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秦漢) 혼란기
선사 시대 부터 중원 땅에 예맥 (濊貊. 斯)이라 살았다. 산서성(山西省, 隸省)에 있던 제후국 진(晉) 나라가 “조위한 趙 魏 韓”셋 으로 분열 되여 이때 부터를 전국 시대 (戰國時代,기원전 476년 또는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1년 )라 한다. 전국칠웅이 다투던 중원을 진 시황제(秦始皇帝)이 기원전 221년에 통일 했다.
맹자(孟子; 기원전 372년?~기원전 289년?)가 양혜왕(梁惠王) 을 만나 대화를 했다. 그 무덤이 279년에 도굴했다. 모두위나라 역사서 (蓋魏國之史書)라 했다. 발굴된 죽간 문헌에 “益乾啟位, 啟殺之”란 문구가 나타나 우(禹)의 아들 개 (帝啟) 가 단군왕검 백익을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 졌다.
이 위나라 역사서를 근거로 많은 역사서가 편술 되었다. 그 하나가 일연 스님이 인용한 위서(魏書云)다. 스님은 배구(唐裴矩傳)의 말을 인용하여 고죽국이 금미달 영역에 있었다는 취지의 기록을 남겼다. 수양제와 같이 돌궐가한을 찾아갔다가 고구려가 임유관 전투 (臨渝關戰鬪)을 일으킨 이유를 묻는 수양제의 질문에 답한 문구다. 고죽국이 있던 임유관 일대가 한때는 연(燕)의 영역이었다. 연 소양왕 (燕 昭襄王 , 재위 : 기원전 311년 ~ 기원전 279년 ) 7 년에 천축국 도술인 시라 (尸羅)가 불상을 들고 연도(燕都)에 나타났다. 금미달 영역에 중산국 이라고도 부르던 고죽국이 있었다.
전국칠웅(戰國七雄) 중에 고조선 영역에 나타났던 연(燕)와 제 (齊)나라가 마지막으로 진(秦)나라에 흡수 되었다. 북쪽에 장성을 쌓고, 궁홀산(弓忽山) 요새를 안문관(雁門關)이라 했다. 두루미(彌) 자를 기러기 안(鴈 雁)자로 바꾸었다. 금미달(今彌達)에 살던 단군을 불가에서는 아왕 (鵝王), 안왕 (鴈王), 미륵불 (彌勒佛)이라 했다. 불교 사원을 안당 (鴈堂)이라고도 한다. 아왕(鵝王)이란 내가 삼족오(三足烏)를 숭상하는 사람들의 왕이란 뜻이다.
진시황 송덕비문을 남긴 이사(李斯) 는 한거중국 (韓居中國) 이란 문구를 남겼다. 전국시대 부터 유목민이 었던 예맥 (濊貊. 斯)족이 해안으로 나와 해상권을 장악하여 동북아시아 바다를 해한(韓汗, 澣海, 翰海) , 翰海 )라 했다. 송나라때 편찬된 광운에는 예맥 부여국명(濊貊夫餘國名)이란 문구가 있고, 부여를 백제의 성씨라 했다. 예맥 (濊貊. 斯)족이 중원 전역에 흩어져 살았다는 증거다.
제자백가 이외에 불가의 기록에도 고조선 역사가 실려 있다. 산서성 대현(代縣) 북부에 있던 궁홀산 (弓忽山) 금미달을 떠나 아사달에 돌아가 산신이 되었다는 마지막 단군은 마땅이 연구 되어야 한다.
