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 허황후 화랑 가야금
논란이 많은 이유는 [고조선의 후예들이 금미달(今彌達)에서 발해만으로 내려와 여러 소읍 국가를 세웠다, 점차로 한해의 동서 연안을 따라 해안으로 흐터 졌었다[는 사실을 멀라 이러한 잘못이 나타났다.
중원 동해안으로 내려 갔던 삼한의 후예가 강남에서 동남아 해안에 정착 했다. 진서와 책부원귀에 [금미달에서 떠난 사람들이 남중국 해안 4000 여리에 걸쳐 신미제국(新彌諸國) 20여국을 이루고 살았다]고 했다. [1] 이를 송서등 남조 역사서에는 왜 백제 신라 임나가라 진한 변한 “倭百濟 新羅 任那加羅 秦韓慕韓” 일곱 나라는 왜왕이 다스렸다고 했다. 이에 실린 삼한의 “秦韓慕韓” 은 삼국지 동에전에 실린 글자다. 이들이 동남아 해안에 이르러 그 곳에 번성 했던 남방불교를 강남에 전했다.
남조 사서에 실린 같은 나라 이름자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년 ~ 412년)비문에 실렸다. 대왕의 주 목적은 할아버지를 살해 했던 왜(倭)로 기록된 백제세력 토벌 이었다. 압록강을 너머 한반도에 출병(出兵)할 이유도 뚜렸간 기록도 없다. 중원 기록에는 백제 온왕에 관한 기록이 없다.
관구검이 고구려 환도성을 점령 할 때 까지, 홍산 문화권의 동남지역, 남만주는 중원 사가의 시각에서는 알수 없었다. 그에 앞서 전국 시대 장성을 쌓은 금미달 에서 부터 해하 수계에 관한 기록 또한 혼미하다.
한반도 지명과 역사는 잃어버린 또는 중국에 빼앗긴 기록에 있었다고 본다.
진수가 중금증을 풀려고 통역관을 통해 남만주 노인들에게 한해 동쪽 끝이 어디 인가를 끝까지 추궁 했다. 하여 한반도 서남 해안에 관한 지명은 별로 없고, 일본구주는 자세하게, 더 내려가 유구까지를 막연히 기록 했다.
삼국사기에 모르겠다는 지명이 수없이 많이 있다. 통일 신라 이후에 정한 이름이 고려시대 사관 김부식이 기록 했다. 진수를 출세 시킨 장화의 방물지 (博物志)에는, 대등안령과 한해의 동쪽은 모르겠다고 기록 했다. [2] 광개토 대왕이 불락새(不樂世位)라고 했던 남만주 전국시대에 신라가 479년 경에 수도를 한반도 동남 쪽으로 옮겼다. 서쩍에서 오던 배가 동쪽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잘못 이해 하여 아직도 임나가야 일본부 (任那加羅日本府)라는 잘목된 학설이 논란의 대상으로 나타났다.
간략한 설명
신라 백제 고구려의 거국 초기 부터 고국원왕(故國原王)이 평양성을 지키다 살해된 시대 까지의 역사 기록을 보면 분명 하다.
신라는 말갈, 왜, 등등 여러 주위 국가들로 부터 침략을 받았다. 가야국(加耶國) 수로왕(首露王) 이서국(伊西國) 하는 이름이 신라 초기 발해만 연안에 나타났다. 후에 한반도로 옮겨 졌다. 가락국기에 자주색 실이 내려 다섯개의 알이 내려와 다섯 가야의 지도자(五伽耶之主)가 나타났다. 수로왕이 여섯 가라 연맹체의 수장이 되었다는 가락이란 글자는 내려 왔다는 뜻이 있다. 그가 자리잡은 곳을 자성(茲城)이라 했다. [3]
불교에서 석가모니의 성씨로 쓰던 글자다. 그 기원은 산서성 고조선 영역이다. 이서국 또한 서쪽에서 왔다는 뜻이다. 그때 죽엽군이 나타났다. 모두 서역 에서 온 오손족이다. 그곳에 구자 (龜茲)국이 한나라와 화친을 하여 교류가 왕성 했었다. [4] 대당 서역기에 굴지국 (屈支國)이 옛적 구자국 (龜茲) 이라 했다. 이에서 구지가 (龜旨歌), 구지봉 (龜旨峯), 하지왕 (荷知王), 구지하성 (久知下城) 하는 이름이 금관가야의 수도 김해시에 결부 되었다.
