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두주 동안에 온 새상이 떠들석하는 큰 사건들이 발생 했다. 모든 것을 다 외면하고 저나름 대로 갈길을 갔던 동키호태 (Don Quixote)같이 필자가 생의 마지막 학업으로 선정한 “古朝鮮 찾기”를 계속 합니다.
진수는 중원에서 고조선의 수도에 이르는 통상로를 삼국지 변진전(弁辰傳)에 실었다. 지리적으로는 발해만 서남쪽에서 조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이다. 사마천이 “진번방중국(真番旁眾國), 즉 진한 번한들이 사는 방향에 있는 여러 나라들”이라고 기록한 곳이다. 먼 훗날 당태종이 만주지역에서 고구려와 싸우고 남긴 글 극고구려백암성소 (克高麗白巖城詔)에 고구려 사람들을 삼한사 (三韓士)라 부르고 백암성 일대를 변진지야 (弁辰之野)라 했다.
그 안에는 여러가지 사실을 은밀하게 기록에 남겼다. 그 대표적 표현이 “문신 (文身) 철 (鐵) 왜 (倭) 도전 (刀錢, Knife money) 거문고 (瑟) 진왕 상용 마한인”하는 문구다.
문신 (文身):
진수는 문신(文身)을 왜 (倭)의 독특한 풍속으로 기술 했다. 모두들 그렇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문신(文身)은 왜 (倭)의 특징이 아니라, 삼한의 후예들이 특별한 예식에 을 뜻이다 . 이는 서부영화에서 보는 인디안들의 엄숙한 행사에 나타난 장면과 같다.
왜인전 두쩨 구절에
발해만 연안에살던 사람들이 하던 풍속을 저나름 대로 을 썼다. 사마천이 남긴 는 문구를 인용하여 설명 했다 . 사마천은 황하문명의 발생지인 서안 해지연안의 옛 12주를 우왕이 치수사업에 성공하여 구주(九州, 九疇)로 만들었다 는 영역을 한무제 당시의 중국 전역으로 확장하여 설명하느라고 산서성 분수하류 에 있던 회계산, 수양산을 중원의 동쪽 해안지대로 뒤바꾸어 설명했다.
진시황 일행이 발해만 서쪽 해안에 이르렀을 때 제나라 방사(方士) 서시(齊人徐市, 徐福 )가 건의 하여 는 일화가 있다 . 이를 한무제 당시 제상이였던 공손홍가 믿고 한무제도 믿었다 . 이를 삼국지에서는 홍수가 범람하던 구려/리(九黎)의 땅을 개발하고 회계산 (會稽山)에서 백익(伯益)에게 임무를 맞기고 죽었다 . 이 사실을 뒤바꾸어 (아니면 오인 하여) 회계산이 동오의 손권이 다스리던 지역에 있었다고 풀이했다. 그러한 개념을 오주전(吳主傳)에도 실었다 . 하여 각종 문신을 하고 사는 왜가 거리와 방향을 계산해 보면 마땅이 회계 동쪽이 된다고 추리 했다 .
왜인 또한 삼한의 후예다. 문신(文身)을 삼한의 후예들이 모두 했다. 삼국지에는 “한전, 진번전 왜인전”에 모두 문신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변진전 사람들이 왜와 가까이 산다고 했다 .
후한서 동이열전에도 마한을 소개 하면서 동쪽으로 왜와 접하고 문신(文身)을 한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 변진과 진한은 섞여 산다. 성곽 의복은 모두 같다. 언어 풍속은 다르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부여(不與)를 훈역한 결과다. 그들은 체격이 크고 형법이 엄준하다. 가까운 곳에는 문신(文身)을 한 사람이 있다. 변진전이 어느 곳이 였나를 찾으면 왜가 있었던 곳이 확인 된다. 왜자는 기자 일행이 서주 수도 호경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읊은 시경소아 사장(詩經 小雅 四牡) 에 주도왜지(周道倭遟)에 란 시구로 실려 있다 . 진시황을 살해하려고 철퇴를 휘들렀다는 백랑사, 즉 남여가 피란민을 인솔하고 와서 자리 잡았다는 창해군이 설치되였던 곳이다.
문신에 관해서는 통전에서도 삼국지나 후한서의 내용과 같이 마한 진한이 왜인과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문신(文身)을 했다 . 진한전에 실린 사람들은 진시황의 노역을 피해 와서 한인들에 적응 했다. 마한이 분리되여 그 동쪽 땅을 분활하려 주었다는 곳이다. 성을 쌓고 울타리를 치고 산다. 그들의 언어는 부여와 마한과 같다. 남녀 불문 하고 왜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문신(文身)을 했다 .
<변진전 사람들이 왜와 가까이 산다고 했다 . 변진전은 발해만 서쪽 해안 청구땅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그렸다. 왜인이 그 당시 발해만 서안에 살았다는 확실한 근거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한서에 실린 조선해중(朝鮮海中)이란 문구는 대륙백제 (百濟)가 주동이 되여 한해 (翰海)의 통상권을 장악했다는 뜻이다. 이들이 삼한의 후예들(백제, 가야, 신라, 왜, 탐라, 유구)이다. 백여 부족이 물을 건너 새운 연방제란 뜻의 백가제해(百家濟海), 즉 백제(百濟)를 진수는 왜(倭)자로 대치 했다.
많은 왜인이 중국어를 알아, 마치 중국의 일부 같다. 그들의 풍속 언어는 옛 조선, 중국과 같아 (뿌리가 같은)강족과 동호가 섞여 사는 것과 같은 꼴이다. 각기 중국의 성씨와 같은 성씨를 같고 있다. 그들 부락이 점차 자라 수만에 이르고, 옛 조선의 동부 선비와 같다. 그들은 단일종이 아니다. 대호(大胡)도 있고 정영(丁令)도 있고 혹자는 강족이 사는 곳에 가서 섞여 있다 . 고조선 지역에 살던 여러 부족이 뱃길로 한해 (翰海)를 통해 피란 가려고 모여든 상황을 그렸다.
그들은 사활을 예측할수 없는 위험한 상태에 직면하여 모두들 천신께 기원하는 의식에 따라 문신을 했다. 이를 동물(蛟龍)에 발견되지 않으려고 문신을 했다고 기록 했다. 지금은 물속에 깊히 들어가 생선과 조개를 잡을 때 몸을 숨기기 위함이다. 여러 부족의 문신(文身)이 각기 다르다고 했다. 왜인전에 실은 “몸을 숨기기 위한 수단으로 문신을 했다”는 진수의 설명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가를 확인할 사료가 없다. 그러나 삼한 사람들이 모두 문신(文身)을 했다는 점은 틀림이 없다.
사기여러 곳에에 나타난다 . 춘추 애공편에도 있다 . 같은 내용을 춘추 곡량전 (春秋穀梁傳)에서는 는 뜻이다 .
전국책에는 피발문신(被髪文身)이라 했다. 일주서에는 부여(符婁, 扶餘)와 함께 “전발문신(鬋髮文身), 즉 머리를 손질 하지 않고 옛 적 같이 머리털을 내려뜨린 상태”란 문구가 있다. 이를 사마천은 “斷髮文身” 또는 “文身斷發”로 바꾸었다 . 후한서에는 남자모두 경면문신(黥面文身)이라 했다. 그 형상은 과 비슷하다. 한국 풍속에 무당이 한 분장의 원형이라 본다.
끝, 다음에 계속.
May 16,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