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장. 서론
지금 까지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단군조선의 시발점이 삼국유사에 실린 대로 기원전 2333년에 운성시에서 발생하였다. 이 해를 영(0,Zero) 점으로하여 그 전을 역사 이전, 즉 선사시대 (先史時代)라고 부름이 합당 하다. 기자가 상나라 유민은 이끌고 기원전 1046년에 조선 땅에 피란을 왔다. 그들이 들어온 곳이 발해만 서남쪽 당산 일대다. 1287년동안 단군조선은 수도를 운성시에서 동으로는 당산에 이르는 지역에서 여러번 옮겼다. 이 장에서는 단군조선이 중원 세력과의 세력 분쟁에서 어떻게 변해왔나를 살펴보고자 한다 .
중국이 정사라고 이르는 24사에는 오류가 많다는 이론이 옛 부터 꾸준히 제기 되였지만, 실효를 못 보다가 중국황제의 통치가 사라진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년 10월 10일-1912년 2월 12일) 이후에 의고파에 의하여 정설로 인정 되였다.
지금도 옛적에 우와이 치수 사업을 하여 개발한 구주(九州)가 중국땅이라 하나 그 땅의 한계를 밣키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산서성 서쪽과 협서성 동쪽 황하 유역 해지 연안에 국한” 되 였다고 고증 했다 .
중국 공산당이 내새운 하나의 중국 이라는 개념을 확고히 인식 시키기위하여 설정한 하상주 단대공정 (夏商周斷代工程) 이라는 정책을 새워 상고시대의 역사 년대를 밝히려 각계의 학자들을 모았다. 모였던 학자들은 주여왕(厲王)이 인민 폭동으로 왕실에서 도망하여 돼지들(彘, 옛 단군조선 지역에 살던 주민들을 비하하여 만들어 붙인 글자)이 살던 고을에 갔다. 옛 부터 주 왕실을 보좌하던 주공 소공의 후손이 공동으로 나이 어린 여왕을 대신 하여 정치를 하던 공백화 (共伯和) 원년이 되는 기원전 841년을 기준으로 연대기를 작성 했다 . 이 시대에 단군조선과 중원 세력과의 경계를 두 지도자가 합의한 기록이 바로 시경 한혁에 실려 있다. 이 시대의 상황을 관찰 분석하여 시대를 따라 상하를 살펴 보기로 한다.
주 선왕중흥 시기: 기원 전828-기원전782년
서주의 중흥이라 대전자를 개발 했고, 시문을 많이 남겼다. 영토가 제일 넓었서야 한다. 시경을 달리 모시(毛詩)라 하는 이유는 “소우는 소리로 기록된 호(東胡, 胡) 즉 고조선 사람들의 노래”란 뜻이다. 그들이 쓰던 말을 하어 (何語)라 했다. 한국 발음의 “하와 해는 통용”되여 다른 한자로 썼다 . 이들이 읊은 시문을 “어떻게 풀이 하느냐”하는 문제로 공자 님때 부터 연구의 대상이 되였다가 한 무제 이후에는 커다란 논쟁이 되였다. 수백만자를 고처 고전을 새로 정리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당시 논쟁이 훈고학의 시작이다 . 고조선 찾기의 내용을 요약 보증하여 설명 코저 한다 . 필자가 보기에는 시경에는 사음자가 많고 우리식 표현 방식을 인용한 시구도 여러 곳에 보인다. 사기 유림열전에는, 공안국이 그집안에있던 고문을 금문으로 해석했다. 하여 그후부터 고문을 연구 하는 학파가 나타났다. 그 구절을 살펴 보면 “일어 버렸던 고문상서 10편을 얻어 해어로 씌여진 해상서 (蓋尚書)가 자라기 시작 했다”는 뜻이다. 고문상서가 곧 해/하상서 (蓋/何尚書)란 뜻이다 .