가락국 허황후: 수로왕(首露王)이 허황후를 만난 곳은 구지봉이 있는 오늘의 김해시다. 그곳에 가락국 수로왕의 부인 허씨의 비석이 있다.
가락국과 수로왕은 중앙 아시아에 이르렀던 원시 불교가 육로로 전래된 발해만에 나타났다. 그 당시 발해만연안의 국가들을 백제 설라 휴인 제국 (百濟及薛羅、休忍等諸國)라 했다. [5] 같은 진서 동진 역사 내용에는 백제 임파(百濟、林邑王), 후진 태조 조장(秦武昭帝姚萇;330 – 393)이 신라보 (攻陷新羅堡) 를 공격 했다는 기록이 있다.
가라연맹이 신라와 같이 한반도 남쪽에 정착한 이후 남방해상로를 따라 들어온 남방불교에 결부 시켜 허황후가 나타났다.
허왕후의 선조는 불교 발생지역인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옛 통상로 차마고도를 통해 지나(支那)라고 알려진 운남성에서 이르렀다. 태평광기 에는 신라에 관한 예기가 많이 실렸다. 출처를 당나라 사람 단성식 (段成式) 의 유양잡조 (酉陽雜俎)라 했다. 당시 지나는 당나라 영역이 아니였다. 그는 풍문에 들은 예기를 모아 기록 했다. 내용에는 도깨비방망이 설화가실렸다. 키큰 사람이 사는 나라와 키작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 털보들이 사는 나라 (長鬚國), 코 큰사람 (鼻長)이 사는 사이에 방이(旁㐌)를 시조로 하는 김씨 (金哥)의 신라(新羅)가 있었다. [6] 코끼리와 누애를 치던 곳이었다.
삼한의 후손들이 강남 여러 곳에 정착 했다. 이를 객가(客家)라 한다. 손문(孫文),장개석(蔣介石), 대만 여자 수상 채영문(蔡英文)그 한 본보기다. 대만은 수나라가 대륙을 통잏 한 시기에도 백제 영토였다.
남쪽나라에는 고조선 사람들이 고난을 치루던 예기가 설화로 많이 남아 있다. [7] 항아 (嫦娥)가 궁수 예 (羿,백익)의 불사약을 훔쳐먹고 달에 가서 두꺼비가 되었다. 해 안에는 삼족오, 달안에는 토끼 한마리와 두끼비가 있다는 기록도 있다. 지나 지역에 살았던 도가(道家) 곽홍의 포박자 (抱朴子) 는 남쪽 지역을 설명 하며 원숭이는 5백년을 자라 확(玃, 고릴라?) 이 되고, 두끼비는 3천년, 기린은 2천년을 산다고 했다. [8] 지나(支那)라고 부르던 강남에는 객가 (客家) 라 하던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가락국 수로왕 비문에 새겨진 보주 (普州)는 보자군 (普慈郡) 과 같이 사천성 양자강 (長江) 수계 에 있었다. [9] 허씨는 운남성 에서 해안으로 나와 남방 항로를 따라 원화, 화랑, 풍월주가 나타 나던 시절에 한반도 낙동강 하류에 이르렀다.
