箕子가 갔던 조선은 산서성에 있었다:
기원전 1046년에 목야전에 패한 [상나라의 제상 기자가 조선에 갔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있다. 당시 과연 [箕子가 어떻게 한반도 조선땅에 왔나]하는 의문이 생긴다.
의문을 풀어줄수 있는 사료가 사마천의 사기에 실려 있다. 그 징검다리 하나가 한국에는 잘 알려 지지 않은 상용(商容)이란 사람이다.
태사령 사마담(司馬談: c. 165 BC – 110 BC)은 태산에서 거행된 무제의 봉선 의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기다가 병이 나서 죽었다. 죽을 때 아들 사마천에게 생전부터 편찬하던 역사서의 편찬을 완료해 줄 것을 부탁한다 . 기원전 110년, 사마담이 세상을 떠나자 사마천 (司馬遷; c. 145 – c. 86 BC) 은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루고 기원전 108년에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그해 가을에 한무제가 朝鮮을 친입 했다. 사기 조선열전은 사마천의 기록이다. 箕子가 갔던 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우거왕이 멸망하기 이전에 나타난 조선의 어느 하나가 된다.
사기는 사마담으로 부터 전해 받은 내용을 근거로 황실에 보관 되었던 모든 사료를 종합 정리한 사마천의 기록이다. 사마천의 사망이후에 후세 사람들이 사기 내용을 많이 수정했다. 뚜렷한 본보기로는, 저선생 (褚先生)이 수정했다는 기록이 있고, 한서의 저자 반고(班固: 32년-92년) 의 이름이 실렸다. 살아 남은 사료도 있다. 바둑 묘수풀이 하듯 차근히 살펴 보아야 보인다.
기자에 관한 기록은 은나라와 주나라의 본기에 실렸서야 한다. 상용(商容)이란 글자와 같이 실렸다 . 그러나 조선이란 글귀는 두 본기에는 실리지 않고, 송미자세가에 조선과 기자가 실렸다. 상용이란 글자는 기자나 조선보다 더 여러 곳에 실렸다. 그는 상 나라 마지막에 기자 보다 앞서 제상으로 폭군 제신에게 건의하다 시국이 사양길에 든 사실를 인식하고 은퇴 했다 . 은퇴한 곳을 사마천은 악서(樂書)에 “使之行商容而復其位”란 문구로 혼미하게 기록 했다 . 똑 같은 문구가 예기 악기(禮記 樂記)에도 실렸다. 공자가어(孔子家語 辯樂解)에는 사인을 상용의 옛적 고향에 보냈다(使人行商容之舊,以復其位)라고 했다.
한비자(韓非子)에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사인이 갔던 곳을 “使人行之所易”라 했다 . 태호 복희씨때 부터 전해 오던 연산역(連山易)의 발생지를 뜻했다 .
한시외전에 상용이 태행산에 숨어(지도자 귀에 거슬리는 쓴소리 하지 않고) 조용히( 伏於太行) 살았다고 했다 . 그를 찬미하여 읊은 시문이 향가 위풍에 실린 벌단(詩經 魏風 伐檀) 편명이라 했다. 태행산맥 옛적에 노예들이 살던 곳이였다. 사마천이 산서성에 올라가 노인들로 부터 기자가 했다는 전설 한구절을 진세가에 실었다. 연나라의 영역을 다룬 전국책 연책 (戰國策 燕策)에 상용의 고사를 인용한 문구가 실렸 있다 . 관자에는 상용이 宋에 살았다고 했다.
晉世家: 且吾聞箕子見唐叔之初封,曰『其後必當大矣』,晉庸可滅乎!」乃與晉侯盟王城而許之歸.
예기와 사기에 혼미하게 남긴 문구 “使之行商容而復其位”는 주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하고 옛 현인을 찾아 선정을 펴려 했다는 내용을 은밀하게 기록한 본보기의 하나다:
[무왕이 은나라를 이겼지만 상이 반하여 아직 불안하여 (未及), 어거에서 내려 황제의 후손은 계薊현에, 요임금의 후손은 축祝, 순임금의 후손은 진陳에 봉 했다. 어거에서 내려 하후씨 후손은 기杞, 은의 후손은 송宋에 봉했다. 사람을 태행산에 보내 상용을 다시 (지도자로) 세워 상나라의 서민을 다스리게 하려 했스나, 상나라의 지도층이 주왕(紂王) 제신의 아들 무경(武庚 祿父)를 추천 했다… 군마를 방목하고 무기와 병거를 창고에 넣고 다시 사용하지 않았다…]
상용이 갔던 곳은 연산역(連山易)의 발생지인 유목민의 은신처 태행산맥이다. 전한기에는 “單于仰視商容貌” 란 문구가 있 다 . 그 곳에 기자가 갔다는 조선이 있었 어야 한다.
사기 하 본기에 이러한 시실을 은미하게 기록 했다: 맹자와 意林에는 陽를 陰이라 했다.
[夏本紀:益讓帝禹之子啟,而辟居箕山之陽]. [孟子萬章上: 益避禹之子於箕山之陰]
상서에 실린 우리양곡(嵎夷 暘谷), 즉 삼국유사에 실린 “阿斯達”을 다른 글자로 표현 했다.
기자가 갔던 조선은 옛적에 단군왕검 살던 곳이였다.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산서성이 분명 하다. 또한 백익이 단군왕검이란 추리가 합당하다.
상용이 살던 곳에 송미자를 봉했다. 삼황의 후손을 봉했다는 장소와 글자에 풀이가 분분하다 .
설문해자에는 상나라 첫 시조 글/계/설(契,卨)이 살던 곳 상곡에 봉했다. 초씨역림에도 실린 곳이다. 전한기에 한무제 조선 침략 이전 기록에 [선우 좌현왕이 살던 곳으로 북쪽은 예맥조선과 접했다]고 했다 . 상용이 갔던 곳은 태행산맥이 분명하다.
“𨜒:周封黃帝之後於𨜒也。从邑契聲。讀若薊。上谷有𨜒縣”
글자 하나라도 틀렸다면 천량을 주겠다고 발표한 여시 춘추에는, 상나라 사람들이 힐책하여 서주무왕이 울었다고 했다. 수습책으로 삼황의 후손을 봉했다는 지명이 전여 다르다 .
예기에 실린 수습책은 유가의 위선적 해석이다. 같은 문구를 어느 누가 사기에 옮겼다.
箕子가 갔던 조선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산서성에 있었다.
끝.
December 11, 2019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