모시를 읊던이 사람들이 중국 황하 북쪽 전역에 퍼저 살았다. 글자가 나타나기 전에도 그들은 시를 읊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었다. 그들이 노래하며 춤추는 장면을 “새와 동물의 털가죽을 쓰고 한 다리”로 박자에 무추어 춤을 추었다. 북미 원주민의 축제와 같은 현상을 그렸다 . 그들은 양자강 이북 전역에 흐터저 살았다. 상나라 중반기 약 기원전 1000년 경에 서주의 선조가 되는 공유(公劉)의 후손이 단군조선 의 핵심부에 들어와 고조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황하 서 쪽 “풍요 로운 마을 (豊, 酆)을 수도로 나라를 새우고” 그들의 도움으로 함곡관 동쪽의 상(商, 殷)나라를 정복 했다. 그들이 살던 들판, 목야전쟁터(坶野/牧野之戰)가 그 뜻을 지니고,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 한 두에는, 그 지역에 천여개가 넘는 마을 국가를 봉지로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 상나라를 정벌한 신흥 세력은 옛적 친구를 배반 했다. 고조선의 수도를 지키고 있던 백이 숙제를 몰아 내고 “지도자가 살던 마을이란 뜻”의 호(鄗, 䧚)를 점령하여 서주의 수도로 사용 했다. 호(鄗) 라는 글자도 호(鎬)라 바꾸었다. 백이 숙제의 애달푼 사연은 잘 알려져 있지만, 서주 집권층이 단군조선의 옛 서울 평양을 빼았었다는 사실은 사료 여러 곳, 특히 시경에 많이 숨어 있다.
시간 (斯干) 이라는 뜻은 “쉬애한xiè hàn; 解汗, 즉公”을 가차 전주한 글자로 신(神)과 같은 존제라는 뜻이 있다고 했다. 죽서기년 재신(竹書紀年 帝辛)조를 보면 문왕(文王 西伯昌)의 아들 희발이 단공 (公)이 살던 안읍(安邑, 燕)에서 난을 피(辟廱)했고, 그 당시 사이 좋게 지대던 시절를 그린 시문이 앞에 말한 시간 (斯干)과 대아 영대(靈臺)라 본다. 이 때 다른 여러 제후들과 같이 백이 숙제도 문왕의 정책에 동조 했다 . 무왕의 아들은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로 전공을 새운 단공(公)을 당숙 우 (唐叔虞)라 불렀다. 그러나 뒤에는, 소공 석(召公奭)을 봉했다는 지역 연(燕)의 군사를 이끌고 시간 (斯干)의 궁에 친입 하여 항복을 받아 한후(韓侯)로 임명 했다. 이 상황이 일주서(逸周書)에 ‘수도를 옛 하우씨가 살던 곳 (夏之居)으로 옮기려는 계획에 실려 있다 . 이대와 장소 그리고 사건의 전개를 보면, 숙단(叔旦)은 백이 숙제와 직결 되는 사람이다. 그가 성왕 앞에서 울며 하소연 했다. 죽서기년 성왕 (竹書紀年 成王) 7년 부터 13년 까지의 기록은 해지 연안에 살던 사람들을 몰아 냈던 기록이다 . 이 성왕의 잘못을 뉘우치는 노래가 시경 소아에 실린 하인사 (詩經 小雅 何人斯)라 본다. 주 무왕을 도와 혁혁한 공을 새웠던 서이( 西夷) 들이 무왕의 아들에게 수모를 당한 서글픈 노래가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한 시경 국풍 이외에도 여러 사서에 실려 있다 . 후세에는 성왕의 이 불미스러운 행적을 은폐하려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당숙 우 (唐叔虞)라는 사람을 유가(儒家) 경전이 아닌 경전에는 숙단 (叔旦)이라고 기록 했다. 문맥을 보면, 주공 단 (旦)이 아니라 무왕과 단(旦)은 의형제 간이 였다 하여 아저씨 단(叔旦)이라 불렀다. 이렇게 순리적으로 풀이 해 보면 숙단(叔旦)이 백이 숙제의 아버지, 단공(公)이였다. 이 글자가 와전 되여 단(旦)이 당 (唐, 當) 으로 바뀌어 기록 되였다 . 백이 숙제의 사당이 수양산(首陽山)에 있었다는 고사는 알려저 있지만, 그 산이 어디에 있는 산이 였나 하는 의문을 풀어준 열쇠가 논어주소와 수경주에 실림 내용을 종합하여 시경 당풍 채령 (詩經 唐風 采苓)에서 확인 했다. 산서성 해지 (解池) 연안에 있는 산이였다 . 해지의 동북 연안에 있던 평양 (平陽, 平壤)을 호(鄗), 또는 살기 좋은 마을 이라 하여 “안읍 (安邑) 은자의 고을 유주 (幽州), 연(燕)라 했다. 이 이름이 수양산과 같이 동쪽으로 밀려와 북경 유역에 나타 났다. 예기에 실린 연거(燕居)는 “연이란 마을에 살때”란 뜻이다 .