가락국기 (駕洛國記)는 고려 문종(文宗,재위: 1046년 ~ 1083년) 때에 김해 지주사가 지었다. [10] 폐허가 되어 밭으로 쓰던 땅에 수로(水路) 를 만들고 물을 넣어 신답평 (新畓坪) 이라 했다. 답(畓)자 가 설문해자에는 없다. 열하일기에 답(畓)자 설명이 있다. [11] 가락국이 있던 밭에 수로(水路)를 만들어 논(畓)으로 제 정리 하면서 만든 글자라 짐욕 (朕欲) 정 치 경도 (定置京都)라 했다. [12]
삼국사기에 나타나지 않는 수로 (水路)란 글자가 삼국유사에 몇차례 실렸다. 성덕왕(聖德王) 때에 강릉 태수로 가던 사람의 부인을 바다에서 나타난 용(龍)에게 잃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해가(海歌) 를 불렀다. 그 내용에 [거북아 거북아 어서 수로 부인 (水路夫人)을 내놓아라 (龜乎龜乎 出水路) 하는 구절이 있다. 꽃을 따서 수로부인에게 바쳤다는 헌화가 (獻花歌)도 이 때 나타났다. 한국에 없는 사자상을 실은 배로 우산국을 정벌 했다. 그 곳 원주민은 북쪽에서 해류를 따라 표류해 정착 했던 사람들이 살았다. 모두 음과 뜻을 이리저리 돌려 만든 글자들이다.
신라 말기 경덕왕이 석도안 (釋道安) 을 존경 하여 도안현(道安縣) 이라는 이름을 그곳에 남겼다. 가라국왕 하지 (加羅王荷知) 가 살던 곳에 수로 (水路) 를 만들어 가야금 노랫가락이 들리는 가락국 (駕洛國)수로왕 (首露王) 이라 했다. 김유신의 12대 선조가 수로왕이다. 그가 어서 왔는가는 아무도 모른다.일설에는 소호 김천씨의 후예라 한다.
후한건무(後漢建武) 18년에 구봉 (龜峰)에 올라가 가락(駕洛)의 9촌 (村)을 바라보고, 드디어 그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라 하였다. 후에 금관국 (金官國)으로 고쳤다. [13] 고조선 발생지 구주(九州, 九疇)의 뜻을 살려 구지봉에 올라가 내려다 본 광경을 “망 가락 구촌 望駕洛九村” 이라 했다. 일본에도 구주란 글자가 나타났다. 김유신의 증조를 구해 (仇亥) 손이라 했다. 신라 세력에는 원수와 같은 존제 였다는 뜻이다. 가라연맹은 고구려와 같은 유목민(亥, 解, 蓋)이 였다.
진흥왕 때에 나이 십오륙세 였던 젊은 화랑 사다함 (斯多含)이 압장서서 전단량 (旃檀梁), 즉 구름다리 건너 정문으로 들어가 깃발을 꼿아562년 에 가야국(加耶國)을 정벌 했다. 가라(加羅 加耶)언어로 성문, 즉 사원으로 드러가는 곳에 세워 놓은 여문(閭門Torii)을 (다리 양梁 구름운)양운이라 했다. 그 위에 신라 화랑의 깃발을 달았다. [14] 갑작스런 친입에 성은 아수라 장이 되었다. 백제의 담로 (簷魯) 였던 구지하성 (久知下城) 이다. [15] 지나 라고 하던 강남에 살던 먼곳에서 온 이방인 (遠夷) 하지왕 (荷知王)이 남제(南齊) 에 사신을 보냈던 곳이다. [16]
[담로 (簷魯)란 대륙백제, 즉 북제(北齊, 高齊)의 관어였던 산동성지방(齊魯之間)의 언어를 잘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살던 지역이란 뜻이다. 2/18/2024]
맺음 말
백익을 잃은 고조선의 한 부족, 사 또는 시(斯)라고 부르던 예맥족 사람들이 운남성 으로 밀려 갔다. 그곳에서 히말리아 산맥 동쪽 수지 (隨地;따지,땅)에 정착 하여 원시 불교가 나타났다.사천성을 지나 운남 지역에 정착 했다. 그 지역 도사(道士)들이 옛적부터 알려진 길을 따라 올라가, 히말리아 산맥 동쪽 수지(隨地)에 천부경을 전했던 곳이라 인도 (印度)라 했다. 그곳에서 원시 불교가 나타났다. 같은 길을 따라 내려와 지나 (支那) 방대한 지역에 불교가 전파 되었다. 마술사 시라 (尸羅)가 전국시대 연나라 수도에 불상을 갖고 와서, 불교 문화가 해하(海河) 수계 상류 임유관 (臨渝關) 일대 금미달 (今彌達)에 알려 졌다. 금미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만주 땅에 북부여가 나타났다. 그때에 고조선의 사제권이 부여씨에게 너머갔다.
