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단군왕검 살해 사건.
필자가 고조선의 발생지와 단군왕검이 홍산문화권에서 내려온 동이수령 백익(伯益)이라고 논증 했습니다. 이는 오랜 시간동안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서 앞서 설명 드린 절차적 삼단론법이란 세로운 역사 연구방법에 따라 결론을 내렸습니다.
앞으로 몇차례에 걸쳐 朝鮮이란 이름이 오늘의 만리장성 이남에서 언제 어디에 수도를 두었다가 만주로 올라 왔는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그후 삼한의 후예들이 뱃길로 흐터져 나간 경로를 설명하겠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인식치 못하여 그릇들 풀이 합니다.
단군왕검의 뒤를 이은 후계자가 누구인가는 아직 밝히지 못했습니다.
융우의 아들 개(啟)이 지도자 백익을 살해 하고 하(夏后帝啟, 夏后啟)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 사건은 역사서가 아닌 중국문헌 여러 곳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춘추삼전, 국어, 상서, 맹자와 사마천은 백익을 살해 했다는 사실을 숨겼서요.
사마씨가 정권을 잡은 이후 279년에 발굴된 급총죽간 문헌에 “益乾啟位, 啟殺之”란 문구가 보입니다. 왕중왕이 된 백익이 개를 제후(乾啟)로 임명 하니, 개가 백익을 죽였습니다. 죽간 내용은 모두 위나라 역사서(蓋魏國之史書)라고 하는 단군조선의 초기 역사 기록입다. 하왕조부터 주 유왕 까지는 편년체로 적고, 그 공씨 가문의 수장 화가 집정 하다가 선왕이 이어 받아 중흥을 이루었다지만 그는 말냔에 피살 당하고 서주는 몰락 합니다
[1].
[1].史記 魏世家: 三十四年,安釐王卒,太子增立,是為景湣王。信陵君無忌卒. 晉書 蓋魏國之史書: 初,太康二年,汲郡人不準盜發魏襄王墓,或言安釐王冢,得竹書數十車。其《紀年》十三篇,記夏以來至周幽王為犬戎所滅,以事接之,三家分,仍述魏事至安釐王之二十年。蓋魏國之史書,大略與《春秋》皆多相應。其中經傳大異,則云夏年多殷;益乾啟位,啟殺之;太甲殺伊尹;文丁殺季歷;自周受命,至穆王百年,非穆王壽百歲也;幽王既亡,有共伯和者攝行天子事,非二相共和也。
그후 제후국 진이 셋으로 갈라지고 전국시대에 이르러 안희왕(安釐王) 27년 까지의 기록이 실렸답니다. 그 기록은 고조선 역사가 분명 합니다.
더더욱 옥중에 가쳤던 단군왕검의 어명이 요사(繇辭)에 실렸습니다.
그 내용이 (항간에 전해오던 소문과는)다르다(繇辭 則異).중국 문헌에는; 요(繇) 주문 주(籀), 사(辭)는 말씀 사 (詞)라고 설명 합니다.