산서성 대현(代縣) 불교성역 오대산 (五臺山)서쪽 “호타하 즉 쌍간하”가 흐르는 계곡이 금미달 영역이었다. 맹자 다음에 순자(荀子,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38년?)가 나타났다. 순자가 인용했다는 “ 제자가 스승보다 더 나음을 비유하는 말”이라고 풀이 하는 문구는 삼감 모두다 여울가에 큰 집을 지었다(三藍皆可作澱). 그에 칠한 청색과 쪽풀색을 견주어 “색성승모 (色成勝母) 라 , 즉 새로 칠한 청색이 옛적에 칠한 람색 보다 아름답다” 란 문구를 순자가 청취지 어람 이청어란 (青取之於藍, 而青於藍)이라 했다. 쪽 람(藍)자 삼수 변에 중전 전(殿)자를 붙인 글자(澱)를 설문해자에는 “滓滋也. 滓垽也”라 했고, 각종 사전에 모두 다르게 풀이 했다. 옥편에는 물수변에 사슴록(漉)자 설명이 있고, 검을 흑 변에 궁전 전자 (𪒮)를 붙인 글자는 검은 색(壂, 靛)을 뜻한 글자라 했다. 이렇게 다양한 설명과 글자를 살펴 보면 부여의 마지막 보류었던 금미달 쌍간하 영역을 진시황이 접수한 시절에 천축국에서 온 피부가 검은 (黑) 불승(佛僧)이 와서 기거 했다고 본다. 한국 다음사전에 “澱 앙금 전,얕게 괸 물, 남옥(藍玉)”라 했다. 쌍간하 (桑乾河)가 흐르는 계곡이 수극지벽 (垂棘之璧), 즉 화씨벽 (和氏璧)의 출처다.
맹자에 실린 “柳下惠,聖之和者也”란 문구가 있다. 옥새(玉璽)를 만든 고운 옥돌이 산서성 진(晉)나라에서 나타났다. 산서성에 수극(垂棘)이란 지명이있었다. 전국새(傳國璽)로 쓰이던 화씨벽(和氏璧)을 수극지벽 (垂棘之璧) 이라 했다. 고유 북쪽에 안문 산(鴈門山, 在高柳北)이 있다. 고유란 지명은 조 무령왕(趙 武靈王, 기원전 340년 ~ 기원전 295년) 이 중산국을 점령하고 대군 (代郡)수도에 붙인 이름이다. 그곳 고유에서 내려 와 (柳下) 산동성에 정착 하여 노대부 유하혜(魯大夫柳下惠)라 한다고 인식했다.
성지화의 화자를 화씨벽(和氏璧)으로 오인 하여” 유하혜가 마지막 단군이었다는 오류를 범했다.
마지막 단군을 불가에서는 미륵이라 했다고 논증 했다. 형태가 다른 두 글자로 적는 [푸를 청 (靑真 青) 자와 참 진(真眞) 두 글자] 중에 달월 변에 청자는 불교와 관계가 있고, 한국에서는 “靑,真”로는 기록 한다고 설명 했다. 이렇게 중산국 금미달 지역은 전국시대에도 개적 (夷蓋狄) 언어를 썼다. 언어와 풍속이 다른 지역 역사를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 남긴 기록이라 그곳에 관한 “지명” 은 물론 설명 또한 복잡 하다.
스님이 단군조선 기원을 밝힌 위나라는 황하문명 발상지에 있었다. 위풍보(魏風譜)에는 순임금의 도읍지 (虞舜夏禹所都之地)라 했다. 산서성 영제시(永濟市) 일대였다. 한동안 사라졌다 삼가분진이후 조 한 진이 중산국을 흡수하는 혼란기의 기록에 다시 나타난다. 시경에는 주 선왕(周 宣王,? ~ 기원전 782년) 당시 중산보(仲山甫) 당시 중산보(仲山甫)가 있었다. 기원전 530년에 진나라가 선우국을 정벌(晉伐鮮虞)했다. 중산보(仲山甫)가 살던 지역 사람들이 북쪽 산속으로 올라가 중산국이 되었다.
위공자 모(魏公子牟)이후 위나라가 중산국을 얻어 아들을 그곳에 봉하여 읍으로 했다. 위문후(魏文侯)의 아들이 다스린지 20년만에 호복기사(胡服騎射)란 사자성어를 남긴 조나라의 시조, 조 무령왕(趙 武靈王, 기원전 340년 ~ 기원전 295년)이 북쪽에 있던 중산국(中山國, 기원전 414년 ~ 기원전 296년)을 정벌하고 영토를 넓혔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위(魏: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5년)나라 군주 (魏世家) 이외에 위공자 열전 (魏公子列傳)이 있다. 위공자 위무기 (魏無忌)는 전국시대 위나라의 저명한 군사가로 기원전 276년 신릉(信陵)에 봉해지면서 신릉군(信陵君) 으로 불리었다. 진나라가 조(趙)나라 한단을 포위하자 조나라를 구원했다. 중산국은 위 조 두나라 사이에서 전란을 격었다.