해하(海河) 수계 상류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이 맥군 남려(薉君南閭)를 따라 발해만 일대로 내려와 왔다. 이를 창해지군 이라 했다. 그곳에 부여의 혈통을 지닌 비류가 정착 했다. 그 곳에 살던 삼한 사람들을 한(可汗, 韓)이 다스렸다. 삼한의 한 부류를 왜(倭) 라고 했다. 왜오왕이 다스리던 부족이 동남아로 내려가 운남성 에서 매콩강 을 따라 내려온 사람들과 같이 지나 (支那) 땅에 여러 불교 국가를 이루었다. 사마씨가 강남으로 이주한 이후, 동남아 해안을 따라 남방 불교가 광동성 해안에 전래 되었다. 그 곳에서 해안을 따라 발해만 일대에 전래 되여 설라 휴인 (薛羅,休忍)이라 하던 이름이 신라 (新羅), 임나 가라 (任那加羅) 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남만주에 있던 신라와 금관가라는 광개토 대왕 이후에 한반도 남쪽으로 수도 를 옮겼다. 황해의 남방 해로가 개발된 후에 남방불교가 한반도로 전래 되여 신라를 부흥 시켰다. 동남아에 있던 작은 왕국 신라의 공주 화랑 (Farang) 이 남자로 바뀌어 제주도에 하루방으로 나타났다. 동남아 섬나 (Siam)와 음이 비슷한 이름이 대만(𨈭牟羅) 과 제주도에 붙었다.
동남아에 있던 신라 공주 화랑에서 호랑도란 이름이 나타났다. 가락국 수로왕 부인 허황옥이 공주 화랑이었다. 진흥왕 23년(537년) 에 나마신득 (奈麻身得)이 신무기 포노(砲弩, cross bow)를 만들었다. 사다함 (斯多含) 의 화랑도가 백제의 부용국이었던 김해 가야국 (加耶國, 駕洛國)을 정벌 했다. [17] 가락국 음악기 가야금을 우륵이 신라에 전했다. 허황옥의 딸이 신라 선덕 여왕 이다. 신라 귀족 출신 원광 스님이 불교의 세속오계를 근간으로 화랑 오계를 남겨 신라 젊은이의 가치관이 확립 되었다.
양자강 하류 남경 일대에 있던 백제 수도 거발성 (居拔城)이 549년에 점령 당했다. 대륙북제와 강남에 있던 진(陳) 나라를 수나라가 병합하던 시절에 중원세력이 만든 큰 배가 백제 영역이 었던 대마도에 표류 되었다. 그때에 처음으로 중원 세력이 황해의 남쪽 항로를 따라 한반도 남단 항구를 지나갔다. 그 곳을 백제의 부용국 이었던 금관가라를 도사마국 (都斯麻國) 이라 했다. 가락국왕 하지 (荷知)의 수도였다. 구자(龜玆)국에서 왔다는 뜻에 경남 진해시를 구지하성 (久知下城)이라 했다.
