비류는 옛 대방땅 미추홀(彌鄒忽)에 대륙백제를 세웠고, 셋쩨 아들 온조는 남만부 해성시 일대 하남 위래성(慰禮城)에 반도 백제의 첫 수도를 정했다는 뜻이다.
의무려산 일대에 있던 부여왕의 후손이 옛 통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대륙에 자리잡아 백제의 시조가 되었다는 사실을 공손도라는 가상 이름을 만들고, 그의 아버지는 현토지역의 군주란 뜻이 잠긴 세로운 글자(琙: 或:邦也)를 만들어 현토태수공손역(玄菟太守公孫琙)이라 했다. 죽은 아들과 동갑이고 별명 또한 표(豹)자를 써 같았다는 공손도란 인물을 수양 아들(대릴 사위)로 묘사 했다. 강희자전에는 출처를 동관한기라 밝히고 “玄菟太守公孫琙”란 문구를 남겼다. 그러나 현행 동관한기에는 이 문구는 물론 “琙”란 글자도 없다[. 琙:人名漢有公孫琙. ].
그 밖에도 진수는 염사치(廉斯鑡) 오림이낭랑(吳林以樂浪本統韓國) 하는 세로운 어휘를 만들어 한전(韓)에 실었다[. 三國志 韓傳: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崎離營.魏略曰:初,右渠未破時,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東之辰國,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至王莽地皇時,廉斯鑡為辰韓右渠帥,聞樂浪土地美,人民饒樂,亡欲來降。]. 또한 부여를 지역에 따라 여러 글자 “夫餘: 扶餘, 不與”로 기록 하고, 삼한의 후예 한인(汗人; 韓人)을 현지인의 어음을 사음하여 왜인(倭人)이라고 했다. 선비족 지도자 단석괴(檀石槐)가 그믈로 고기를 잘 잡는 한국(汗國)에서 한인(汗人)을 구했다는 곳이 발해만 연안 창해군이 있던 곳이다. 후한서에서는 한인을 왜인(倭人)이라 했다. 왜인(倭人)과 한인(汗人; 韓/翰)을 혼용 또는 바꾸어 사용 했다. 이 지역이 <왜, 가야, 대륙백제>의 발생지라 하여 삼한의 후예들이 활동 하던 바다를 한해 (翰海)라고 했다.
중국문헌을 종합 분석해 보면, 창해군에 내려온 동이 예맥군 남려(東夷薉君南閭等)이 부여왕실의 외손 공손강(公孫康)이다.
한국기록에 나타난 공손(公孫)씨란 이름자:
신원이 불확실한 공손도에 관한 중국 기록을 삼국사기에서 인용했다.
나라를 빼앗긴 고조선(부여)의 후손들이 한무제 말기부터 중원 세력에 항거하여 봉기했다. 흐터져서 항거 하던 그들이 남만주 해안에서 <백제, 가야, 왜, 신라 등등 여러 부족 국가>를 만들어 중원세력이 혼란 했던 전후한 시기에 눈부신 반항운동을 했다. 신라는 박혁거세(赫居世 居西干, 재위: 기원전 57년~기원후 4년) 부터 소지 마립간(炤知 麻立干,재위; 479년 ~ 500년) 까지 금성(金城)을 수도로 사용 했다. 삼국사기에는 왜와 백제(공손도 세력, 즉 대륙백제)가 두세번 금성(金城)을 친입했다[.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二: 三年,夏四月,倭人猝至圍金城。王親出戰,賊潰走. 七年,金城南臥柳自起. 伊西古國來攻金城,我大擧兵防禦,不能攘. 三十七年,倭兵猝至風島,抄掠邊戶,又進圍金城急攻。
王欲出兵相戰,伊伐●康世曰]. 이때 공손연이 신라 수도 금성(金城)을 차지 했었다는 기록이 삼국지에 실렸다[. 三國志 魏書八二 公孫度傳: 公孫度字升濟,本遼東襄平人也。度父延,避吏居玄菟,任度為郡吏。
時玄菟太守公孫琙 淵據金城之固,仗和睦之民,國殷兵強,可以橫行。策名委質,守死善道,忠至義盡,
屬國公孫昭守襄平令,召度子康為伍長. 三國演義: 卻說公孫淵乃遼東公孫度之孫,公孫康之子也。
建安十二年,曹操追袁尚,未到遼東,康斬尚首級獻操,操封康為襄平侯,後康死]. 원상이 관도전에 패하여 분통이 터저 급사하자 후계자 싸움이 생겼다. 원상 형제는 금성(金城)에 있던 공손강 (公孫康)영역으로 피란 갔다가 207년에 그곳에서 잡혀 죽었다는 기록이 후한서에 있다[.後漢書 袁紹劉表列傳下: 曹操征遼西,擊烏桓。尚、熙與烏桓逆操軍,戰敗走,乃與親兵數千人奔公孫康於遼東。尚有勇力,先與熙謀曰:「今到遼東,康必見我,我獨為兄手擊之,且據其郡,猶可以自廣也。」康亦心規取尚以為功,乃先置精勇於廄中,然後請尚、熙。熙疑不欲進,尚彊之,遂與俱入。未及坐,康叱伏兵禽之,坐於凍地。尚謂康曰:「未死之閒,寒不可忍,可相與席。」康曰:「卿頭顱方行萬里,何席之為!」遂斬首送之. 三國志 魏書八二 公孫度傳 참조. 遼東太守公孫康自稱平州牧, ]. 삼국지 조위 태조(魏太祖,曹操) 무제기(武帝紀)와 원소전에는 207년에 공손강이 원상 원희의 수급을 바쳤다[. 三國志 武帝紀: 初,袁紹以甥高幹領并州牧.十一年春正月,公征(高)幹. 幹遂走荊州,上洛都尉王琰捕斬之。
十二月(年)春二月,將北征三郡烏丸 康即斬尚、熙及速僕丸等,傳其首.袁紹傳:十二年,太祖至遼西擊烏丸。
尚、熈與烏丸逆軍戰,敗走奔遼東,公孫康誘斬之,送其首].