위세가에 “晉亂。而畢萬之世彌大,從其國名為魏氏”란 문구가 있다. 풀이가 다양하다. 필자가 보기에는 시조 필공고 (畢公高)의 최 전성기에 난리가 나서 그 곳 원주민을 다스리던 미(彌)의 세력이 커졌다. 삼가 분진 이후 위 문후(魏 文侯,? ~ 기원전 396년)가 위 (魏)나라의 초대 제후 (재위 : 기원전 445년 ~ 기원전 396년)가 되었다. 이름은 아버지 미(彌)가 지도 하던 예맥(濊貊夫餘國)족을 뜻한 천할 시/사(斯)라 하고, 성은 어머니의 혈통을 받아 희(姬)라 했다.
안리왕(安釐王; ? ~ 기원전 243 년)때에 금미달 (中山國) 지역 일대에서 한 조 위( 韓、趙 , 魏) 세 나라가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아 위(魏)나라가 갖고 있던 옥새(璽)를 영토와 바꾸려는 휴전방안이 나타났다.
혜왕(惠王)이 아사달 지역 대량(都大梁)으로 옮기고 그곳에 추연 순우발 과 맹자(鄒衍、淳于髡、孟軻)를 만나 났다. 조나라 (皮牢)를 정벌 했다. 혜성이 나타났다. 한 낮에 유성이 떨어졌다는 흉조를 남겪다. 혜왕(惠王)의 무덤이 도굴당했다. 그의 생몰 년도가 혼잡 하고 칭호 또한 다양 하다. , 매장자의 이름이 혼잡하고, 어린 추연(鄒衍: 기원전 305~240)이 맹자(孟子:기원전 372년?~기원전 289년)와 같이 위혜왕(惠王) 을 만났다. 어느 누가 가필 했다고 본다.
위혜왕(魏惠王)을 수유(須臾)라 했다: 논형에는 “해와 달의 관계로 나타나는 일식 현상, 혹시 혜왕이 피를 빨아 먹는 기생충을 먹었다면 (或時惠王吞蛭)하는 등등”자연 현상에 비유 했다. 또한, 흔히들 잠깐 동안 이라고 풀이하는수유의 이름(須臾之名) 을 창복지업, 일력 부족 (倉猝之業 日力不足)이라, 즉 서둘러 큰 일을 시작 하여 끝내지 못 했다. 사마천은 수유(須臾)를 명사로 사용 했다. 장자 지북유(莊子 知北遊)편에 수유지 설(須臾之說) 이란 문구가 있다. 위(魏)의 장의(張儀)가 주장한 외교 정책이라 한다. 북쪽에 있던 위혜왕(魏惠王)의 외교정책을 은미 오묘하게 남긴 문구다.
필자는 “古朝鮮 찾기”에서 시경에는 북쪽에 있던 진 연(晉, 燕) 두 제후국 국풍이 없어 만들어 붙인 나라 이름이라고 논증 했다. 제비연(燕)자란 이름이 흘러온 경로는 고조선의 이동 경로와 같다. 연 소양왕 (燕 昭襄王: 재위 : 기원전 311년 ~ 기원전 279년)시절에 불교가 들어왔다. 그때는 마지막 단군이 수도 궁홀산(弓忽山) 금미달 (今彌達)을 떠났다. 가야금을 만든 가실왕이라고 추리한 마지막 단군은 전국시대 산서성 (晉)에서 나타난 조(趙)나라 위(魏 나라 연(燕 ) 나라 역사에 있어야 한다.
위혜왕 (魏惠王)이 마지막 단군이다.