일본 영역에 여관 (許家)이 많은 섬나라 일지국(一支國)이 있었다. 대마도 와 일지국 사이가 현해탄이다. 대륙을 잃는 열도백제 부여씨 왜왕이 603년 에 사신과 함께 스님 10여명 을 수양제에게 보네 불경을 배우도록 했다. 일본이란 이름은 화랑도 였던 김춘추가 백강 전투에서 왜를 물리치고 고구려 마저 흡수한 뒤에 나타났다. 왜가 혼슈 동쪽에서 두번째 혼(魂)이란 뜻의 니혼(日本; 二夲) 이란 새 나라를 세우고 670년에 신라에 알렸다. 그후 당나라에 알렸다. 문무왕은 구주에 사는 왜의 침입이 우려 되여 동해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겨 문무왕 무덤으로 알려진 대왕암 (大王岩) 이 울산 앞 바다에 있다.
불교가 강남에 전래된 시기에 있던 신라 임나가야 (新羅 任那加羅)라는 이름자가 남방불교를 따라 발해만 연안에 이르러 광개토대왕 비문에 같은 글자로 실렸다. 옛 한국어를 음역한 글자를 잘못 풀이 하여 불교경전 대루탄경에 실린 글자 또한 옳바로 풀이 하지 못하여 여러 차례 바꾸었다.
임나(任那)는 의역(意譯)이요 가라(加羅)는 음역(音譯)한 글자다. 신라는 음과 뜻을 섞어 여러 글자로 표기 했었다. 오늘 신라(新羅)라고 쓰는 글자는 김일제 후손이 살던 지역에 불교가 번창 했던 시기에 나타났다.
중원 세력은 수양제 때에 처음으로 벅건성에서 한반도 남단에 이르는 [대륙백제 사람들이 개발한]해상로를 따라 낙동강 하류를 지나 구주를 방문했다. 활화산을 불교 유래에 나타나는 아수라장 같다 하여 아소라 라고 붙였다. 수서에 신라 백제 가야 연맹이 불교를 일본에 전해서 문자가 없던 왜가 강국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8]
이렇게 번역이 잘못 된 사실을 일본 열도 사람들이 아전 인수격으로 풀이 하여 임나가야 일본부 (任那加羅日本府)라는 낭설이 나타났다.
January 15th, 2023.
끝
[1]. 晉書 列傳第六 衛瓘 張華 劉卞: 撫納新舊,戎夏懷之。東夷馬韓、新彌諸國依山帶海,去州四千餘里,歷世未附者二十餘國,並遣使朝獻。於是遠夷賓服,四境無虞,頻歲豐稔,士馬彊盛。冊府元龜:晉張華為都督幽州諸軍事領護烏桓校尉安北將軍撫納新舊戎夏懷之東夷馬韓新彌諸國依山帶海去州四千餘里歷世未附者二十餘國並遣使朝獻,於是遠夷賓服四境無虞頻歲豐稔士馬強盛。
[2]. 博物志:北廣遠, 中國人鮮有至北海者。漢使驃騎將軍霍去病北伐單于, 至瀚海而還,有北海明矣-
[3]. 三國遺事: 伊西國人來攻金城.金官五伽耶按駕洛記贊云。垂一紫纓。下六圓卵。五歸各邑。一在茲城則一為首露王。餘五各為五伽耶之主。金官不入五數當矣。而本朝史略。
[4]. 前漢紀 孝宣皇帝紀二:龜茲王及其夫人來朝。龜茲夫人。即烏孫公主女也。自以得尚漢外孫.大唐西域記: 屈支國。東西千餘里。南北六百餘里。國大都城周十七八里. 屈居勿反支國舊曰龜茲。
[5].晉書:分遣使者徵兵於鮮卑、烏丸、高句麗、百濟及薛羅、休忍等諸國,並不從. 十六國春秋: 鮮卑烏丸高句麗百濟新羅休忍等諸國遣兵三萬助北海公重戍薊諸國. 三國志:弁辰安邪國、弁辰瀆盧國、斯盧國。弁、辰韓合二十四國。辰王常用馬韓人作之。辰王不得自立為王。。
[6]. 太平廣記 新羅: 新羅國有第一貴明鈔本「貴」作「國」。族金哥。其遠祖名旁㐌。有弟一人,甚有家財。其兄旁㐌。因分居,乞衣食。國人有與其隙地一畝,乃求蠶穀種于弟,弟蒸而與之。旁㐌不知也. 他日有中旨,令與一官謫去,特授長江縣尉,稍遷普州司倉而終。
[7]. 論衡 說日: 儒者曰:「日中有三足烏,月中有兔、蟾蜍。」
[8]. 海國圖志 卷五: 東南洋一海岸之國. 萬國地理全圖集》曰:四大地之中,亞齊亞最廣大。大地北極出地二度,至七十八度,英國中線偏東。南及印度海,有東京、暹羅、北耳西海隅。
[9]. 舊唐書:普州中隋資陽郡之安岳縣。武德二年,分資州之安岳、隆康、安居、普慈四縣置普州.