진수는 동이전에; “而公孫淵仍父祖三世有遼東,天子為其絕域,委以海外之事”라 했다[. 三國志 魏書三十 東夷傳:而公孫淵仍父祖三世有遼東,天子為其絕域,委以海外之事,遂隔斷東夷,不得通於諸夏。
景初中,大興師旅,誅淵,又潛軍浮海,收樂浪、帶方之郡,而後海表謐然,東夷屈服。其後高句麗背叛 ]:
수완꾼(而)공손연(公孫淵) 3대(度, 康,淵)가 활동하던 요동 땅은 천자관활 영역 밖이라, 버려 버린(委以)땅,즉 남만주는 원주민의 반항이 심하여 포기했던 외국 땅이라고 했다. 이곳에 살던 고조선의 후예들은 지도자를 하늘나라를 뜻한 빌 하(叚)자로 기록 했다. 삼국지에는 빌 하(叚)자를 어근으로 하는 글자들(拜假倭王, 遐)이 많이 나타난다. 모두 햇님의 후손이란 뜻이 잠겨 있는 글자다.
공손강이 201년(建安五年)경에 나타나야 할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공손강(度, 康)의 최후를 공손양(公孫陽, 山陽太守公孫度)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남쪽에서 잡혔다고 했다[.晉書:子不聞乎終軍之穎,賈生之才,拔奇山東,玉映漢臺,可謂響播六合,聲駭嬰孩,而見毀絳灌之口,身離狼狽之災.三國志 高句麗傳:伯固死,有二子,長子拔奇,小子伊夷模。拔奇不肖,國人便共立伊夷模為王。自伯固時,數寇遼東,又受亡胡五百餘家。建安中,公孫康出軍擊之,破其國,焚燒邑落。拔奇怨為兄而不得立,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還住沸流水。降胡亦叛伊夷模,伊夷模更作新國,今日所在是也。拔奇遂往遼東,有子留句麗國,今古雛加駮位居是也。其後復擊玄菟,玄菟與遼東合擊,大破之。
三國志 孫策傳:岱字孔文,吳郡人也。受性聦達,輕財貴義。其友士拔奇,取於未顯,所友八人,皆世之英偉也 ]. 산양이라고 묘사한 지역에 “고구려(高句驪) 상은대(上殷台) 서개마 (西蓋馬) 세개의 현”이 있었다. 그 일대에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있다. 고구려와 부여의 발생지다. 진수는 부여를 사마천이 만든 사내부자 부여(夫餘)와 도을 부자 부여(扶餘)로 기록 했다. 도울 부자는 중원세력에 밀착 했던 부여족을 뜻한다. 그에 반항하던 세력은 “夫餘, 또는 不與” 라고 기록 했다. 삼국지 위서(魏書三十)에 실린 “夫餘, 不與”두 이름자로 많은 혼란을 겪고 있다. 상은대(上殷台)에 살던 주민을 상나라 유민촌으로 인식 시키려고 도울 부자 부여(扶餘)라고 기록 했다[. 三國志: 已卯,以前將軍夏侯惇為大將軍。濊貃、扶餘單于、焉耆、于闐王皆各遣使奉獻.