스님이 출처를 밝힌 위서(魏書)는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의 역사서다. 전국시대 위나라가 산서성에 있던 제후국 진(晉)의 영역에서 나타 났다. 금미달이 산서성 대현 일대 라고 논증 했다. 마지막 단군은 전국시대 그곳에 있던 위나라의 어느 왕이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이다. 맹자가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양혜왕 (梁惠王), 즉 위혜왕(魏惠王) 이 마지막 단군이다. 맹자에 실린 내용과, 사기 위세가, 위공자열전 등을 종합해 보면 위나라 3대 군주 혜왕(惠王) 시절에 화려 했던 위 (魏) 나라 세력이 시들어 갔다. 위혜왕 (魏惠王) 방대한 계획을 세우고 쇠퇴해 가던 위나라를 떠나 먼선조가 자리잡안던 아사달 지역으로 내려 갔다. 마음을 굳게 먹고 떠나려는 왕을 말릴수는 없었다. 송별회에서 부른 궁중 아악이 가시리다. 사마천은 수유이예(須臾離禮), 수유지악(須臾離樂)이란 문구를 남겼다. 가실왕의 수상 우륵(于勒)이 주관한 송별회에서 부른 노래를 뜻했다.
가시리 4장 후렴에 실린 “나ᄂᆞᆫ 위 증즐가”는 “대평성대(大平盛代)” 와 같이 당시 훈역 했던 어음 “위 증 증가 (危症增加)를 한글로 기록 했다.
마지막 단군을 수유( 須臾)라 했다:
위혜왕 (魏惠王)이 금미달에서 ( 안읍이 있는 遷都大梁 )아사달에 돌아가 산신이 되었다는 마지막 단군 이다. 위혜왕 (魏惠王)을 수유( 須臾)라 했다. 불가에서는 마지막 단군 미륵보살 이전 단군을 전륜성왕이라 했다. 기자 (箕子) 이름이 서여(胥餘)다. 그를 수유( 須臾)라고도 한다 하여 기자조선(箕子朝鮮)이란 낭설을 만들었다.
유하혜 와 검루(黔婁)가 수유 이전의 단군이라는 학설을 보충 설명 한다.
중국 여러 기록에는 노검루(魯黔婁) 또는 검루 제 은사(黔婁;齊隱士) 라는 현인이 실렸다. 한시외전에는 그를 북방에 별을 뜻한 루(婁)라고 부르는 동물(獸)이 있다고 했다. 고구려, 부여 지역에는 루(婁)자가 많이 실렸다. 환단고기에는 부루 (夫婁) 단군이 있다. 읍루를 옛적 숙진지국(挹婁, 古肅慎之國)이라 했다.
유향(劉向)의 열녀전에는 부인에 관한 기록이 두 곳에 실렸다. 유하혜전(柳下惠妻)에는 부인이 그의 행적을 열거한 글 “陳列其文,莫能易之”을 지었다. 그녀의 글은 아무도 번역할 수가 없었다. 그의 호가 혜(惠, 解, sun )라 했다. 당시 그녀는 금미달에 전해오던 글자로 조사 (妻為之弔辭) 를 작성 했다고 본다.
노검루처(魯黔婁妻) 편에는 [증자(曾子: 기원전 505년~기원전 435년)가 그의 문인들과 같이 빈소에 갔다]는 문구가 있다. 증자가 말하기를 두 부부가 모두 예맥족 (唯斯人也而有斯婦)이라 했다. 검루의 호가 강( 康) 이라 했다. 전한 말기 유향(劉向, 기원전 77년 ~ 기원전 6년)은) 검루(黔婁) 선생과 유하혜 (柳下惠) 를 두 다른 사람으로 기술 했다. 이 두 사람은 불가에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 하던 진양을 떠난 사람 (儴佉) 이라 본다.
단군은 도가(道家)선인이었다:
한서 예문지에는 그가 도가적 이념을 다룬 검루자 4편 (黔婁子四篇)이 있다고 했다.
