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餘州) 북주후(北洲侯) 무강(武康)
삼국유사에는 백제의 제30대 무왕(武王: 600년- 641년 )에 관한 설화가 실려있다. 성은 부여(扶餘), 휘는 장(璋), 그의 어머니가 용과 관계하여 아들을 나았다하여 그를 서동(薯童) 이라고 했고,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으로 기록되였다고 했다. 필자는 고기에 실렸다는 무강(武康)이 무왕(武王)을 잘못 기록 한게 아니라 무경(武庚)이란 글자를 잘못 바꾸어 기록 했다고 보았다. 이는 글자가 비슷한 무경(武庚)이란 글자를 무강(武康)으로 바꾸어 놓고 혹은 “일기사덕 (一耆篩德) 이라 부른다. 경신(庚申)에 등극하여 41년을 다스렸다”고 한다 .
무경(武庚)이 상나라의 마지막 태자로 삼감의 난이 실패하여 북쪽 발해만 연안에 있던 상나라 유민들이 살던 곳으로 갔다. 그 곳이 기자(箕子)가 처음에 상유민을 인솔하고 갔던 단군조선 땅이다. 그 곳을 상서대전에서는 여주(餘州)라 했다 . 이 곳에 올라온 상나라 유민이 단군조선 원주민과 연합하여 이룩한 정부가 부여(夫餘, 扶餘)다. 상나라 마지막 군주 제신(帝辛,紂, 紂辛, 紂王)의 아들인 무경(武庚, 祿父武庚)이 고조선 땅에 자리잡고 살던 상나라 유민촌으로 도망 갔다 .
그 지역이 중원세력의 밖이란 뜻이 글자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이를 관자대광 (管子大匡)에서는 북주라 했다. 북주후(北州侯)가 천자의 말을 듣지 않아 토벌할 계획을 새우고 제후의 동의를 얻어 북벌에 나섰다 . 이 상나라 유민들의 은거지를 북은씨(北殷氏) 라고 기록 했다 . 이 사실이 춘추좌전 소공 9년 기록에는 “무왕이 상나라를 멸하여,박고, 상엄이 노나라 동쪽에 있고, 숙신 연 호 (肅慎,燕,亳)가 북쪽에 있다”고 적혀 있다 . 이들이 발해만 서쪽 ㅐ안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 우거왕의 경기에 살았다. 이를 사서에는 현토군 상은대 (玄菟郡 上殷台 )로 기록 했다.
산동성 동쪽에 있었다는 박고와 상엄 (蒲姑,商奄)은 현지에 남아 있던 부족이고, 북은씨(北殷氏)로 기록 된 호(亳)는 북쪽 고조선 땅으로 피란 갔던 상나라 유민을 뜻한다. 이들이 모두 상무정 (商武丁)의 명제상이였던 부열(傅說)의 후손이다 . 사마천이 열전의 첫 쩨로 백이숙제를 다루었고, 세가의 첫 쩨로는 오태백 (吳太伯)을 실어 그가 양자강 하류에 있던 오나라의 시조라고 했다 . 이러한 중국기록은 단군왕검이 해지연안에서 조선을 건국한 시절의 부족이 함곡관 동쪽으로 나와 “중국대륙의 동해안”에 살았다는 증거다. 이를 삼국지에서는 오태백의 형모 문신단발 (文身斷發)을 인용하여 양자강 하류 회계(會稽)지역에 살던 하후씨 (夏后, 단군왕검)의 후손이 바다를 건너가 왜인(倭人)의 선조가 되였다고 한다 . 백제 무왕(武王)의 선조가 발해만 연안에서 한반도 서남쪽에 수도를 옮기면서 옆에 있던 신라와 갈등이 나타났다. 진수가 살던 시절에 한해 (翰/韓海)전역에 걸처 해양권을 잡았던 백제를 왜로 혼동하여 기록 했다고 본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발해만 서남지역은 창해군이 생겼던 곳이고, 가까이에 대방군 (帶方郡)이 있었고, 백제의 맥국(貊國)이 있었다. 오호십육국 시절에는 삼한의 후예들인 “부여(夫餘, 扶餘)씨 즉 백제(百濟)와 왜(倭)가 함께 중국대륙의 동해안”에 흐터저 살면서 한해를 관장 하여 동이의 강국이 되였다. 이를 수서(隋書)와 북사 (北史)는 “부여왕 동명의 후손인 (夫餘王東明之後) 백제왕이 공손도 딸을 부인으로 받아드려 (公孫度以女妻) 동이의 강국이 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 동이의 최 강국이였던 백제는 만주 땅을 고구려 광개토왕과 그 뒤를 이은 장수왕 (長壽王,재위: 412년-491년)에게 빼았기고, 중국 해안선에서 활동하던 대륙백제(大陸百濟)는 수나라 양견(隋 文皇帝 楊堅, 541년-604년) 이 분산 되였던 중원을 통일하여, 대륙백재는400여년 동안 활거 하던 중국땅에서도 밀려나 한반도 서남지역에 수도를 정했었다. 곰나루라고 불리던 곳을 훈역하여 웅진(熊津)이라한 백제의 수도였다.
