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동이(東夷)가 철 만드는 기술을 개발:
북경 지역에 살던 사람이 기원전 198년경에 산해관을 지나 조선 땅에 가서 기준을 몰아 내고 새로운 통치자가 되였다. 그렇게 된 배경을 만리장성 북쪽에 살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잠깐 살펴 본다. 그 곳은 옛적에 “고조선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던 안전 하고 살가 좋은 곳이라 갔다.
고조선의 다른 이름
위만조선의 탄생을 논하려면 그 지역에서 발생했던 사건들을 간략하게 나마 살펴 보아야 겠다. 위만이 수하 병력을 이끌고 자기에게 중책을 맏긴 기준을 몰아 내고 그 지역에 새로운 통치자가 되였다. 이를 한국 사가들은 중국문헌에 실린 그자와 뜻을 인용하여 “지조선, 한씨 조선, 또는 기조선, 후조선”하는 이름을 붙였다.
이지역에 있던 정치 집단을 사마천은 진시황이 장성을 쌓을 때는 “기/지 조선 (暨朝鮮)이라 하고, 기원전208년에 모두 선우가 동호왕(東胡王)을 살해한 이후에는 예맥조선(穢貉朝鮮)이라 했다 . 기자가 상나라 유민을 이끌고 온 곳이 조선이였고 그 당시 조선의 지도자를 단군이라 했다. 이 단군은 왕검이란 칭호가 없는 “보통명사로 제사장의 직책을 맡은 사람이란 뜻의 단군”이였다. 당산 천진 일대가 조선(朝鮮)의 일부 였다는 뜻이다. 춘추시대 초기에 상황을 기록한 관자에서는 발조선이라 했고, 공자님 생전에는 그지역을 군장이 없는 곳(無君長) 이라 했다. 공자님의 예기 내용과 여씨춘추의 기록을 고려 하면 그 가 말한 뜻은 중원에서와 같이 세력 다툼을 하던 “독제자가 없는 대인(大人)이 다스리는 곳”이란 뜻이다. 전국시대 말기에는 순자(순자)부여란 이름으로 기록 했다. 진시황은 “호 동호(胡,東胡)를 막기 위해서 만리장성을 쌓으라”고 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예맥(穢貉)을 동이라 했다. 이들을 또한 동호(東胡)라고 불렀다. 이 동호(東胡)란 뜻은 동쪽에 와서 사는 호(胡, 豪)란 뜻이다. 서쪽에 살던 그키타이의 한 지류가 산해관 북쪽에 살았다는 결론이다. 이들이 고구려 이후에는 옛 단군조선의 영역에 글안 즉 요 제국을 새웠다 .
지도자 선출
필자가 추리한 바와 같이 사기 하본기(하本기)에서도 대우와 백익은 혈통이 다르다 . 단군조선의 첫 지도자 우(禹)와 뒤를 이어 받은 두쩨 지도자 백익(伯益)는 같은 혈통이 아니였다 기록이논형봉우, 묵자 등에도 있다 .
홍익인간과 홍범구주를 다룰때 나타난 흉노족의 풍속에는 능력 위주로 지도자를 뽑았다. 상식적으로 누구나 이해 할수 있는 이러한 판단 기준을 이윤유서(洪範九疇 彝倫攸敘)라 했다. 능력 위주의 지도자 선출 방법은 오랫동안 동북아시아에서 유지되여 왔다. 신라초기에도 나타 났다. 고구려 뒤에 나타난 글안 (契丹)에서도 초대 황제가 된 아률아보기(耶律 阿保機, 집권. 907–926년)가 집권 하기 전에는 여덟 부락의 지도자가 번갈아 가며 글안연방을 이끌어 갔다 . 지도자 선택은 인류역사상 어디에서나 문제가 되였지만 오늘 세계적으로 인용 되는 지도자 선출 방법이 혈통을 이어가는 지도체제를 피하고 있다.