진 (晉)나라 황보 밀(皇甫謐, 215년 ~ 282년)의 고사전에는 검루선생을 제나라 사람(齊人), 부르기를 검루자(號 黔婁子), 도가지무(道家之務)를 다룬 책 4편이 있다. 관직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노공공(魯恭公), 제왕(齊王)이 준 하사품도 받지 않았다. 검루자 4편을 쓰고 평생 동안 도가적 품성을 기르고 정직하게 오래 살다 죽었다. 그를 북쪽에서 내려온 도교 선인으로 기술했다. 그가 남긴 책, 검루자 4편 (黔婁子四篇)은 사라졌다
삼국유사에는 단군기(壇君記云)에 실렸다고 출처를 밝히고, 북부여왕 해모수 (解慕漱)의 아들 해 부루(夫婁, 扶婁)와 고구려 시조 주몽은 이복 형제라 했다. 모두 하늘 높이 떠 있는 해(解 高 sun)를 성씨로 했다. 광개토대왕 비문 추모왕이 북부여왕의 후손(北夫餘天帝之子)이라 했다.
제천(天帝)의 후손을 중원 사람들은 “검을 검, 귀신 이름 금(黔). 끌 루, 자주 루, 별 이름 루(婁)라는 별명”을 사용 했다. 그가 마지막 단군이다. 그가 살던 곳을 귀신이 사는 산이란 뜻에 궁홀산 (弓忽山) 금미달(今彌達)이라 불렀다. 남쪽 사람들은 천또깨비란 뜻글자, 천독 (天毒)으로 썼다.
진나라 사람들을 검수 (秦謂民爲 黔首), 서주 시절에는 검을 려 려민(黎民)이라 했다. 려민(黎民)의 총 지도자(王)를 검소할 검(儉)이라 했다. 황하문명 발생지에 려산 (驪山)이 있다. 그 일대에 살던 려융 (驪戎)이 여러 부락을 이루고 살아 구려 (九黎)라 했다. 구려지군 (九黎之君) 치우가 황제와 마지막 전쟁을 탁록에서 싸웠다. 진 헌공 (晉獻公,? ~ 기원전 651년, 재위 : 기원전 676년 ~ 기원전 651년 )에 려융(고구려의 선조)이 살던 산의 융 (驪戎)을 정벌하고 얻은 려희 (驪姬)가 아들이 태자 (奚齊為太子)가 되어 진 (晉;㬜)나라 역사에 중요한 역활을 했다.
고죽국, 중산국 하는 이름을 고조선 금미달 영역에 붙였다. 그 곳을 지나는 쌍건하 영역에서 끝까지 버티던 부족을 흉노 호 (胡) 한예(韓穢)라 했다. 대흥안령 동쪽에 사는 호란 뜻이 동호 (東胡)다. 한예(韓穢)는 해하 수계를 따라 중원 세력이 미치지 않았던 남만주와 산동 반도 고조선 영토로 내려 왔다. 한(韓)이 해안을 따라 흩어져 한해 (翰海 瀚海) 란 이름이 나타났다. 한예(韓穢)가 삼한(三韓)의 선조다.
양자 방언에는 조선이 전국시대 중원 세력의 동북부 여러 곳에 나타난다. 사기 평준서에 조선이 망하여 창해군을 설치 했다 이년 후에 스스로 사라 졌다. 그 곳을 평진후 (平津鄕) 공손홍 (公孫弘)의 봉지로 했다. 산동성 동북부 방랑사에서 창해력사가 진시황을 살해 하려 했고, 창해란 지명이 발해만 동남 연안에 있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진시황 당시 조선왕이었던 비(朝鮮王否)는 진(秦)나라의 공격이 두려워 항복 한듯 하였지만 불긍조회(不肯朝會)라 했다. 비가 다스리던 조선(朝鮮)은 진시황 영역 밖이었다는 뜻이다.
산동성에 있던 전(田)의 마지막 왕 제왕 건(齊王 建, ?재위: 기원전 265년 ~ 기원전 221년)은 같은 고조선 영역에 나타났던 연(燕) 나라가 멸망하자 크게 싸우지 않고 진(秦)나라에 항복 했다. 전제(田齊)의 영역이었던 산동반도에는 고조선 세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추리 된다. 후에 한무제가 이들을 죄인으로 끌어다 배에 태워 우거왕 정벌에 이용 했다. 산서성 사람 순치(荀彘)를 총 지휘관으로 육해군을 통솔하고 전쟁승 장군으로 돌아 왔지만 처형 되었다.