忠曰:「我遼東在滄海之東,擁兵百萬,又有扶餘、濊貊之用;當今之勢,彊者為右,曹操獨何得為是也?」 ]. 이 글자를 진서에서도 인용 했다[.晉書 檢索 扶餘: 武帝弗許。廆怒,入寇遼西,殺略甚眾。帝遣幽州諸軍討廆,戰于肥如,廆眾大敗。自後復掠昌黎,每歲不絕。又率眾東伐扶餘,扶餘王依慮自殺,廆夷其國城,驅萬餘人而歸。東夷校尉何龕遣督護賈沈將迎立依慮之子為王,廆遣其將孫丁率騎邀之。沈力戰斬丁,遂復扶餘之國。
慕容桓以眾萬餘屯于沙亭,為評等後繼。聞評敗,引屯內黃。堅遣將鄧羌攻信都,桓率鮮卑五千退保和龍。散騎侍郎徐蔚等率扶餘、高句麗及上黨質子五百餘人,夜開城門以納堅軍. ]. 도울 부자에는 의무려산 일대에 살던 고조선의 한 부족을 선비족(鮮卑)이라 하고 그 한 부족이 모용 (慕容)씨가 되었다[. 通典 邊防十二:慕容氏,亦東胡之後,別部鮮卑也。晉史云:「有熊氏之苗裔,因山為號。」魏初渠帥有莫護跋,率諸部入居遼西,後從司馬宣王討公孫淵有功,拜率義王,始建國於棘城之北。今柳城郡之地。時燕代多冠步搖冠,護跋見而好之,乃斂髮襲冠,諸部因呼之為「步搖」,其後音訛,遂為「慕容」焉。或云慕二儀之德,繼三光之容,遂以慕容為氏。至孫涉歸,魏封為鮮卑單于,遷居遼東,於是漸慕華夏之風矣。]. 주몽의 아들 유리왕(琉璃王;재위: 서기전 19 -서기 18년)이 기원전 8년에 선비의 소굴을 빼았았다.
부여왕 우대(優台)가 공손연의 진외가:
공손도전의 내용과 발해만 서쪽일대에서 발생한 사건을 묘사한 문맥을 살펴 보면, 공손연의 할머니 선조가 부여왕 우대(優台)의 아들로 대륙백제의 시조 비류왕(沸流王)이다[.三國史記百濟本紀:『北史』及『隋書』皆云:「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初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强國。」未知孰是.『冊府元龜』云:「百濟每以四仲之月,王祭天及五帝之神,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歲四祠之。」按『海東古記』或云始祖東明,或云始祖優台。『北史』及『隋書』皆云:”東明之後,有仇台,立國於帶方,此云始祖仇台。然東明為始祖,事迹明白,其餘不可信也。(공손도의 딸을 부인으로 받아드렸다는 잘못)]. 우대(優台)를 중국기록에는 원수 구자를 넣어 위구대(尉仇台, 尉仇臺)라 했다. 부여왕을 공손(公孫)이라 하고, 건넜다 하여 도(度,渡:濟也)를 붙여 공손도란 이름을 만들어 공손홍의 후손으로 접 붙였다. 그가 세운 나라를 한전에 맏 백자 백제국(伯濟國)이라 했다. 이에 원수 구자를 넣어 부여왕 사자 구대(夫餘王遣子尉仇台,嗣子尉仇臺)라 했다. 뒤에는 그가 왕이 되었다. 부여왕 우대의 외손 공손연이 통치하던 지역이 대륙백제의 영역이었다.
고조선의 후손 부여왕 우구대(夫餘王尉仇台)가 발해만 서남쪽 천진 일대에서 도망온 공손연(公孫延)의 아들 표(度,公孫豹)를 대릴사위로 삼아 발해만 일대에서 성장 하여 남북조시대 말기에는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는 문구가 북사와 수서에 있다[.三國史記百濟本紀:『北史』及『隋書』皆云:「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初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强國。」未知孰是.『冊府元龜』云:「百濟每以四仲之月,王祭天及五帝之神,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歲四祠之。」按『海東古記』或云始祖東明,或云始祖優台。『北史』及『隋書』皆云:”東明之後,有仇台,立國於帶方,此云始祖仇台。然東明為始祖,事迹明白,其餘不可信也。(공손도의 딸을 부인으로 받아드렸다는 잘못)]. 삼국사기에는 공손도의 어릴적 이름자와 음이 같고 뜻이 비슷한 빠를 표, 겁박할 표(剽)란 이름(公孫剽)이 실렸다. 이곳에서 이러한 사건이 발생한 시기를 삼국지에는 한시(漢時) 후한서에는 한조(漢朝)라고 은미하게 기록하여 전한 시대에 나타났던 공손홍의 아들이라한 공손도가 후한 시대 말기 인물로 둔갑 했다.
북송시절에 편찬된 책부원구(冊府元龜)에 따르면 우구대의 후손이 천자의 예식 “王祭天及五帝之神”을 행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도 실렸다.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년~375년)과 아신왕(阿莘王, 재위 : 392년~ 405년) 때에 그러한 의식을 했다. 대륙에 백제(북제)가 있었고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도 부여의 후손이 활발 했다는 동이 강국이란 뜻이다.
대륙에 영역을 갖고 괴롭히던 백제왕과 백제의 장군 이름에는 원수 구(仇)자를 붙였다.