동이(東夷)가 철 만드는 기술을 개발: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루려면 “제력, 능력, 사회적 안정” 이라는 삼대 필수 조건이 가추어 저야 한다. 상고시대에 능력의 핵심은 “좋은 무기를 개발 사용할 기술” 이였다.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너머가는 과정이 동양 상고사 안에 있어야 한다. 철기는 또한 쇠금 (金)자로 기록 할수 있고, 부식이 쉬운 금속이라 철기 사용법이 언제 나타나 어떻게 변해 왔나를 밝히기는 쉽지가 않다. 춘추시대에 새로운 금속 즉 철기 사용법이 서서히 나타났고 본다.
서주 시대의 문물을 다룬 세본과 주례에는 치우가 금속으로 병장기를 만들어 썼다는 기록이 금속무기의 첫 등장이다 . 치우가 이끌던 부족의 활동 무대는 분수 연안에서 홍산 문화권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살았다. 치우와 겨루던 “황제가 한 때는 탁록(涿鹿)에서 기거 했고 보정(寶鼎) 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 이는 물을 끓이고 음식할 때에 절대로 필요한 식기다. 이것이 “흉노족의 대명사 로 알려진 동북이라는 유목민족의 필수 품”이다. 좌전에 “우가 구주의 지도자들로 부터 금속을 모아 분수 연안에 있는 경산(景山) 밑에서 (荆山之下) 아카시아 나무을 태워 정을 만들었다” 는 기록이 있다 . 이들을 종합해 보면 단군 왕검시대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너머 가는 과도기 였다고 본다.
우왕이 치수에 성공하고 다스리던 지역에서 토기가 만들어저 불을 다루는 직책이 있었다. 옛 지도자들은 모두 그러한 직책을 겸하고 있었다 . 이를 화정(火正)이라 했다 그 곳에서 질그릇을 만드러 요구(陶丘)라 했다. 이 곳이 “옛부터 불을 피워 도기를 굽던 지역이라 고열 (高熱)을 낼수 있는 능력이 이곳에서 나타 났다고 한거름 더 나아가 철을 유출 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는 기술을 개발 했다고 볼수 있다. 주로 산서성 분지 연안에서 번창 했다.
한자로 철(鐵)이라고 기록 하는 글자를 풀어 보면 그 뒷 사정과 변천 과정이 단군왕검 (우왕)의 후손과 깊은 관계가 있다 . 쉽게 산화되여 쓸모가 없는 금속(鉄)이란 뜻이 있다. 북당서에는 숙신씨(息肅)와 관계가 깊다 .
철이라고 발음한 이미기/다 개(皆)자는 쇠 개(鍇)를 부르던 말 소리다. 해를 숭상하던 부족을 이를때 쓰던 해/기/지(解,亥,奚,箕)로 기록된 글자와 뿌리가 같다. 자림에는 철(鐵)자를 옛적에는 “동이가 쇠를 썼다는 뜻에서 금자와 이자를 붙여 (左:釒,右:夷) 이“銕”라 했다. 우왕의 후손으로 산서성에 살던 사람들을 우리(嵎銕)라 했다. 그의 머나먼 후손이 한반도로 내려 왔다. 당 나라는 신라 김춘추(金 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 嵎夷道行軍總管” 이라 했다. 중국기록에 따르면, 산서성 북쪽에 살던 사람들로 조(趙)씨와 탁(卓)씨가 철을 생산한 대표적 가문이다. 이들이 서쪽 진(秦)나라에 기술을 전했다 . 그 기술이 점차로 중원에 퍼저 나갔다고 한다.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철을 만드는 기술이 보편화 되여 갑부가 된 사람이 많았다. 춘추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철의 생산지를 놓고 여러 제후국이 싸웠다. 전국시데에는 철제품을 만드는 기술이 산동성 까지 퍼젔다 . 철기물의 생산 기술이 옛 단군조선 영역에서 개발 되였지만, 수요공급의 원리에 따라 전쟁이 심한 남쪽 중원으로 퍼저 나갔다. 철제품으로 치부를 하여 한단지몽(邯鄲之夢) 이라는 술어가 생겼다. 이렇게 중원이 춘추 전국시대라는 사회적 혼란을 격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멀리 떠러진 낙원이란 뜻이 있는 요녕(遼寧)으로 옮겨 가서 내몽고와 만주에 고조선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고 본다 .
끝
January 5,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