사구(沙丘) 의 위치: 함곡관 서쪽 (關西)에 살던 진시황은 여섯나라를 정벌하고 관동 (關東)지역 변경을 몇차례 순시 했다. 그러던 중에 동남쪽 회계 낭아 “會稽、琅邪”를 지나 수도 함양(咸陽) 으로 돌아가다 평원진 (平原津)에서 병이나 사구 (沙丘)에서 급사 하여 진-한 (秦漢) 혼란기가 나타났다.
상나라 재신(帝辛)이 주지육림 향연을 하던 곳이 사구(沙丘)라 한다. 즉 산동성 서부 평원(山東省平原) 에서 향연을 베풀 었다고 한다.
제후국, 노, 제, 의 유래와 글자에도 산동성이 고조선 영역이 었다는 사연이 있다.
금미달(今彌達)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은 세 갈래로 분산되였다. 한 부류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이를 흉노(匈奴, 胡) 라 했다. 넓은 초원으로 올라간 이들이 세 (三叁參) 부류로 나누어 삼호(參胡)란 이름을 붙였다. 떠나 간 단군을 대(代)신 하여 세 지도자가 나타난 곳이다
고유 북쪽에 안문 산(鴈門山, 在高柳北)이 있다. 고유란 지명은 이 중산국을 점령하고 대군 (代郡) 수도에 붙인 이름이다. 한신(韓王信,韓信)이 유방을 배신하고 호의 땅에 주둔 했던 곳을 삼합 (參合)이라 했다.
호복기사 (胡服騎射)로 알려진 조 무령왕 ( 趙 武靈王, 기원전 340년 ~ 기원전 295년 ) 때에 삼호 누번 진 한(參胡、樓煩、秦、韓之邊)과 국경을 접했다. 누번(樓煩)이란 큰 건물, 즉 궁궐에서 시련을 격던 부족 이란 뜻이다. 금미달을 떠난 부족에 만들어 붙인 글자다. 맹자는 궁궐을 떠났다는 뜻에 이루 (離婁) 상하 편을 만들었다. 대(代)현, 불교의 성산 오대산(五臺山)이 옛적 금미달 지역에 있다. 옛 지도자 단군을 대신한 지도자들이 나타난 곳이라 대(代)라 했다.
안문(鴈門)관 남쪽에 갈석(碣石)산: 소진이 연문후(燕文侯: ?-기원전333년)를 만나 방위전략을 설명한 내용에 미지 수천리 (彌地數千里)란 문구가 나온다. 조 (趙)나라 와 연(燕)나라는 진(秦)나라 동북쪽에 서로 가까이 있었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치려면 “雲中、九原,過代、上谷” 밖 수천여리를 지나 와야 하지만, 조나라가 연나라를 치려면 “嘑沱,易水”를 지나 4-5일이면 연나라 수도에 이른다고 했다. 조나라 동쪽에 연(趙東有燕) , 연의 동쪽에는 조선(朝鮮), 그 다음에 요동으로 기록 되었다. 전국시대 소진(蘇秦,? ~ 기원전 317년?) 이후에 조선이 발해만 서쪽 연안 양평 (襄平)으로 수도를 옮겼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오는 양평 (襄平)에서 연왕 공손연(公孫淵, ? ~ 238년)이 잡혔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조선(朝鮮)에서 대부 예(大夫禮)을 보내 연을 설득 하여 전쟁을 피했다. 진수를 소개 했던 장화의 박물지에는 조선후가 연(燕)을 처벌하고 돌아가 바다로 들어가 위선국(爲鲜國)을 세웠다. 이를 삼국지 변진전에는 주선국(州鮮國)이라 했다. 맹자(孟子) 등문공장구(滕文公章句) 에는 위선국 (爲善國) 이란 문구가 있다. 이를 장화가 인용 했다고 본다.