공손도(公孫度;? ~ 204년) 다음 세대는 남만주 발해 요동만 연안을 통치하는 연왕(燕王)이라 했다. 북경-천진일대를 통치 했다는 뜻이다. 그러다 몇달 후에 일당이 주살 당했다. 진수는 공손씨가 한해(韓/汗/翰海,北海, 瀚海)를 통치 했다(公孫度雄張海東)는 문구를 고구려와 부여의 시조 동명의 후손으로 기록 했다[.三國志:夫餘本屬玄菟。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時句麗、鮮卑彊,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尉仇台死,簡位居立。無適子,有孽子麻余。位居死,諸加共立麻余。牛加兄子名位居,為大使,輕財善施,國人附之,歲歲遣使詣京都貢獻。正始中,幽州刺史毌丘儉討句麗,遣玄菟太守王頎詣夫餘,位居遣大加郊迎,供軍糧。季父牛加有二心,位居殺季父父子,籍沒財物,遣使簿斂送官。舊夫餘俗,水旱不調,五糓不熟,輙歸咎於王,或言當易,或言當殺。麻余死,其子依慮年六歲,立以為王。漢時,夫餘王葬用玉匣,常豫以付玄菟郡,王死則迎取以葬。公孫淵伏誅,玄菟庫猶有玉匣一具。今夫餘庫有玉璧、珪、瓚數代之物,傳世以為寶,耆老言先代之所賜也。魏畧曰: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甞破壞也。其印文言「濊王之印」,國有故城名濊城,蓋本濊貊之地,而夫餘王其中,自謂「亡人」,抑有似也。魏畧曰:舊志又言,昔北方有高離之國者,其王者侍婢有身,王欲殺之,婢云:「有氣如鷄子來下,我故有身。」後生子,王捐之於溷中,猪以喙噓之,徙至馬閑,馬以氣噓之,不死。王疑以為天子也,乃令其母收畜之,名曰東明,常令牧馬。東明善射,王恐奪其國也,欲殺之。東明走,南至施掩水,以弓擊水,魚鼈浮為橋,東明得渡,魚鼈乃解散,追兵不得渡。東明因都王夫餘之地。]. 공손도(公孫度,?-204年,字升濟,一作叔濟)에서 부터 공손연(公孫淵, 字文懿, ?-238年) 멸망 시기 까지의 사료는 삼국지가 원조다. 그들이 활동 했던 지역이 삼한의 발생지다. 삼국사기와 진서에서도 진수가 묘사한 내용을 도풀이 했다. 그러나 같은 시대를 다룬 후한서나 전한기에는 공손도를 다르게 기록 했다.
광개토왕 비문에는 신라가 신민이고 백제를 백잔(百殘)이라고 했다. 백제가 주 적이었다. 대왕이 인솔한 고구려군사가 발해만 서남쪽 양평(襄平)을 지나고 비류가 정착 했던 미추홀(彌鄒忽,彌鄒城)을 점령 했다. 대왕의 군사는 발해만 서쪽을 다녀 갔다.
신묘년조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耒卯年來渡海破百殘招倭新羅以為臣民” 란 문구 풀이에 이론이 많다. 배를 잘 다스릴 능력이 있는 왜인이 신묘년에 대왕의 군영에 와서 요동 받도 끝에 있는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탈취하여 왜와 신라를 손으로 지시하며(招) 신민이라고 했다. 이들이 모두 한때는 공손씨 영향력 속에 있었다. 포로로 잡혀온 한예(韓穢)를 취해 청소를 시키라고 했다. 한중 양국 사료를 종합해 보면 공손도(公孫度)는 가공 인물이고 그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은 부여왕 위구대의 외손자다. 동오의 손권은 발해만 연안을 통치 하던 공손연(公孫淵)과 교류를 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와 교류 했다. 대륙백제에 손권의 사신이 도착했던 사실을 은패 하여 이러한 엇갈린 기록을 남겼다. 대륙백제를 세운 부여왕실이 공손연(公孫淵)의 진외가(陳外家)다. 진외가 여러 자손이 남만주 일대에 흐터뎌 살았다. 진서 무제기에는 공손연이 잡힌 양평성 일대, 즉 요양-해성시 일대를 동왜(東倭)라 했다. 그 곳에서 전리품을 약탈해 와서 조위의 궁궐을 장식 했다[.晉書:魏正始元年春正月,東倭重譯納貢,焉耆、危須諸國,弱水以南,鮮卑名王,皆遣使來獻。天子歸美宰輔,又增帝封邑。初,魏明帝好脩宮室,制度靡麗,百姓苦之。帝自遼東還,役者猶萬餘人,雕玩之物動以千計。至是皆奏罷之,節用務農,天下欣賴焉]. 그 곳에 왜왕 비미호(倭王卑彌呼)가 공손연 세력에 관여 했던 자들을 잡아 조위 왕실에 보냈다. 이를 가왜왕(假倭王)이 생구를 바쳤다고 기록 했다[.三國志 倭人傳:正始元年,太守弓遵遣建中校尉梯儁等奉詔書印綬詣倭國,拜假倭王,并齎詔賜金、帛、錦]. 그보다 100여년 전에는 그곳에 수도를 두고 있던 고구려 신대왕 때에 왕위 쟁탈전이 나타났다. 이를 발기(拔奇)가 30,000여명을 이끌고 공손강(公孫康)이 다스리던 요동에 갔다 비류수상에 돌아와 살았다(還住沸流水上)는 사건이 삼국지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실렸다. 이 사건으로 고구려의 왕위를 이어 받은 동생 이리모는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伊夷模作新國) 옮겼다[.三國志 魏書三十 高句麗傳: 伯固死,有二子,長子拔奇,小子伊夷模。拔奇不肖,國人便共立伊夷模為王。自伯固時,數寇遼東,又受亡胡五百餘家。建安中,公孫康出軍擊之,破其國,焚燒邑落。拔奇怨為兄而不得立,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還住沸流水。降胡亦叛伊夷模,伊夷模更作新國,今日所在是也。拔奇遂往遼東,有子留句麗國,今古雛加駮位居是也。其後復擊玄菟,玄菟與遼東合擊,大破之]. 삼국지에는 발기(拔奇)가 요동으로 돌아 가고 아들 고추가 박위거(古雛加駮位居)가 졸보에 남아 살았다했다. 삼국 사기에는 신대왕의 첫째 아들 고국천왕(故國川王)이 죽어 왕후가 몰래 왕의 동생 발기(發岐)를 찾아가 왕위 계승을 모의 하다 실패 했다. 후에 발기가 죽었다고 했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第四:故國川王或云國襄。諱男武或云伊夷謨伊夷模。,新大王伯固之第二子。伯固薨,國人以長子拔奇不肖,共立伊夷謨為王。漢獻帝建安初,拔奇怨為兄而不得立,與消奴加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公孫康降,還住沸流水上。王身長九尺,姿表雄偉,力能●鼎,●事聽斷,寬猛得中.初,故國川王之薨也,王后于氏,秘不發喪,夜往王弟發●宅,曰:「王無後,子宜嗣之。」發●不知王薨,對曰:「天之曆數有所歸,不可輕議。●婦人而夜行,豈禮云乎?」].
