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 본통 한국 (樂浪本統韓國)이라는 곳에서 폭동이 났다.
염사치 사건과 같이 이 난리(亂離)도 한국 기록에서는 찾아 볼수 없다. 다른 글자로 실렸다고 본다. 시대와 장소 (攻帶方郡崎離營)가 기록 되였다. 이 문구를 분석하여 현제 지명으로 언제 어디서 발생했나를 밝히려 한다.
발생 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왜가 모두 발해만 연안에 있었던 시대다.
위진 시대는 조위(魏, 220년 ~ 265년) 46년과 서진(西晉, 265년 ~ 317년)의 52년을 더한 108년을 의미 한다. 경초(景初)란 년호는 조위 명제 치세중“237년 – 239년”에 썼다. 공손연(公孫淵 , ?198-238)을 정벌 하던 시기다. 오나라 손권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냈던 장이 허안(張彌、許晏)으로 기록된 백제 사신 호위 (胡衛)를 처형하고 목을 위에 보내기도 하고, 조위가 요동의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자 군사 1,000여 명을 보내 위를 도왔다 . 그가 고구려 제11대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년 ~ 248년)이다.
백제는 8대 국왕으로 알려진 고이왕 (古爾王, 재위: 234년 ~ 286년)이 다스리던 때다. 그가 백제의 중흥을 이르켰다고 평한다. 분산 되였던 백제 부족국가를 통합하고 군사지휘권을 장악 했다. 신라는11대 석씨(昔氏)조분이사금 (助賁 泥師今, 230년- 247년)이 다스리던 때, 석우로(昔于老)가 활동하던 시절이다. 신라 초기의 중흥을 이루었다. 왜, 백제, 고구려와 맏서 싸우기도 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조위가 요동의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고 그가 영향력을 미치던 지역을 조위 관활로 바꾸려 하자 삼한의 후예들이 반기를 들고 이러서던 시대다. 이를 동양사 측면에서 보면 조위(魏, 220년 ~ 265년) 46년과 서진 (西晉, 265년 – 317년)의 52년을 더한 108년을 의미 한다. 흔히 말하는 위진시대(魏晉時代, 220년 ~ 420년)의 짧은 한 토막이다. 중국사가들은 이시대에 중원 세력이 동북쪽으로 한반도에 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 당시 살았던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와 한국 삼국사기를 근거로 사실을 추적해 본다.
초대 무제 사마염이 서진을 새우고 기반을 다져나가던 시기다. 그러나 그의 말년에는 사치에 빠져 온나라가 향락에 들떠 국가 기강이 흐터졌고, 제 2대 혜제 (孝惠皇帝; 259年-307年) 때에는 건국 초기부터 체용 되였던 고조선의 서부 부족들이 군사력을 장악하였다. 이들이 주동이 되여 봉기 했다. 해제는 “팔왕의 난과 뒤를 이어 영가의 난”을 맞아 결국 건국 52년 만에 흉노의 유연이 세운 한나라에 멸망했다. 중국사서에는 당시 득세 했던 삼한의 후예들의 활동상을 은미하게 기록에 남겼다. 필자가 밝힌 대륙 백제와 고구려가 팽창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초기 백제가 다루던 영역이 중국 문헌에는 공손씨 세력의 영향권으로 기록 되였다고 본다. 그 동쪽 지역이 온조왕이 세운 동백제의 영역이 된다.
발생 장소 “攻帶方郡崎離營”:
조위의 마지막 황제로 부터 선양을 받아 서진의 첫 황제가 된 세조 무황제 사마염(西晉 世祖 武皇帝 司馬炎, 236년-290년)를 마한왕이 찾아 갔다.
통전에 따르면, 마한 왕에게 물어 보니 그는 모르는 일이라 했다. 옛 마한은 서진 초창기에 마한왕(馬韓王)이 통치 하던 마한과는 다른 지역이란 뜻이다 . 이 때 서진의 세력이 동쪽으로 가장 멀리 퍼저 났다. 오림이사건 발생한 “낙랑본통 한국(樂浪本統韓國)이라고 한 마한 땅”은 한성 (漢城), 즉 오늘의 한반도 평양에 자리잡고 있던 백제 왕이 다스리던 지역이 아니였다.
삼국사기에 근거가 있다.
박혁거세 38년에 호공을 보내 마한왕에 고공 했다. 그 다음 해인 기원전 19년에 마한왕이 새상을 떠났다. 신라 사람들이 서한왕(西韓王)이라고 불렀다. 그 마한은 최초 신라의 수도 서쪽에 있었다는 증거다 . 요동만으로 흐르는 요하 서쪽에 마한왕이 있었다. 삼국지 변진전에도 마한이 동쪽 땅을 잘라 진한 (辰韓)에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한 또는 진국이라고도 기록된 요동 반도에 있었다.
백제 온조왕 24년(기원후 6년)에 웅천책을 만들었다.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마한왕이 살던 곳에서 동북쪽에 있는 땅 100리를 띠어 주어 온조왕이 자리를 잡게 했는데 왜 산책을 쌓느냐고” 책망 했다. 온조왕 제위 26-27년 간에 요동 반도를 지나 한반도에 있던 마한을 습격하여 마한의 수도를 백제의 수도로 했다.
남만주에서 남쪽 물을 건너 한반도에 또하나 수도를 설치하고 주민을 두 곳에 나누어 살도록 옮기던 시절이다 . 이 곳이 평양일대에 있는 낙랑 유적지라고 본다. 그러나 멸망한 마한의 잔여 세력은 반항 했다. 온조왕이 직접 출전하여 두 성을 함락시켰다. 주동자 주근(周勤)이 자결하여 반항 세력이 제거되였다 . 온조왕의 아들 다루왕 7년인 기원후 34년에는 남주군에 명하여 벼 농사(令國南州郡)를 짓게 했다. 벼는 만주 땅에서 자랄수 없다. 백제세력 이 한반도 남부 지역 까지 퍼저 나갔다는 생태학적 증거다 .
마한이 망했는데 또 마한왕이 있다고 했다. 삼한이 발생한 순서를 보더라도 마한이 만주 땅에서 제일 먼저 생겨 났고, 만주 땅에 있던 마한은 오랫동안 지속되였다 .
오림이 사건은 남만주 땅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평양 일대에서 발굴되는 낙랑유적은 중국문화의 유적이 아니라 온조왕이 세운 동백제 (東百濟)의 유적이다.
끝
March 22,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