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제 (東百濟)-1:
평양일대 낙랑(平壤 樂浪)유적지가 백제의 수도였다:
당나라가 백제를 정벌한 뒤에 편찬된 통전 (通典) 백제편은 대륙 백제(大陸百濟) 와 동백제(東百濟)를 섞어 기록 했다. 백제의 멸망 과정에는 대륙과 한반도에 백제가 있었다는 증거를 남겼다 . 대륙 백제(大陸百濟)는 북위 효문제(北魏 孝文帝,
471년-499년) 시절에 밀려 났고, 동백제(東百濟)는 고구려가 백제의 제24대 동성왕 모대(東城王牟大 : 479년-501년)의 수도를 격파 하여 약해저서 한반도 남쪽으로 옮겨 살았다. 동성왕 모대가 살해당하여 그의 두쩨 아들 융/사마()가 왕이 되였다.백제는 제24대 동성왕 때에 국력이 몹시 약해지고 천도를 “동백제의 수도를 한반도 남쪽”으로 옮겼다는 뜻이 숨어 있다. 수도를 한반도 남쪽으로 옮기기 전에는 요동반도에 있던 첫 수도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와 남한지 (南韓地)라고 부른 사이에 동백제(東百濟)의 수도가 있었다고 본다. 위례성(河南慰禮城)이란 말은 “웃 제사장, 즉 제일 높은 단군”이란 뜻을 이리저리 바꾸어 적은 글자다. 대동강 유역에 낙랑 (樂浪)유적지로 알려진 곳이 한성(漢城) 또는 한산성(漢山城)이었다. 그 곳이 동백제 (東百濟)의 수도였다. 이 문제는 “평양 낙랑설”편에서 깊히 다루기로 한다. 영문본에서는 한성(漢城)이 온조와이 세운 백제의 첫 수도 였다고 했다. 현제 만주에 있는 해성시(海城市)라고 풀이 했다. 이는 옛적에 해(海,解,奚)를 “暉 會 河,夏” 또는 시(息,携)로도 발음 했다는 근거로 음이 잘못 전해진 오기라고 했다. 삼국사기에는 “북한산군(北漢山郡)을 평양 (平壤)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 온조왕이 처음에 자리 잡은 곳이 남만주에 있는 오늘의 해성시였고, 온조왕 13년인 기원전 6년에 도읍을 대동강 연안으로 옮기고 이를 마한왕에게 알렸다고 했다 .
대륙 백제편에서는 발해만 서남 쪽에서 도망온 공손도가 삼한의 후예, 특히 백제를 등에 업고 급성장 했었다고 풀이 했다. 그 세력은 백제 8대 고이왕(古尒王: 234년 ~ 286년) 당시 공손연 (公孫淵, ?-238년)이 처형 되여 끝났다. 삼한의 후예들은 옛적에 공손도 일당에게 빼았겼던 남만주 해안 일대를 되찾으려 했다. 서쪽에 있던 조위는 246년에 관구검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강타 했다. 한낙랑 지역이 허술한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한낙랑 주민을 잡아 왔다. 관구검 침략에 쫓기던 동천왕(東川王: 227년- 248년)은 요동반도로 피란하여 구사 일생으로 살아 났다. 하여 옆에 있던 신라에 사래 했다. 이를 그당시 “고구려 사람은 돌아 가고 남아 있던 신라 사람들은 남았다”고 기록 했다. 신라는 처음으로 김씨가 왕이 된 미추 이사금 (味鄒泥師今: 261년-284년)이 다스렸다. 15번쩨 기림 이사금(基臨 泥師今; 298년-310년)이 다스리던 때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왕 2년에 시조조를 참배하고, 3년(300년) 에는 산천 제신에 교제를 바쳤다. 왜와 화친하고, 낙랑,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왔다. 왕 제위 10년(307년)에 신라라는 국호를 되 찾아” 썼다 . 빼았겼던 수도(金城)와 국권을 확립 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또한 옛 영토를 되찾으려 맞섰다.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 : 331년-371년)이 369년에 남쪽에 있는 백제가 점유한 땅을 찾으려다 실패 했다. 다시 371년에 2차 백제를 공략하다 전사하였다 . 근고초왕 (近肖古王: 346년-375년)이 371년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 331년- 371년)을 살해 하고 남평양(南平壤)을 취하여 수도를 한성 (漢城)으로 했다. 남평양(南平壤)과 한성 (漢城)은 같은 곳으로 온조왕의 첫 도읍지였던 남만주에 있는 오늘의 해성시를 뜻한다. 이로 인하여 백제와 고구려는 부여의 종주권을 놓고 치열한 전쟁을 했다. 광개토왕이 “삼한의 후예들이 다스리던 남만주 해안선 일대”를 장악 했다. 그 통에 피란민들이 신라와 가야로 밀려 신라가 갑짜기 성장 하게 되였다. 제22대 지증왕(智證王,: 500년-514년) 원년인500년에 수도를 오늘의 경주 (慶州)로 옮겼다 .
만주를 제패한 구구려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長壽王,재위: 412년-491년)은
제위 15년 (427년)에 부여의 종주국으로 시조 주몽이 도읍으로 정했던 졸본주 (卒本州)에 있는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移都平壤) 한반도에서 있던 동백제의 수도를 공격하여 백제 개로왕 부여경(扶餘慶)을 살해 했다 . 백제는 한반도 남쪽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화려했던 대륙백제와 동백제가 짧은 기간 안에 시들어 졌다 . 이를 회복 하려고 오호십육국을 통일한 수 문제의 힘을 빌리려 했지만 수 문제는 백제의 속샘이 의심스러워 허락 하지 않았다 .대륙백제에도 수도가 있었다하여 백제는 왕이 두곳에 성을 두고 산다고 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모두 중국문헌을 인용하여 백제가 고구려 남평양(南平壤)을 취해 한성(漢城) 또는 한산성(漢山城)을 수도로 했다고 기록 했다. 삼국유사에서는 이 곳을 “今楊州今廣州”로 잘못 주를 달아 기록 했다.
평양 대동강 유역에 산제한 낙랑(樂浪)유적지가 온조왕이 세운 동백제 (東百濟)의 경기지역(京畿地域)이었다 .
끝
March 19,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