고구려 신대왕의 아들 발기(拔奇)와 발기(發岐)는 같은 사람이다.
졸본에 살던 발기(拔奇)가 혈연 관계가 있는 공손강(公孫康, ? ~ 221년)이 살던 천진-당산 일대에 도망을 갔다 졸본(卒本)을 동왜(東倭)라 했다. 진서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서쪽에도 동왜(東倭)와 같은 혈통을 지닌 부족이 살았다는 뜻이다. 천진-당산 일대에 사는 비류왕의 후손을 서왜 (西倭)라고 인식 했다. 그 곳에 공손강이 살았던 곳에 갔다가 졸본으로 되돌아 와서 살았다. 창해군이 있었던 곳이다. 공손강(公孫康)을 동이 예군 남려(東夷薉君南閭) 라고 부른듯 하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태조대왕(太祖大王, 53 – 146년) 69년인 121년 가을에 고구려를 친입해 왔던 요동태수 채풍을 제 몸으로 막으려다 죽은 마부 공손포(兵馬掾公孫酺)란 공손씨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같은 사건이 후한서에도 공손포(公孫酺)라고 기록 되였다. 같은 해 겨울에 태조대왕이 마한과 예맥(穢貊)군사 10,000여기를 인솔하고 현토성을 포위하니, 부여 왕이 아들 우구대를 보내 (扶餘王遣子尉仇台)한나라 군사를 도와 고구려 군사가 패했다.
당시 유교문화권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이름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원수 구(仇)자는 우대가 원수 같은 자란 뜻에서 삽입한 글자다. 우대는 삼국사기와 삼국지 고구려 편에 나타난 단위에 선 특출한 사람(단우/위單于)이란 뜻글자 우대(優台)를 다른 글자로 기록 했다. 남북조 시대 이후에는 아예 높다는 사음자 위(尉)를 때고 구대(有仇台, 仇台)라 했다. 우대(優台)란 글자가 백제의 시조다. 태평어람 부여조에는 120년에 부여왕이 아들 위구대(嗣子尉仇臺)를 보네 천자로 부터 인수금채(印綬金彩)을 받았다[. 太平御覽 夫餘:至安帝永初五年,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殺傷吏人,後復歸附。永寧元年,乃遣嗣子尉仇臺詣闕貢獻,天子賜尉仇臺印綬金彩。順帝永和元年,其王來朝京師,帝作黃門鼓吹角抵戲以遣之。桓帝時亦朝貢。獻帝時求屬遼東云]. 아들 위구대는 삼국사기에 공손도가 등장 하기 이전이다. 일본 구주후쿠오카 시(福岡市) 해안에서 발견 되었다는 왜왕인(委奴國王)은 부여 태자 (嗣子尉仇臺)가 받은 인수금채(印綬金彩)이다. 남만주에 살던 사람들이 받았던 귀한 물품이라 한해 연안을 따라 옮겨 가면서 분실 했다고 본다.
해동고기와 남북조시대 이후에 나타난 중국기록서 밝혔다:
중국 사료에는 숨겨젔던 역사적 사실이 훗날 집권층이 바뀌면서 드러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대륙 자리 잡았던 비류의 후손이 세운 나라를 북제(北齊, 550년 ~ 577년)라 하고, 이마저 숨기려 고제(高齊)라고도 했다. 그들이 중원의 옥새를 잡았다는 사실이 남북조 시대 말기에 나타났다.