[10]. 隋書:平陳之歲,有一戰船漂至海東牟羅國,其船得還,經於百濟,昌資送之甚厚,並遣使奉表賀平陳.其南海行三月,有牟羅國,南北千餘里,東西數百里,土多麞鹿,附庸於百濟.。
[11]. 熱河日記:「所謂畓洞 以其長時沮洳 故我人所名云 畓本無字 我東吏簿水田二字合書作會意 借音沓
[12]. 三國遺事: 朕欲定置京都。仍駕幸假宮之南新沓坪是古來閑田。新耕作故云也。畓乃俗文也.
[13]. 三國史記: 金庾信,王京人也。十二世祖首露,不知何許人也。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登龜峯,望駕洛九村,遂至其地開國,號曰加耶,後改為金官國。其子孫相承,至九世孫仇亥仇充,或云仇次休,於庾信為曾祖。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故姓金。庾信碑亦云:「軒轅之裔,少昊之胤。」則南加耶始祖首露與新羅,同姓也。
[14]. 三國史記:異斯夫或云苔宗。姓金氏,奈勿王四世孫. 異斯夫,襲加羅一作加耶。國. 先入●檀梁●檀梁,城門名。加羅語謂門為梁云。其國人,不意兵猝至,驚動不能禦,大兵乘之,遂滅其國
[15]. 北史: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強國。初以百家濟,因號百濟。其都曰居拔城,亦曰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城,東方曰得安城,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王姓餘氏,號「於羅瑕」,百姓呼為「鞬吉支」,夏言並王也。三國志 倭人傳於羅屬大秦,其治在汜復東北,從於羅東北又渡河,斯羅東北又渡河。斯羅國屬安息,與大秦接也。
[16]. 南齊書:加羅國,三韓種也。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為鎮東大將軍.
[17]. 三國史記 新羅本紀:奈觧尼師今立,伐休王之孫也 加羅王子来請救。王命太子于老與伊伐飡利音将六部兵往救之. 于勒所製十二曲:一曰下加羅都,二曰上加羅都. 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時人請奉為花郞,不得已為之。眞興王命伊●異斯夫,襲加羅一作加耶國。
[18]. 隋書:平陳之歲,有一戰船漂至海東牟羅國,其船得還,經於百濟,昌資送之甚厚,並遣使奉表賀平陳.其南海行三月,有牟羅國,南北千餘里,東西數百里,土多麞鹿,附庸於百濟. 隋書: 倭國.無文字,唯刻木結繩。敬佛法,於百濟求得佛經,始有文字。知卜筮,尤信巫覡. 新羅、百濟皆以倭為大國,多珍物,並敬仰之,恒通使往來。 隋大業三年,其王多利思比孤遣使朝貢。使者曰:「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故遣朝拜,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其國書曰「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帝覽之不悅。
January 15th, 2023.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