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 참성단, 환구단(圜丘壇)
참성단은사적 제136호로, 첨성대은 국보로지정되었 지만 무엇을 위해 만들었나 하는 질문에 뚜렷한 답을 못찾았다.
필자는 앞에서 “강화도 (江華島)의 이름을 마니섬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다. 한국 사료에 휼/혈구(穴口)라고 풀이한 이름을 고려도경에서는 합굴 (蛤窟) 이라 했다. 해구(海口)가 아니라 해?(海?) 다음 글자는 모르겠다는 뜻이다 .
한국 기록에는 혈(穴)자가 해(海)자로 바뀌여 기록 되였다. 휼/혈?(穴口)이 곧 합굴 (蛤窟)이란 뜻이다. 합(蛤, há gé hā è )자는 부여의 시조 해모수 와 같은 혈통을 의미 했다 .
현대 북경어로 쉐 (穴xué)자는 사음자 아니면 훈역한 글자다 . 이 글자는 한가로울 용 (宂)자와 혼용 했다. 이를 깊히 살펴 보면 갓 마리 밑에 아해 아자를 겹친 상형 글자다. 용(宂) 자는 “上:宀,下:儿”로 모자(宀)를 쓴 “兒 아이 아, 연약할 예, 다시 난 이 예”를 뜻한다. 천손의 후예를 이끄는 지도자란 뜻이다 .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단군왕검의 후손이 해지 연안에서 발해만 연안을 거처 만주에서 살다가 뱃기로 서해안을 따라 인천 앞 바다에 있는 큰 섬에 자리를 잡고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이 제단이 참성단(塹星壇)이다 . 이 곳에 산해경에 실린 “유호부여지국; 有胡不與之國”이라한 사람들이 살았다. 그 산을 마니(摩尼) 또는 마이(摩利)산 이라 한다 . 한자 마(摩)는 “소우는 소리란 글자로 기록된 부족”을 뜻하고, 니(尼) 와 이(利)는 동이(東夷)를 설명할 때 풀이한 “사람” 을 뜻다.
참성단(塹星壇)이 여러 글자로 바꾸고 때로는 “해구(海口)가 아니라 해?(海?)와 같이 참 뜻이 은패 되여”있다.
고려 제11대 문종(文宗;재위 1046년 -1083년)은 재위 37년간 동안 불교를 숭상하고 문치 정책을 펼쳐 고려의 황금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후에는 문치정책의 그늘 아래 김부식(金富軾, 1075년 -1151년)이 등용되여 도참설에 근거하여 천도를 주장 하던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1145년(인종 23)에 삼국사기 (三國史記)를 완성 하였다. 그러한 사회상은 토속 민족신앙이 점차로 시들어져 가는 계기가 되여, 민족신앙의 뿌리가 되는 마니산 참성단의 내력이 흐려지게 되였고, 그 이름부터 짙은 안개 속에 뭍쳐젔다. 이러한 결론은 강화도의 어원을 찾아 깊히 추적하여 밣켜젔다.
고려시대 한반도에서 흥행 했다는 도참설 (圖讖說) 일명 참위설(讖緯說)은 단군조산 시대 부터 존제한 국토속신앙 선교 (仙敎) 에 근거 한다 . 그 당시에 오늘의 참성단(塹星壇)이라고 볼수 있는 장소를 이름을 밖어 전성 (氈城)이란 글자로 기록하고 “동서 방향을 뒤 버꾸어 기록한 증거”가 보인다 .
전성 (氈城)이라는 글자를 풀어 보면 뜻이 뚜렸하다.
모전 전(氈:zhān/ zin1 )는 단 (左:亶),과 모 (右:毛)를 합한 글자다. “소가 우는 소리, 馬/牟;móu mù mào라고 기록 되던 부족”의 지도자란 뜻이 있다 . 이 글자가 주 무왕이 목야전에서 큰 공로를 새운 서이 (西夷,靺鞨) 지도자 “단공, 단공”에게 만들어준 이괘(利簋)에 “壇 혹은 ”로 판독 되는 글자다. 이러한 글자를 이리저리 뒤바꾸어 (가차전주) 여러가지 글자로 기록에 “塹星壇. 占星臺. 塹城”이라 했다. 즉 “구덩이에서 별을 보는 성, 별을 보고 점치던 망대, 구덩이 성”하는 뜻을 알수 없게 기록 했다.
이렇게 글자 풀이가 복잡한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어떻게 설명 함이 옳은가를 다루던 한학의 한 부류가 훈고학이다. 이를 경학(經學) 한때는 현학(玄學)이라 부르던 학문은 (유교의 가르침을 적은 13개의 유가) 경전의 본래 뜻을 탐구하던 학문이라고 알려저 있지만, 실상은 우리와 같은 말을 하던 사람들의 말소리를 가차하여 적은 글자와 어순풀이를 놓고 서로 시비 하던 중국고유의 학문이였다. 한무제 이후에 영토가 넓어지면서 이를 합당하게 중국에 흡수 하려는 학술적 노력이 한나라 때에 번창하였다. 때로는 사상적 또는 정치적 노선에 따라 뜻을 풀이하여 서로 다투었다. 원나라 때에는 첨사(瞻思) 즉 첨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문을 경학(經學)이라 했다 .
고려도경에 보면,신라와 백제가 만주땅에 있다가 고구려에 패하여 한반도로 내려왔고 했다. 고려 왕조의 “왕건을 현도주도독(菟州都督)이란 칭호를 주고 후에는 고려의 왕으로 봉” 하였다 . 왕건 일가는 남만주에서 옛적부터 잘 알려진 해상로를 따라 요동 반도를 돌아 서해안을 타고 개성에 정착 했다고 본다.
경주에 있는 첨성대 (瞻星臺)는 기후관측소가 아니라, 제천의식을 위해 만들었다고 본다 .첨성(瞻星)이란 글자를 풀어 보면, “하늘에 반짝이는 별(三辰, 星)을 존경하여 우러러 본다”는 뜻이 있다. 마니산 참성단과 경주 첨성대는 같은 단군의 후손으로 “옛적에 제사장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만든 제단”이 뚜렸하다. 남만주에서 중국과 교류가 많았던 신라는 500년 경에 한반도로 내려와 크게 번성 하면서 독자적인 제천 의식을 취했지만, 낮게 설치 하던 제천단(祭天壇) 을 높은 대(臺)로 만들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
고려의 마지막 국왕,제34대 공양왕(恭讓王, 재위: 1389년-1392년)은 토속신앙을 회복 시키려한 흔적이 보인다 . 뒤를 이는 이씨 왕조(李氏朝鮮)는 중화사상에 몰두하여 유교만을 우상 하여 “국왕이 제사장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만든 제단”의 존제는 더더욱 은폐 되였다.
고려의 공민왕 같이 외새에 시달리던 이조 마지막 고종 황제가 삼한을 통합한 대한 제국 (大韓帝國)의 황제라 국호와 군주의 명칭을 바꾸고 정통 제천의례(祭天儀禮) 를 위해 만든 환구단(圜丘壇)을 지었다. 첨성대, 참성단, 환구단(圜丘壇)은 모두 환운천왕을 모시던 제천의식을 위해 만든 같은 성격의 축조물이다.
끝
November 2, 2016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