천진 일대에 가서 미추홀이란 곳에 정착 했던 비류왕(沸流王)의 선조는 북부여 해부루의 후손 우대(優台)가 아버지요 졸본부여에 살던 연타발의 딸 소서노(召西奴)가 어머니다. 남편 우대가 죽어 소서노는 졸본에서 살았다[.三國史記百濟本紀:『北史』及『隋書』皆云:「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初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强國。」未知孰是.『冊府元龜』云:「百濟每以四仲之月,王祭天及五帝之神,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歲四祠之。」按『海東古記』或云始祖東明,或云始祖優台。『北史』及『隋書』皆云:”東明之後,有仇台,立國於帶方,此云始祖仇台。然東明為始祖,事迹明白,其餘不可信也。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故以扶餘為氏。一云:始祖沸流王,其父優台,北扶餘王解扶婁庶孫。母召西奴,卒本人延●勃之女,始歸于優台,生子二人,長曰沸流,次曰溫祚。優台死,寡居于卒本。冊府元龜』云:「百濟每以四仲之月,王祭天及五帝之神,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歲四祠之。」按『海東古記』或云始祖東明,或云始祖優台。『北史』及『隋書』皆云:”東明之後,有仇台,立國於帶方,此云始祖仇台。然東明為始祖,事迹明白,其餘不可信也]. 발해만 서남 쪽 창해군이 나타났던 지역에 부여의 후손이 정착 했다는 기록이 남북조시대 이후 문헌에 나온다. 그 전 문헌에는 이러한 사실을 숨겼다. 삼국지 한전에 나타난 맏백자 백제국(伯濟國)이다[. 三國志: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無城郭。有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 공손강이 낭랑 남쪽 땅을 잘라 만들었다는 대방땅 남쪽이라 했다. 창해군이 있던 지역에 형이 물을 건너와 새운 나라 백제국(伯濟國)이 있었다. 이를 글자를 이리저리 뒤바꾸어 부여 왕족 큰 아들을 공손(公孫)으로 제(濟)자를 도(度)로 바꾸어 백제국(伯濟國)의 지도자를 공손도(公孫度)라 했다. 우구대(尉仇台)가 부여왕 우대(優台)다.
삼국지 고구려 편에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이라 하고 여러 관직 중에 우대승(優台丞)이란 직책이 실렸다[. 三國志 魏書三十 高句麗傳: 其國有王,其官有相加、對盧、沛者、古雛加、主簿、優台丞、使者、皁衣先人,尊卑各有等級。東夷舊語以為夫餘別種,言語諸事,多與夫餘同,其性氣衣服有異。]. 그가 왕공대인, 즉 단군왕검의 먼 후손이라 공손(公孫)씨라고 둔갑 시켰다. 고구려 왕자 발기(發岐, 拔奇:? ~ 197년)가 그 곳에 정착 하고 손권과 교류가 있었다[.三國志 衞臻傳:臻荅曰:「古人遺智慧而任度量,須考績而加黜陟;今子同牧野於成、康,喻斷蛇於文、景,好不經之舉,開拔奇之津,將使天下馳騁而起矣。」孫策傳:建安五年. 岱字孔文,吳郡人也。受性聦達,輕財貴義。其友士拔奇,取於未顯,所友八人,皆世之英偉也。太守盛憲以為上計,舉孝廉. ].
다음에는 공손도(公孫度)란 이름이 고구려와 백제 본기등 모두 3 곳에 나온다. 고구려 신대왕 4년(新大王: 四年)인 168년에 현토 태수 경림(耿臨)이 친입하여 아군 수백명을 죽여 왕이 항복하고 현토에 복속하겠다고 빌었다. 바로 그 다음 해에는 왕이 대가우거와 주보 연인등이 군사를 이끌고 현토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서 부산(富山)에 있는 적을 토벌 했다. 광개토대완 비문에 나오는 부산이 선비족이 숨어 살아 났다는 선비산이다. 이를 의무려산이라고 하건 산이다. 이 구절은 중국이나 한국 사가들이 많이 인용하는 문구다. 그러나 열전에는 처음 한나라 군사가 처들어 왔을 때 명림답부의 계책으로 성을 지키다가 나가 크게 이겨 침략군을 섬멸 시켰다. 한나라 군사 지휘관은 경림(耿臨)이였다. 후한서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오늘의 요하 서쪽에 자리잡고 성장 했던 비류의 대륙백제와 졸본부여의 종주권을 놓고 그 곳에서 밀려 났던 고구려가 집요하게 침략군의 동북쪽 기지를 공격하던 시절이다.
이 지역이 황패해 져서 낭랑땅을 잘라 대방군을 만들었다. 진서에 따르면 옛적 한무제가 친입했던 발해만 해안이 황패 되여,평주의 5 군을 모두다 합해도 한서 낭랑군의 인구(樂浪郡,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縣二十五)보다 적었다[.晉書公孫度:平州。案《禹貢》冀州之域,於周為幽州界,漢屬右北平郡。後漢末,公孫度自號平州牧。及其子康、康子文懿並擅據遼東,東夷九種皆服事焉。魏置東夷校尉,居襄平,而分遼東、昌黎、玄菟、帶方、樂浪五郡為平州,後還合為幽州。及文懿滅後,有護東夷校尉,居襄平。咸寧二年十月,分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等郡國五置平州。統縣二十六,戶一萬八千一百。帶方郡公孫度置。統縣七,戶四千九百.李胤,字宣伯,遼東襄平人也。祖敏,漢河內太守,去官還鄉里,遼東太守公孫度欲彊用之,敏乘輕舟浮滄海,莫知所終。胤父信追求積年,浮海出塞,竟無所見,欲行喪制服,則疑父尚存,情若居喪而不聘娶。 ].