서주는 이렇게 옛 고조선 땅에 들어와 자리 잡고 살면서 그 곳 원주민 들의 원망을 샀고, 계속 그들의 시달림을 받았다. 이러한 국네 우환을 천신께 사죄 하려고 5 대 임금 목왕이 신화의 발생지 곤륜구 (昆崙丘)를 찾아가 환운천왕 신전에 분향을 하고 돌아 왔다. 그러나 여민 (黎民) 여융(驪戎) 또는 개적 이라 부르던 원주민의 반항은 심하여 선왕의 아버지 여왕(厲王)이 매부가 사는 마을로 도망가 그 곳에서 죽었다. 그 곳이 분수 가에 있던 궐부(蹶父)의 영역이다. 비하 하여 돼지들이라 부르던 고조선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선왕이 한후를 초청하여 정략 결혼을 시켰다 .
정략 결혼은 성공 했다. 서주의 위상을 다시 새워 수도 호(鎬)경에 까지 창궐 했던 혐융 (戎狄)의 한 분파인 개적 (蓋狄) 를 정벌 했다. 시문에 나타난 대원 (大原)은 오늘의 산서성 임분시(臨汾市) 유역 이라 본다 . 그의 아들은 다시 호경에 살던 원주민의 폭동에 살해 당하고 서주는 함곡관을 너머 동쪽으로 피해 왔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 할때 까지의 춘추전국시대 (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221)가 시작 되여 550년이라는 긴 전쟁속에서 시달렸다. 중원에 살던 사람들은 난을 피하여 흔히들 동호라고 부르던 고조선 땅으로 피란을 갔다. 고조선 땅에 황금시대가 이루어 졌다 . 사서에 찾은 이러한 기록, 시경에 나오는 시문 설명, 그리고 그와 관계 되는 글자들을 풀어(解字) 보면, 중원 세력의 영역과 접하고 있던 고조선의 경계를 그려 볼수 있다. 그러나 국경을 논하기 전에 한가지 유의 할 점이 있다. 당시의 사회 상을 새겨 풀이 해야 한다. 두 정치 세력의 경계가 오늘과 같은 국경이 아니 였다. 다른 나라 사람이라도 전쟁이 아닌 상태에서는 다른 마을을 자유로이 지나 다닐수 있었다 . 이에 관한 설명은 제 환공이 기원전 664년경에 고죽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에도 나타난다.
한혁의 주인공 한후(韓侯)의 후(侯)자가 “공,후,백,자,남”의 작위가 아니라 주 왕실에서 준 작위는 백작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성은 주 왕실의 핏줄인 희성 한씨(姬姓 韓氏)라 앞뒤가 틀린 주장을 한다.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증거가 유교경전 예기(禮記)에 있다. 오관의 장은 백이라 하고 이들은 지방을 맡아 다스린다. 구주의 장이 천자의 나라에 들어 오면 목(牧)이라 자칭 하고 (그가 천자와) 같은 성이면 숙부라 하고 다른 성이면 숙구(叔舅)라 하고 자기의 봉지 밖에서는후(侯)라 하고 봉지 안에서는 군(君)이라 한다. 타성의 작은 나라 지도자를 소후(小侯)라 했다. 이를 보면 이론의 여지가 없다. 정략 결혼을 목적으로 모셔온 고조선의 어느 부족 지도자를 한후(韓侯)란 존칭을 써서 불렀고, 고조선 총 책임자의 허락도 없이 작은 부족장 한후에게 “끝없는 북국의 총 지도자라 인정 하여 기/그백 (其伯)이라” 했다 . 주선왕이 한후에게 총치권을 준 지역이 만리장성 북쪽 끝없시 넓은 땅이다. 이 지역에서 출토 되는 모든 고고학적 유물은 한후의 후손이 기득권을 주장 할수다. 그 당시 고조선 총 책임자는 한성(韓城, 溥彼韓城)이 아니라, 더 멀리 북쪽에 있었다고 본다. 오늘의 적봉 일대가 아니면 후에 동명성왕 ( 東明聖王)이 나타 났다는 의무려산 일대에 있었다고 본다. 단군 조선의 최고 지도자가 살던 곳을 신이경에서는 천지 장남의 궁이라 했다 .