한서에는 조선재 해중 (朝鮮在海中) 이란 문구가 있다. 미지 (彌地)를 떠난 사람들이 동남아 해안으로 퍼저 나갔다. 이를 장화는 신미제국 수천리(新彌諸國 數千里)라 했다. 여러 남조 역사서에는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변한 “倭百濟 新羅 任那加羅 秦韓慕韓” 일곱 나라가 있었다. 이를 비미호 (假倭王卑彌呼)의 후손 왜왕이 다스렸다. 그들이 해상 무역상으로 동남아 해안을 따라 “Ceylon, Sri Lanka”에 까지 이르러 그곳에서 번성 하던 남방 불교를 강남을 거처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 전했다. 대당서역기에 실린 사자국 (獅子國) 이 스리랑카의 옛적 이름이다. 그에 실린 “僧伽羅” 가 인도 남단 “Ceylon, Sri Lanka”에 있었다. 사자국은 한글 어음 사자 (嗣子), 스승의 아들이란 뜻 글자 사자(古亦作師子)를 이를 음차(音借)한 이름이 “Sinhalese”, 그들이 사용하던 항구가 “Singapore” 라 본다. 인도에는 이렇게 ‘옛적 한국어를 음차한 명사’가 많이 있다.
동남아 해안에 신미제국(新彌諸國)을 이루었던 부여(濊貊夫餘, 扶餘)의 후손들이 한해 남쪽 항로를 건너 한반도와 일본에 정착 했다. 이방인 이란 뜻의 객가(客家 Hakka) 사람들이 중원 남쪽에서 동남아와 대만에 살고 있다. 아직도 탐모라국 (𨈭牟羅國) 이라 부르던 대만섬 (Formosa Island) 에는 아리랑의 어원이 되는 아리산(阿里山)과 가라산 (加羅山) 가라호(加羅湖)가 있다. 한동안 전남 땅끝 해남도에 신미국(新彌國)이 있었다. 이를 일본사람들은 침미다례 (忱彌多禮)라 하여 논란이 있었다.
부여의 후손이 개발한 동남아 해안을 따라 낙동강 하구에는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허황옥의 사당이 있고, 신라에는 화랑과 골품제가 나타났다.
신라본기 첫문구에 궁예 (弓裔 ) 시조 혁거세 (赫居世), 호 거서간(號居西干), 수도를 이라 밝혔다. 그 곳에는 조선 유민이 여섯부락을 이루고 살았다. 북명 사람(北溟人)이 예왕인(濊王印)을 얻어 바쳤다. 이를 삼한의 하나로 알려진 진한 (辰韓) 육부(六部)라 했다. 왜인(倭人)이 병선 백여척으로 해변을 침략 하여 6부 군사가 방어 했다. 가까이 가락국 (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이 살았다.
삼국사기에는 [왜왕을 잡아다 염전에 노예(鹽奴)로 부려야 겠다]는 일화를 남긴 석우로(太子于老: 昔于老, ? ~ 249년)전에 가라(加羅)라는 글자가 처음 실렸다. 그후 개로왕(蓋鹵王, ? ~ 475년) 시대로 인식 되는 도미 부부 설화 (都彌夫婦)에 나오는 신라 왜 백제는 모두 산동 반도에 있었다.
광개토대왕이 왜(倭)를 정벌 했던 지역이 대택(大澤) 북쪽이다. 그 곳에 신라 임나가라(新羅 任那加羅) 가 있었다. 통일 신라 이후 사람 강수(强首:~ 692년)가 임나 가랑인 (任那加良人) 이라고 한 곳이 산동성 대택 (大澤) 일대다. 대택 (大澤) 남쪽 늪지대 패현 (沛縣)이 한고조 유방의 고향이다.
금미달을 떠나 발해만 으로 나와 퍼져 나갔던 삼한 사람들이 한해를 건너 한반도 남단에 정착한 시기를 밝히지 못하여 사료 해석에 혼란을 이르키고 있다. 신라 발생지에 실린 이러한 기록을, 중국 기록과 시대의 흐름을 고려해 보면; 신라 왜 가야, 수로왕의 금관국은 모두 산동 반도 서남쪽 미산현 (微山县 ) 호수 대택 (大澤) 북쪽에 있었다. 신라는 장수왕(長壽王, 394년 ~ 491년) 초기부터 한반도로 이주하기 시작 했다. 한성을 공격 하던 478년 경에 백제 와 가락국이 남방 항로가 개통 했다.
그들의 고향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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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