우구대가 요동태수 공손도를 대리 사위로 맞아 <동이의 강국>이 되였다는 기록이 중국사료를 인용하였다고 밝힌 백제 본기에 있다. 대륙백제는 부여에서 내려와 옛적 대방땅에서 건국 했다는 사실을 중원 사가 들은 옛적 부터 인식 하고 있었다는 뜻이 분명하다.
신라 본기에는 공손씨가 안보인다. 그러나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수도가 금성(金城)이였고, 왜, 낙랑의 공격을 여러번 받았다. 삼국지에 따르면 공손연이 금성을 차지 했었다. 전국시대 후기부터 중원의 난을 피해 공손도 영역으로 많이 이사 왔다는 기록이 신라 본기와 후한서에 있다. 공손도 세력이라고 보는 왜와 백제가 두세번 금성(金城)을 친입했다. 진수는 위약의 내용이라면서 “淵據金城之固,仗和睦之民,國殷兵強,可以橫行。策名委質”란 문구를 공손도전에 남겼다. 공손연(公孫淵)이 남만주 연안에서 <화목하게 살던 사람들과 지형적 방어요새를 이용하여 나라가 번성하고 병력이 강해졌다. 가이 아무 거리낌 없이 멋대로 행동(橫行)했다. 두마음을 먹고 실시한 정책>을 썼다. 좌씨 춘추에 나오는 미묘한 문구“策名委質”를 인용하여 공손연의 행위를 묘사 했다 .
공손도의 직책을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받았다. 그가 횅폭하게 원주민을 다루었고, 원소의 아들 둘을 잡아 조조에게 바쳤다. 자칭 평주목이라 했다[.三國志:尚、熈與烏丸逆軍戰,敗走奔遼東,公孫康誘斬之,送其首。又遼東太守公孫康自稱平州牧,遣使韓忠齎單于印綬往假峭王。桓、靈之末,韓濊彊盛,郡縣不能制,民多流入韓國。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為帶方郡]. 진수는 공손도의 아들 강이(公孫康) 요동을 삼분했다하고, 진서에는 공손도(公孫度)가 했다는 엇 갈린 기록을 남겼다.
그러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후한서에는 공손도를 범인으로 기록하고 공손강에 관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공손도전에는 공손공(公孫恭, ? ~ ?)의 조카가 되는 공손연(公孫淵, ?-238년)이 강탈 했다. 조조의 아들이 후한의 마지막 황제로 부터 옥새를 이어 받고 220년에 조위의 첫 황제가 되였다. 그가 아버지 조조의 참모로 일하던 사마중달, 사마휘(司馬毅)를 시켜 238년에 공손연을 토벌 했다. 사마중달이 조위 조정에서 세력을 쌓아 그의 아들이 조위(220년 – 265년)를 밀어 내고 서진(西晉, 265년-317년)을 새웠다. 그가 전승하고 전리품을 갖고 온 곳을 동왜(東倭, 卒本扶餘) 라고 했다. 그 당시 동왜의 지도자는 여자 무당이었다. 그녀를 비미호 (히미코,卑彌呼)라 했다. 왜 여왕이 아니라 백제의 여자 제사장 (假倭王, 慰禮, 禮君)이다. 이로 인하여 동왜 사람들이 서진 초기에 고위 관리로 임명 되어 대륙에 백제의 기반을 닦았다. 천진-당산일대에 살던 비유왕의 후손들을 서왜(西倭)로 인식 했다는 뜻이 동왜란 글자 속에 있다.
삼국사기에는 공손도 세력이라고 보는 왜와 백제가 두세번 금성(金城)을 친입했다.
삼국지에 따르면 공손연이 금성을 차지 했었다. 이 시대에 원상이 관도전에 패하여 분통이 터저 급사(심장마비 아니면 뇌출혈?)하자 후계자 싸움이 생겼다. 그의 후손 일당이 금성(金城)에 가까운 오환의 본거지에 숨었다. 그러나 5월 달에 천진-당산 일대 (無終)에 있던 조조 군사가 유성(柳城, 조양 일대)까지 진군하지 못하리라 믿고 방심한 오환 추장 답돈(蹋頓)이 조조손에 죽고 오환군사는 투항 했다. 원상 형제는 금성(金城)에 있던 공손강 (公孫康)영역으로 피란 갔다. 그들의 계획은 공손강을 죽이려 했스나, 공손강이 한수 앞서 그들의 목을 잘라 조조에게 선물 했다 . 조조가 승전하고 돌아 오는 길에 갈석산에 올라가 읊은 시문이“관창해 觀滄海”다. 그당시 사람 이름자와 시대에 차이가 많다.