한국기록인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백제 9대 책계왕(責稽王, 재위 : 286년 -298년) 13년인 299년에는 “한과 맥인이 친입하여 왕이 나가싸우다가 전사 했다” 그는 고이왕(古爾王) 의 다들이다 . 백제가 중국 땅에 있었다는 증거 분명하다.
남조 양나라 에서537년에 편찬한 남조 제나라(479년-502년)의 역사서인 남제서(南齊書)에는 대륙백제에 관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 발해만 서남쪽에서 위로(魏虜)라고 기록된 옛 고조선의 서쪽 새력가 큰 전쟁을 했다. 고구려 서쪽에 있던 위로(魏虜)가 10만명의 병력으로 백제를 처들어왔다. 백제왕 모대 (牟大)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친입군을 대파 했다. 이 기록은 백제가 고구려 세력에 밀려 만주 땅에서 떠난 이후다. 이 때 나타난 위로와의 전쟁은 장수왕 이후에 발해만 연안에서 위로와 싸웠다는 예기다. 북사에도 백제왕 창(百濟王餘昌)에게 표기대장군 대방군공(骠骑大將軍帶方郡公)의 칭호를 주었다 .
중국 남북조 시대북위 효문제(北魏 孝文帝, 재위:471년- 499년) 시절에는 고구려와 대륙백제가 고조선 서쪽 세력이 세운 북위(北魏)의 인준을 받으려고 활발한 외교전을 폈다.
백제의 패망을 그린 사료에도 대륙백제(大陸百濟)의 일면을 볼수 있다.
백제의 패망을 그린 사료에도 대륙백제(大陸百濟)의 일면을 볼수 있다. 앞에서 본바와 같이, 제26대 성왕(聖王, 재위: 523년-554년 )과 제27대 위덕왕 창(威德王 昌,재위: 554년-598년)이 다스릴 시기까지도 백제 대륙은 중국땅에서 활할했다. 그 뒤를 이는 서동(薯童)이란 별명을 가진 무왕(武王)이 이어 받았다. 그와 그의 아들 의자왕 (義慈王)의 업적과 활동 지역을 보면 전대의 집권 영역과는 연관성이 부족하다. 백제는 의자왕 (義慈王)을 마지막으로, 665년에 당나라가 그 나라를 빼았겼다. 당나라는 그 곳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새우고 통치 했다. 그러나 일본과 제주도에 있던 백제 세력이 계속 반항 하였다. 인덕 2년(麟德二年)에는 유인괘(劉仁軌)가 주선 하여 “신라 백제 탐라국,왜(倭) 네 나라의 지도자들을 모아 합의”를 보았다 . 당 고종은 흡족하여 유인괘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승진 시키고, 우상 낙성현 남작에 봉 했다. 그 약속에 따라 일본으로 피했던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을 도독(扶餘/ 熊津都督)에 임명 하였지만, 677년에는 반당 운동에 밀려 당나라가 세운 도독부 (都督府)는 옛 대방(帶方) 땅으로 옮겨갔다 . 모든 기록에 한결 같이 “백제는 동쪽과 서쪽(東西) 두곳에 수도를 두고 5부(五部)로 나누어 통치” 했었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 기록에는 부여(夫餘, 扶餘)씨가 이끌던 백제가 중국 대륙에서 한반도 서남일대를 거처 일본열도 서남부와 제주도 유구열도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 흐터저 살던 고조선의 후손들을 다스렸다는 증거다. 삼국유사에 실린 “백제 말년에 발해, 말갈, 신라가 백제 땅을 나누어 (百濟末年。渤海靺鞨新羅分百濟地)가젔다는” 기록은 대륙백제(大陸百濟)의 동북일부가 만주 요동반도에도 있었다는 증거다.
대륙백제는 어떻게 방대한 지역을 어떻게 통치 했나하는 질문이 생긴다.
고구려, 신라, 그리고 후에 나타난 발해, 글안등 모든 고조선의 후예들은 절대 통치자의 영역을 이렇게 5-7부로 나누어 능력위주의 집단 통치 체제로 이어 왔다.
여러부족 연맹체였다. 이들은 천손 환웅천왕의 후예라 인식하는 토속신앙 을 유지해 왔다. 앞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중국사서는 제사장의 능력과 인지도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기술했다. 이를 중원에서는 절대적 통솔력을 가진 지도자가 없는(無君長) 오합지졸 상태라고 비웃었다 . 어느 통치 방법이 옳은가 하는 질문의 답은 서주 무왕이 기자에게 자문했다는 내용에 있다. 흔히들 주 무왕이 돌아온 기자에게 통치(統治)에 관하여 물어 보았다고 알려진 문구의 핵심은 “홍범구주”가 아니라 “이윤유서 (彝倫攸敘) 라는 문구다 .
