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백제 중시조 고환 (高歡)의 혈통- 2: 陳留高氏:
필자는 고환 (高歡, 賀六渾; 496년 ~ 547년)이 북제의 기반을 닦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고유명사 xx가 xx에 있다는 기록을 다른 사서에서는 xx란 고유명사가 없다. 고환의 선조를 알수 없이 기록 했다.
사고전서 천하비 록(天下碑録)에 나타났던 옹구현에 한집금오 고포비 (漢執金吾高襃碑)가 있다. 옹구현 일대에 高氏碑가 있다.
漢執金吾高襃碑〈在雍丘縣南五十里善鄉墓下〉
漢太尉髙峻碑〈在雍丘縣〉
고부고준(高裒,高峻)이 마땅히(應該是) 진유고씨(陈留高氏)의 선조라고 했다. 통전 병서 탈적심계(通典 兵十四 奪敵心計)에 따르면 그는 후한 초기 사람이다 . 발해 고씨(渤海高氏)와 혈연 관계가 있다는 진유고씨(陈留高氏) 를 입력하니, 원소와 고간(高干, 高幹)이 나온다. 글자를 이리저리 돌렸다.
고간(高幹)을 “高干,高固” 이라 했다. 그 고씨가 간(諫) 했다는 뜻이다. 그들(高氏)이 옹구현 (雍丘县)에서 조조에 간(固)하여 진을 치고 살았다. 그 곳에 남아 있서 진유고씨 (陣留高氏)라 했다. 옛적에 상나라의 충신 부열 (Buyuel傅說. 傅說 Fùyuè )이 살던 곳이다. 부열이 와전 되여 부여(夫餘, 扶餘)란 고유명사를 만들었다. 후한시대 어린 허수아비 황태자가 많았다. 그를 보살핀 태부 (太傅, Chamberlain ) 또는 상시(內侍,常侍)란 황실관리 직이 생겼다 . 환관宦官이라고 불렀다. 발해 고씨 고부 고범(高裒)이 그러한 중책(漢太傅) 을 맡았다 . 조조 또한 환관의 아들이라 한다. 고범(高梵)이란 고유명사가 아니라 그들이 착실한 불교 신자란 뜻이다.
한무제 때에 밀려 북쪽으로 도망 갔다. 두 세력의 경계선이 사기와 삼국지 동이전에 실렸다. 산해관 이남 이다 .
남쪽 담당 선우 어부라(於夫羅, 150-194)의 동생 호주천(呼廚泉)이 황실에 들어와 내시와 가까운 사이가(遂留內侍) 되여 세력이 강해졌다 . 외척과 환관의 비행으로 황건봉기(黃巾賊亂) 가 나타났다. 하북에서는 동탁과 원소가 공을 세워 황실의 신임을 받았다.
원소(袁紹:154-206)와 고간(高干, 高幹)의 관계가 삼국지 무제기에 실렸다 . 고간의 후손 혈통이 [https://www.wikiwand.com/zh-sg/%E9%AB%98%E5%B9%B9]에 있다.
삼국지 고유전과 원소전에도 실렸다. 고유의 종형으로 원소의 생질이다. 고유(高柔, 174 ~ 263)는 진류에서 말을 관리하던 사람 (陳留圉人)이다. 연왕이라고 자창 했던 공손연(公孫淵: ? ~ 238년) 의 황(兄晃)과,숙부 공손공을 내시(叔父恭任內侍)로 임명 했다 . 그들이 반역 했다. 고유가 간하기를 “제가 엿듣기로는 공손황의 선조가 수차례 귀순하여 진류(陳留) 에 살던 화근 흉족입니다”라고 했다. 고유, 고간, 공손연은 모두 남만주 서남쪽에서 내려온 흉노족 남선우의 후손이다. 공손연(公孫淵)이 숙부 공손공을 몰아내고 정권을 강탈하였다는 풀이는 낭설이다.
고간(高干, 高幹)의 고조가 고고 (高祖父辈; 高固,生活于王莽时代)다. 전후한 혼란기 사람이다. 전후한 혼란기 사람을 후한 말기 원소의 외척 (袁紹以甥 高幹) 으로 바꿨다. 고간이 병주목(高幹領并州牧)이 되었다. 원소전에는 진유고간 (陳留高幹)이하 했다. 원소가 왕염 (王琰)을 시켜 생질 고간을 죽였다 . 오환(烏丸)의 영역에 피해 왔단 원소의 두 아들 상과 희(尚 熈)가 그 곳 터주대감 공손강(公孫康) 을 죽이려 했다가 공손강이 선수를 처혀 죽었다 .
진수는 무제기에 한말의 상황을 설명 하면서 [잡을 람자, 또는 가질 람 (擥) 자와, 신하 신(臣)를 글자의 음을 따서 “擥申、商之法術”해한백의 기발한 계책“該韓白之奇策”란 문구를 썼다. 간웅과 영웅의 변 (奸雄與 英雄之辯) 이라 풀이 하여 후대 사람들도 많이 인용 했다.
삼국지에 실린 고고(高固)와 고유(高柔)가 후한서에는 없다. 통전에 있다 .
원소의 생질이었던 병주목 고간(高幹)이 공손도다. 도의 아들이 공손강 (公孫康)이라고 했다. 어떤 사서에는 公孫度와 강을 같은 사람이라 했다.
진서(晉書)에는, 공손강(公孫康)의 아들이 공손연 문희(其子康、康子文懿) 라 했다 . 그러나 다른 사서에 공손도가 부여왕 위구대의 사위가 돠여 동이의 강국을 만들었다는 부여국 설명에는 공손도란 이름이 없다.
당시의 기록을 남긴 여러 사료를 종합해 보면 공손도의 실체가 불확실 하다.
후한서 독행 열전에 실렸다. 황건당과 동탁의 란을 피해 公孫度가 현토 땅에가서 원주민과 사이 좋게 78세 까지 살다 219년에 죽었다 . 후한서 선비열전에 공손강(公孫康)이 원상을 잡았다 .
앞서 발해고씨를 진유고씨라 했던 진유(陳留)란 글자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한 효헌제 유협(漢 孝獻帝 劉協, 181년 ~ 234년)이 받은 칭호 다 . 그 때에 십상시 황실 관료의 비행이 주 원인이 되여 장각이 이끌던 황건적의 난이184년에 발생하여20년 동안의 전란 수습으로 군웅이 활거 하던 삼국시대가 되었다.
한무제 때의 제상 공손홍이 봉지로 받았다는 천진만 일대가 그들의 본거지 였다. 즉 비류의 미추홀이 있던 곳이다. 전한의 공손홍의 아들 공손도를 후한 말기 사람으로 둔갑 시켜 대륙백제 시조 비류의 혈통을 도용 했다.
끝. May 8th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