공손씨 세력이 사라진 후에 미추이사금(味鄒 尼師今,재위: 261년-284년)이 김씨로 처음 왕이 되였다. 비류가 정착 했던 대방 미추홀(彌鄒忽) 지역에서 올라와 신라의 왕이 된 사람이란 뜻이다. 중원의 난을 피해 공손도 영역으로 많이 이사 왔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있다. 후한서에도 있다. 발해만 서남쪽에 살던 김일제(金日磾) 후손이 중원의 난을 피해 발해만 서안을 따라 남만주로 들어 왔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무제기에는 북쪽을 공격 하니 태원 지역에 수장(并州牧)이였던 원소의 이질(甥) 고간(高幹)이 남쪽(荊州)으로 도망 갔다 잡혀 죽었다. 무제기와 원소전에는 207년(建安十二年)에 공손강이 원상 원희의 머리를 바쳤다 . 이 사건이 후한서에는 효헌제(漢 孝獻皇帝, 189년-220년) 12년 (202년)에 원희 원상 형제가 요동태수 공손강 영역으로 도망을 가니 강(康)이 그들을 죽여 수급을 바쳤다. 삼국지 무제기에는 <건안 18년인 213년에 오나라와의 전투에서 공손양 (公孫陽)을 잡았다. 그해에 조조가 위공(魏公)으로 진급했다>고 한다. 공손양(公孫陽)이란 양산 태수 공손도, 또는 그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을 뜻했다[.三國志 武帝紀:十八年春正月,進軍濡須口,攻破權江西營,獲權都督公孫陽,乃引軍還。詔書并十四州,復為九州。夏四月,至鄴].
결론:
진수는 현지 노인들의 증언을 근거로 남만주 역사 일차 사료가 되는 위지 30을 편찬 했다. 부여왕 위구대(夫餘王尉仇台)의 혈통은 밝히지 못하고 도망온 사람들이라 했다. 위약을 인용 하여 동명왕이라고 했다. 부여의 왕위 계승에 혼란이 많았다. 무구검이 고구려를 침략 할때 조위의 군사를 도와 주었다. 왕이 큰아들 위구대 (嗣子尉仇臺)를 보네 봉헌하니까 천자가 120년(永寧元年)에 인수금채(印綬金彩)을 하사 했다.
현토태수의 아들과 같은 나이였던 공손도는 부여왕 위구대의 아들 위구대와 같은 나이였다. 두 사람의 부친 이름이 연(度父延)이다. 또한 그들의 사망 시대와 장소가 일치 한다. 진수는 같은 사람을 이리저리 뒤돌려 부여왕실의 외손이 발해만 연안을 통치 했던 사실을 한무제의 제상 공손홍의 후손으로 인식 시키려 했다. 현토 태수 공손역(公孫琙)의 아들 표범(豹)이 18살에 죽었다. 어려서 아들 공손도(公孫度)의 별명이 표범(豹) 이였고, 나이도 동갑이라 현토 태수는 (타지에서 온) 공손도를 사랑했고 글을 가르쳐 주고 장가 까지 드렸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는 정권을 찬탈한 일화를 실으면서; <표범(豹) 이란 발음과 비슷한 중국 위나라의 공손표(公孫剽)가 임금 간(衎) 을 죽이고 스스로 임금이 되였다는 일화> 를 들어 논평 했다. 너그러운 군주라는 뜻의 간(衎)자는 옛적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서한 말기 왕망(王莽;기원전 45년 ~ 기원후 25년)이 실권을 잡던 시기, 전한의 평제 유간(漢平帝 劉衎, 재위 기원전 1년 ~ 기원후 5년)의 이름이 간 (衎)이다.그의 원명은 기자(刘箕子)라고 한다[. baike.baidu.com:刘衎(公元前9年-公元6年2月4日),即汉平帝(公元前1年―公元6年在位)。原名刘箕子,汉元帝刘奭之孙,中山孝王刘兴之子,母卫姬 [1] ,西汉第十四位皇帝
]. 공손도가 장인이 였던 현토태수를 살해 하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을 왕망(王莽)이 황제 간(衎)을 살해하고 나라를 빼았아(王莽篡漢) 신(新)나라를 세웠던 사실에 비유 했다. 공손연이 부여왕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는 사실을 은패했다.
공손강이 낭랑 남쪽 땅을 잘라 만들었다는 대방땅은 창해군이 있던 지역이다. 이 곳에 형이 물을 건너와 새운 나라 백제국(伯濟國)이 있었다. 이를 훈역으로 글자를 바꾸어 하백의 혈통을 이어 받은 부여왕 맏아들을 공손(公孫)으로, 물을 건넜다는 제(濟)자를 도(度, 渡:濟也)로 바꾸어 백제국(伯濟國)의 지도자를 공손도(公孫度)라 했다. 백제국(伯濟國)이 대륙에 나타난 북제(北齊, 550년 ~ 577년)의 전신이다. 공손씨 세력의 마지막인 공손연이 부여왕 우구대(尉仇台, 優台)의 후손이다.
끝.
April 11, 2019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