주무왕은 아래와 같은 질문을 기자에게 던졌다.
「嗚呼!箕子。惟天陰騭下民,相協厥居,我不知其彝倫攸敘。」
유가에서는 이질문을 여러가지로 풀이 했다. 필자는 아래와 같이 풀이 한다.
“환웅천왕께서 말을 타고 (해곡, 解谷 에) 내려(天陰騭下)와 모든 사람들이 서로 협조하여(民相協) 궐에서 살라(厥居)하였지만, 나는 이윤유서(彝倫攸敘)를 모르겠다. 하여 기자의 설명을 듣고자 했다.”
사전에 “오랑캐 이름 궐(厥, jué/지왜,좨)자는 옛적에 중국 서쪽에 살던 흉노의 선조를 뜻한 글자라고 했다 . 흔히들 두무(兜鍪)라 하는 말이 돌궐(突厥)로 기록되였다. 죽서기년에는 이들의 지도자를 제우 하후씨 (帝禹夏后氏)로 기록 되였다. 그가 단군왕검으로 산서성 해지 연안 평양에서 단군조선을 새웠다. 주무왕을 만나서 “홍범”을 설명한 기자는 단군왕검의 후손이다. 그의 선조가 해지연안에서 수미로 일하던 부열(傅說)이라고 필자는 설명했다. 그래서 무왕이 기자에게 치수와 통치에 성공한 단군왕검의 후손에게 통치의 핵심이되는 이윤유서(彝倫攸敘)를 물었다. 후한 말, 채중랑 (蔡中郎,蔡邕, 132년-192년)이 남긴 비문에는 그 문구의 뜻이 “사리(事理) 연유(緣由)의 순서(順序)”라 했다 . 즉 상식적으로 누구나 이해 할수 있는 판단 기준에 따라 자연스럽게 순서를 마추어 실행 하라는 뜻이다. 동양 상고시절의 통치사를 살펴 보면 지도자가 서로 다른 부족 (姓氏)에서 나왔다. 이러한 연맹체의 통치현상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한 집권자가 권력을 독점하게 되였다. 이는 천륜에 어긋나는 죄악이다. 진시황이 저지른 이러한 죄악으로 극심한 피해를 본 유가에서는 공자의 충서(忠恕)란 말귀의 뜻을 뒤바뚜어 강력한 황실 중심제의 정치 체제를 정당화 하여 확립 시켰다. 이를 기반으로 중원세력에서는 일가 독제의 왕조가 나타났고, 그에 다른 병폐는 중국과 한국의 통치사에 잘 나타나 있다. 삼국사기의 집필진은 이러한 중화 유교사상의 시각에 (Stance, paradigm )서 “고조선의 후손들도 건국 초기부터 한 집안에서 권력을 계승해 왔다”은 인식에서 역사 풀이를 잘못 했다.
흉노라고 비하하던 하후씨 (夏后氏)의 후손은 그들이 환웅천왕의 후손이라 인식했다. 그들이 사는 나라를 천손(天孫)의 나라, 지도자를 천자(天子) 또는 천왕(天王)이라고 불렀다 . 이 천자란 뜻을 유가에서는 부친이 하늘이요 모친은 땅이란 뜻에서 나온 말이라고 뒤바꾸어 풀이 했다 .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중원세력에서 인용한 왕조는 단군왕검이 하늘로 부터 인수 받은 홍범구주 이윤유서(洪範九疇,彝倫攸敘)를 바탕으로 한 “홍익인간 (弘益人間) 재세이화 (在世理化)의 건국이념”에 어긋나는 패습 (悖習)이다. 이 건국 이념에는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지녀온 하늘을 숭배 하는 풍습이 깊히 스며들어 있다. 그러한 인식, 즉 경천사상(敬天思想)에서 동학(東學)운동이 나타 났다. 동학운동과 토속 단군신앙이 천도교 (天道教) 로 나타 났다. 하늘을 숭배 하는 경천사상(敬天思想) 에서“사람이 곧 하늘 이라는 천도교 (天道教)의 인내천(人乃天)사상”이 들어 있다.
이윤유서(彝倫攸敘)의 뜻이 “자연의 순리에 따라 어떤 일이던 적시 적소에 처리 해야 한다”로 풀이 되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어려운 사안이다. 오늘에 이르기 까지 완전 무결한 통치 체제는 찾아 내지 못했다. 모두들 혈통을 이어가는 왕조 정치체제는 잘못되였다고 인식한다. 집권자가 인용해야 하는 자연의 법칙을 찾으려고 자연과학계에서는 끝없이 노력하고 있다. 이를 찾으려고 과학계게서는 학술지를 통하여 대화를 계속해 나가고 있다. 인문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서로 의견을 발표하고 이를 계속 상의 햐야 발전이 있다.
좀더 깊이 알고자 하시는 분은 저의 “website”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홍익 인간(弘益人間)과 홍범구주 (洪範九疇)/
끝
March 14,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