亦作“ 繇詞 ”。卦兆的占詞。繇,通“ 籀 ”
요사(繇辭)는 상나라가 (산서성에서) 천도하기 이전, 여러 왕들의 노래와 숭덕을 기록한 내용이다. 개(乾啟)가 즉위하고 한창 번영하던 시절에 회계염(鹽)현 (會稽剡縣) 사람이 우물에서 길이가 7촌 2분 되는 종를 찾아 냈다. 그 종에 고문 上有古文奇書十八字18자가 있었다. “회계악명(會稽嶽命)이외 글자는 당시 사람들이 판독하지 못했다” (당대의 석학) 곽박이 보기에는 (郭璞曰) 해왕(蓋王)이 만든 작품이다. 아래 글귀는 서진 초기에 전해오던 산해경의 자료를 모아 주(註)를 달았다는 곽박이 한 예기(郭璞曰)다 :
<햇님의 후손 지도자(蓋王)가 회계산 정상에서 내린 명이다. 틀림없이 영부(靈符), 즉 “자신의 속 마음에서 약동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천서”의 뜻이 있다.변방의 옥에 가친 천인지심 (塞天人之心)은 여신물합계 (與神物合契)라 연후에 가이 언수명(言受命) 이리라. 개(啟)가 종을치며 진능(晉陵)에 왜치는 소리가 회계에 들려온다…. (天人之際不可不察)천심이 인심이라 꼭 알려 지리라. 해왕은 과연 심중 하시구나>
한학을 많이 하신 분들이 요사(繇辭)의 내용을 깊이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백익 살해 사건은 애국시인의 대명사로 치는 굴원(屈原)의 초사 이소 (離騷)와 하늘에 물어보라는 뜻의 천문(天問)에 그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급총 죽간이 발굴된 이후에 백익을 추모하는 백충장군 현령비 (百蟲將軍顯靈碑)가 백익을 저 늙은이 란 뜻글자 이기씨(伊耆氏)가 살던 마을을 지나는 이수 (伊水) 연안에 세웠습니다. 비문 내용에는 “碑云:將軍姓伊氏,諱益,字隤敳,帝高陽之第二子伯益者也”가 있습니다. 백익은 서쪽에서 와 홍산문명을 남긴 전욱 고양씨의 후손으로 밝혀 졌습니다. 백충장군이란 백의민족의 지도자란 뜻을 비하하여 적은 글자 입니다. 춘추 좌전에 隤敳 란 글자가 전욱 고양씨의 아들 중에 하나로 실렸다. 이 비문이 알려 지기전에는 그 글자가 누구를 뜻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전형적인 춘추필법이다.
이 백익 살해 사건은 청나라 말기 신해혁명 이후에 북경 대학 교수로 있던 고힐강(顧頡剛; 1893-1980)이 이끌던 의고파(擬古派)에 의해 재기 되었다가 그는 영창 생활을 했다.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선포한 시기에 청동기를 사용 했다. 문자가 있었다. 그를 후대 사람들이 판독 할수 있었다. 역사 시대라 정의 함이 마땅 하다.
단군왕검의 뒤를 이은 후계자가 누구인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수도연안에 天毒이 살던 곳에 있던 사람들이 지도(산해경, 각종 기록)를 들고 북쪽으로 올라가서 匈奴國을 새웠다.
올라 가서는 그곳에 살던 Scythian 과 갈등이 있었다. 난공불낙의 요새를 설치하고 오랫동안 나라를 長安國家 이끌어 갔다. 그러면서 일부는 옛 구주땅으로 내려 오고 동남쪽 하북평원에 있던 상나라와도 겨루었다. 결국 상나라 왕을 매수하여 상나라가 와해 되었다. 이 상황이 상서에 실렸다. 해지연안에 살던 사람들이 내려와서 天毒降 재앙이 은나라 땅을 뒤덥었다災荒殷邦 고 상말의 재상들이 말했다. 역림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고조선의 귀신 같은 제후鬼侯 가 뇌물을 바쳐 俞賄 상나라 왕이 방어진을 풀었다商王解舍라 했다. 각종 사서에는 달기妲己란 미인 요녀를 바쳐 상나라가 망했다고 했다. 산서성 일대 역사를 기록한 진어(晉語) 에는 미녀의 혈통을 소씨 蘇氏以妲己라고 했다. 전한 시대 유향이 쓴 열선전 유백자(列仙傳 幼伯子)가 소씨의 객이 예맥족이라 했다. 그 문구가 한글 어순 이다. 달기는 당시 유목민이였던 고조선 여자였다. 그 사람들이 춘추 전국시대에는 해하 수계에 살았다. 살던 마을에는 천신께 제사를 올리던 소도 (蘇塗)가 있었다. 소도가 있던 곳이 천진 당산 일대다. 신라의 향가 會蘇曲이그 곳에서 나타났다.
끝
September 26, 2020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