잠깐 자리를 바꾸어 한후가 통치권을 확인 받은 문제를 거론 하고자 한다.
모시(毛詩)란 이름의 유래가 된 모형의 스승이 순자다. 순자에는 어느 고전보다도 시경을 많이 인용 했다. 그가 인용한 시문은 많이 손실되였고, 글자도 바뀌여 전해온다. 모두들 의문시 하던 한혁의 시구 “기추기맥 엄수북국 (其追其貊 奄受北國)”의 뜻을 순자에서 찾았다. 시제(詩題) 역복 (棫樸)은 “서주 궁정에서 열심히 부역을 하는 관비 (官婢)로 일 하던 해를 숭상 하덩 사람들”이란 뜻을 가차 전주한 글자다. 시구 여러 곳에서도 같은 소리의 글자를 다른 글자로 바꾸었다. 추탁 (追琢)을 당시 발음이 비슷했던(?) 조탁(雕琢)이라는 글자로 바꾸었다 .
두 지도자는 먼 옛 적에 하 왕조를 세운 모성한씨 (冒姓韓氏)의 대표 한후 (韓)와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하북평원에 나갔다가 다시 옛 하 왕조의 본거지에 들어와 나라를 새운 희성 (姬姓)의 대표 주선왕(周宣王, 재위 기원전 828-782년)이 기원전 824년에 합의 했다 . 한후가 살던 한성(韓城)이 어디였나 하는 문제에는 논란이 많으나, 양자 합의 내용은 뚜렸하다. 선왕이 살던 호경의 북쪽 끝없이 넓은 땅을 모두 고조선의 땅이라 했다.
필자는 부피한성(韓城, 溥彼韓城)이 만주 서남쪽 오늘의 조양 일대라고 영문본에서 밝혔지만 이는 서주의 제후국 연 (燕)의 수도가 오늘의 북경이였다는 중국사람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 드려 저지른 그릇된 판단이였다. 옛적에 중국 사람들은 “세 곳 중 어느 하나가 한성(韓城)이 있던 곳이라 했다. 세 곳 중에 제일 북쪽이라 한 곳이 하북성 중앙에 있는 보정시(保定市)와 천진시 사이에 있는 고안 (固安)이고, 제일 남쪽이 산서성 한원(韓原)이다 . 고안 (固安)일대가 고조선 영역이였다는 증거는 전국시대 연나라가 진개 (燕 秦開. 秦介)로 하여금 동호(東胡, 고조선)땅1000리를 빼았었다는 사기의 내용이 한비자에 나온다. 진개가 기원전 300년 경에 고조선의 중요한 방어선이였던 옛 수도 방성(方城, 옛 韓城)을 빼았아 고조선이 약해 졌다고 했다 . 춘추시대는 물론, 전국시대의 초기 까지 고조선 사람들(東胡, 胡)이 하북 평원 전역에 흐터저 살았다. 관자가 제 환공을 모시고 당시 중원에 만연하던 산융을 정벌하고 고죽국 왕을 처형 했다는 중국 사서 여러 곳에 나온다. 그 기록은 춘추 필법에 따른 과장이다.
시월 10일 Face Book에 올린 “발조선(發朝鮮)의 선조가 홍산-하가점하층 문화를 이루 었다”를 고려 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계속
October 9, 2016.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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